아무리 펑년보다 포근한 겨울이 될 거라고 기상청에서 떠들어 대도 첫눈은 꼭 내렸다. 늦더라도. 반드시. 그건 마치 늦더라도 기필코 뭔가를 ‘이룬다’거나 ‘해낸다’는 뜻 같기도 했다. 그러니까 저 눈은 지금 높은 데서 떨어지면서, 부딪치고 깨지면서 무언가를 이루고 있는 셈이었다. 녹아 없어지면서 드디어 해내고 마는 것이었다. 뭔가를 이루거나 해내는 것이 저렇게 흔적 없이 사라지는 방식이라면 남자도 얼마든지 그럴 수 있을 것 같았다.p.82
밤은 누군가의 울음을 알아차리기에도, 남한테 알리기에도 좋은 시간이다. 몰래 울기에도 좋은 때다. 하여튼 밤은 여러모로 울기 좋은 시간이다. 모든 사람들이 밤에 운다면 슬픔은 오래가지 않을 것이다. p.44
바깥은 이제 어둡고 깜깜한 밤이다. 어두운 밤의 색을 사람들은 까맣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것이 정말 까만 것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다. 우주는 쏟아지는 빛으로 찬란하고, 빛은 무한한 스펙트럼을 가지고 있다. 인간은 다만 육안으로 볼 수 있는 것만을 인지할 뿐 한계 없는 존재라는 것은 아득한 꿈일지도 모른다.
안는다는 행위는 몸이 몸을 안는 육체적 행위를 넘어 마음을 다해 서로를 품을 때 치유가 된다. 무엇인가를 안는 그 순간 우리는 세상에 혼자 선 서로를 잊어버리며 고독 속에 모든 것이 연결됨을 안다. 어머니가 하나뿐인 아기를 안듯 우리는 저마다의 상처를 안는다. 그것은 결코 소유의 차원이 아니다. 모든 사랑은 상대가 있으며 상대에겐 상대의 우주가 있다. 나의 우주와 당신의 우주가서로를 받아들여 하나가 되는 것을 사람들은 사랑이라 부른다. 받아들인다는 것은 대상을 편견이나 분별 없이 있는 그대로 본다는것이다. 그때의 하나는 숫자로서의 하나가 아니라 둘이면서 하나인 상태다. 한 송이 들꽃처럼 약하지만 우리는 어딘가에 연결됨으로써 세상을 안는다.
"미안할 건 없어요. 기억에 없다는 건 원래 없었던 것이니까요."기억되지 않는 한 존재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과거의근원은 현재이며 그것은 지금 이 순간 내가 지어내지 않는 한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은 끊임없이 계속되는 현재만을 살 뿐이다. 최면이나 그 어떤 수단을 통해 과거로 시간 여행을 한다 한들 그것이결코 과거의 삶을 현재의 삶으로 바꾸어놓을 수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