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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모 비룡소 걸작선 13
미하엘 엔데 지음, 한미희 옮김 / 비룡소 / 199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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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한가한 주말 아침 으스스한 한기가 온 거실을 엄습한다. 환기를 위해 열어둔 아파트 베란다 창을 통해 들어온 서늘한 바깥 공기 때문이 결코 아니다. 오히려 바깥 공기엔 창으로 내다보이는 앞산의 맑은 산 공기가 가득 담겨있어 피톤치드를 거실에 흩뿌려준다. 상쾌한 아침을 무겁고도 음침하게 가라앉게 한 건 아내의 입에서 아들에게 전달된 한 마디 말 때문이다.

"시간을 아껴라!"

일요일이라 아침 여덟시 반에야 겨우 일어난 아들의 시간관념은 시험을 앞 둔 이 시대의 부모의 입장에선 영 못마땅하다. 그도 그럴 것이 언제나 느긋하기만 한 아들은 느릿느릿 세면을 하고 부스스한 머리칼과 퀭한 눈을 하고 식탁에 앉는다. 식탁에 앉아서도 시험과 관계없는 역사만화를 펼쳐놓고 있다. 또 다시 이어지는 아내의 일갈은 일순간 한가한 일요일 아침에 시간의 가속페달을 밟게 만든다.

"넌 지금 2%가 부족해."

마치 그 부족한 2%를 자투리 시간으로 부지런히 채워야 백 퍼센트의 행복이 충전될 수 있다는 듯 아내는 시간을 독촉하고 있다. 아마도 그 2%의 저축된 시간은 회색 신사들의 몫이 아닐까 싶다. 아니 아들의 멋진 반격처럼 4%의 시간이 그들에게 돌아갈지도 모른다. 아들은 말한다. "늘 엄마가 제시한 숫자의 곱절이 점수에서 사라지던데..."

이 순간 새벽녘까지 모모를 손에서 떼지 못하고 다 읽어야했던 나는 우리 가정에 가득 들어찬 회색 신사를 쫓게 된다. 실체가 없어, 보이지도 않는 그들을 어찌 쫓느냐고? 호라 박사가 말하지 않던가?

"(회색 신사들은) 죽은 것으로 목숨을 이어가기 때문이지. 너도 알다시피 그들은 인간의 일생을 먹고 살아간단다. 허나 진짜 주인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시간은 말 그대로 죽은 시간이 되는 게야."

결국 회색 신사는 '죽은 시간'에 다름 아니다. 인간 스스로가 헛된 망상으로 놓쳐버린 시간. 진정한 자아를 상실하고 타자의 삶을 추구하는 삶에서 자신으로부터 멀어져간 시간. 내가 진정 원하는 삶의 목표가 아니라 일반적인 목표를 향해 정진하는 삶에서 허비해버린 자신의 시간. 결국 회색 신사를 쫓는 것은 '죽은 시간'을 생산해내는 스스로의 내면적 삶을 들여다보는 것이다.

그렇다면 '죽은 시간'을 만들어내는 삶은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일까? 그것은 회색 신사 영업사원 BLW 553 c호가 모모를 꾀기 위해 던진 말에서 짐작해볼 수 있다.

"인생에서 중요한 건 딱 한 가지야. 뭔가를 이루고, 뭔가 중요한 인물이 되고, 뭔가를 손에 쥐는 거지."

오로지 하나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 치열하게 사는 삶, 사회적으로 더 높은 지위를 차지하기 위해 남과 경쟁하는 삶, 경제적인 풍요로움을 누리기 위해 끊임없이 모으는 삶에서 '죽은 시간'은 만들어진다. 이런 삶은 친구보다 앞서 뛰어가야 하고, 가족과 이웃을 돌아보기보다 자신의 앞만 보고 내달려야 하기 때문에 친절, 우정, 사랑과 같은 삶의 진정한 가치는 뒷전으로 밀릴 수밖에 없다. 회색 신사는 이처럼 점점 스스로의 삶을 부정하고 타자의 삶을 자신의 삶으로 끌어들이는 사람이 많아질 때 자신의 덩치를 점점 키워나갈 수 있다. 그만큼 그들의 냉동 금고에는 사람들이 스스로 포기해버린 시간이 쌓여가기 때문이다. 그렇게 축적된 '죽은 시간'은 더 큰 세력으로 자라나 인간을 옴짝달싹 못하게 옭아매버린다. 인간들은 자신도 모르는 새 그들의 의지대로 로봇처럼 움직이는 꼭두각시가 된다.

이런 면에서 현대인의 삶에서 회색 신사를 물리치기란 그리 수월치 않아 보인다. 이미 우리 주변에 회색 신사들에게 자신의 시간을 내맡겨버린 사람들이 넘쳐나기 때문이다. 일단 회색 신사들이 대부분을 점유해버린 사회에서 그들의 손아귀를 벗어나려고 발버둥을 쳐봤자 소용없는 경우가 허다하다. 현실적으로 그들의 유혹을 물리치는 건 사회적 통념을 벗어나 자신이 추구하는, 자신이 진정 원하는, 자신만의 독특한 삶을 과감하게 추구한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수많은 주변의 손가락질을 감수해야할 경우가 많아진다. 이를 단호하게 물리치고 돈과 명예를 떠나 진정한 내면적 자아를 추구할만한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되겠는가? 이런 사회에는 회색 신사들을 대리하는 인간들이 넘쳐나게 마련이다. 그들은 온갖 화려한 문구들을 거리에 덕지덕지 붙여 지나가는 사람들의 따뜻한 가슴을 싸늘하게 식게 만든다. 오늘도 서울 시내 한복판의 마천루에는 아이돌 그룹이 섹시한 몸짓으로 당신을 유혹하고, 텔레비전에선 S자 곡선의 몸매를 자랑하는 연예인이 마치 너도 나처럼 될 수 있다고 당신을 꼬드기고 있지 않는가? 그리하여 회색 신사들이 가장 공략하기 힘들다는 어린이들마저도 그들의 허튼 소리와 몸동작을 로봇처럼 흉내 내고 있지 않은가?

그러므로 그들의 무자비한 공격을 막아내기 위해 자신의 삶을 꼼꼼히 따져볼 일이다. 더 이상 내 삶을 남에게 맡기지 않기 위해 내가 진정 가야할 길이 무엇인지 정확히 찾아볼 일이다.

먼저 자신의 삶에 만족하지 못하고 푸념이나 늘어놓고 있진 않은지, 스스로의 삶을 실패작이라 여기며 화려하고 멋진 다른 삶을 꿈꾸고 있지나 않은지, 그리하여 부질없는 돈과 명예를 추구하며 정작 중요한 가치를 소홀히 여기고 있지나 않은지 자신의 삶을 요모조모 따져보며 반성해 보자. 헛된 망상의 미래를 그리며 현재를 부정하는 순간 회색 신사가 푸른빛 도는 초록색 연기를 뿜어내는 시간의 시가를 꼬나물고 나타날지 모르기 때문이다. 어느 날, 이발사인 푸지 씨가 "내 인생은 실패작이야. 난 누구지? 고작 보잘 것 없는 이발사일 뿐이지, 이게 내 현재 모습이야. 제대로 된 인생을 다시 살 수만 있다면 전혀 다른 사람이 될 수 있을 텐데."라고 말하는 순간 불현듯 나타났듯이 말이다. 늘 주변 사람들과 따뜻한 가슴으로 만났던 그가 일순간 이발사로서의 자신의 삶을 부정하는 순간 회색 신사는 그의 심약한 마음을 여지없이 파고들었다.

다음으로 회색 신사들이 내 삶에 생겨날 기회를 제공하지 않기 위해 '가슴으로 느끼는 삶'을 살자. 가슴으로 느끼지 않는 삶은 내 삶이 아니다. 어떤 목표를 추구하든,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무엇을 하든 진정으로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는, 진정 내면의 깊은 감정으로 승화되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래야만 삶의 한 순간 한 순간이 진정 자기 것이 된다. 그런 삶의 시간은 '죽은 시간'이 아닌 '살아있는 시간'이다. 사람들은 저마다의 가슴이 있기에 자신만의 황금빛 시간의 사원을 하나씩 가지고 있다 한다. 그 시간의 사원에서 가슴을 열고 심장을 쿵쿵 뛰게 하는 나만의 인생을 설계해보자. 그럼 황금빛이 절대 회색빛으로 가려지지 않을 것이다. 그곳엔 절대 회색 신사도 감히 범접하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지금의 내겐 왠지 자신감이 넘쳐나지 않는다. 굳은 결심으로 내 인생을 좀 먹는 회색 신사들과 맞서리라 다짐하건만 왠지 자꾸만 망설여진다. 아마 내 황금빛 시간의 사원에도 이미 그들이 점유한 부분이 많아서인 것 같다. 그들의 솔깃한 제안에 암묵적으로 동조했던 이전의 삶이 한 순간에 연기처럼 사라지긴 힘들기 때문이리라. 그들의 입에 물린 나의 시가를 확 빼앗아 내동댕이쳐버리고 싶은데 그러지 못하는 건 나의 습관적 '재촉병'이 내 몸 뼛속까지 침투해 있기 때문이리라. '이 세상에는 쿵쿵 뛰고 있는데도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눈 멀고 귀 먹은 가슴들이 수두룩하다던' 호라 박사의 말처럼 나도 어리석은 인간의 부류를 벗어나지 못했나 보다. 아무래도 호라 박사가 모모에게 전하는 메시지를 큼지막하게 메모장에 적어 책상 곁에 붙여두고 마음이 약해질 때마다 다시 새겨야 할 것 같다.

호라 박사는 모모에게 전한다.

"이 세상의 운행에는 이따금 특별한 순간이 있단다. 그 순간이 오면, 저 하늘 가장 먼 곳에 있는 별까지 이 세상 모든 사물과 존재들이 아주 독특한 방식으로 서로 영향을 미쳐서, 이제껏 일어나지 않았고, 앞으로도 일어날 수 없는 어떤 일이 일어날 수 있지. 애석하게도 인간들은 대개 그 순간을 이용할 줄 몰라, 그래서 운명의 시간은 아무도 깨닫지 못하고 지나가 버릴 때가 많단다. 허나 그 시간을 알아보는 사람이 있으면 아주 위대한 일이 이 세상에 벌어지지."

나도 내 '운명의 시간을 놓치지 않기 위해 지금부터라도 가슴을 열고 쿵쿵 뛰는 심장을 느끼며 살려한다. 물론 쉽진 않겠지만 천천히 서두르지 않고 내 황금빛 시간의 사원에서 회색 신사들을 조금씩 몰아내려한다. 그리하여 그들이 회색 시가에서 뿜어내는 역겨운 초록빛 연기가 내 빛나는 황금 사원을 오염시키지 않도록 차츰 정화시키려 한다. 그러면 어느 순간 내게도 위대한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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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인의 징표
브래드 멜처 지음, 박산호 옮김 / 다산책방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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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의문, 의문을 풀어가는 주인공의 영웅적 행동, 또 그 미스터리한 의문이 하나씩 풀려갈 때마다 터지는 감탄사, 그리고 일 초라도 긴장을 늦출 수 없는 긴박감까지 처음 이 책을 접할 때 나는 댄 브라운의 <다빈치 코드>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심지어 온갖 위험을 무릅쓰고 고고학적 유물을 추적하고 그 비밀의 열쇠를 해독해가는 과정까지 완전히 닮은꼴로 여겨졌다. 하지만 어쩌랴! 그 흥미진진함이 내 마음을 사로잡고 한번 책에 눈길을 준 이상 절대로 시선을 돌릴 수 없는 것을.

실은 이런 측면 때문에 개인적으로는 미스터리 추리 소설을 좋아하지 않는다. 아니 좋아하지 않는다기보다는 일부러 피한다. 일단 발을 들여놓게 되면 다 읽을 때까지 다른 아무 것에도 눈길을 줄 수 없기 때문이다. 한권의 책을 읽고 나면 그에 그치지 않고 그 여운이 오래도록 나를 사로잡아 저자의 다른 책으로 전염병처럼 옮아간다. <다빈치 코드>를 통해 댄 브라운을 접할 때도 그랬다. <다빈치 코드>를 읽은 후, <천사와 악마>, <디셉션 포인트>, <디지털 포트리스>까지 섭렵하고서야 댄 브라운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번엔 이 책의 저자 브래드 멜처다. 그가 내 영혼을 온통 사로잡아 버렸다. 당분간 그의 유혹에서 벗어나기 힘들 것 같다. 이토록 그가 나를 뒤흔든 것은 댄 브라운에서 벗어난 이후 또 다시 미스터리 추리의 세계로 나를 이끌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오히려 댄 브라운 식의 미스터리 추리 소설은 이제 좀 식상하다. 만약 브래드 멜처가 끝까지 댄 브라운과 닮은꼴로 여겨졌다면 나는 굳이 이 책을 끝까지 읽을 필요를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책을 읽어가는 동안 나는 브래드 멜처만의 매력을 발견했다. 그에겐 그만의 스타일이 있다. 댄 브라운과 전혀 다른 그만의 독특한 매력이 있다. 그것이 나를 더욱 그에게 관심을 쏟게 만든다.

댄 브라운은 나를 최초로 미스터리 추리 소설의 매력에 흠뻑 젖게 했지만 그만큼 나를 허탈하게 만든 장본인이다. 쫓고 쫓기는 숨 막히는 사건의 전개 속에서 한시도 긴장의 고삐를 늦추지 못하고 주인공에 동화되어 결국 종국에 이르렀을 때의 공허감, 그 순간 ‘도대체 내가 무얼 쫓아온 거지?’라고 되묻고 있는 나를 보게 된다. 소설의 흥미에 빠져드는 순간 마치 내가 비밀의 열쇠를 캐내는 주인공이나 된 것 같은 착각에 빠지지만 사건이 종결된 후 마지막에 내게 남겨진 것은 갑자기 텅비어버린 머리뿐이다. 그건 재미있는 코미디 영화를 보면서 깔깔 웃다가 가벼운 발걸음으로 영화관을 나서는 관객과 똑같다. 그건 시간을 때우는 하나의 오락물이다.  

브래드 멜처는 다르다. 우선 그가 창조한 캐릭터는 인간미가 넘친다. 그들은 대부분 인간적 상처를 안고 산다. 겉으론 영웅처럼 보이지만 영웅이 아니다. 우리에게 슈퍼맨으로 불리는 클라크 켄트도, 슈퍼맨을 탄생시킨 제리 시걸도, 고고학적 유물을 추적하는 주인공 캘빈 하퍼도 모두 마음에 큰 상처를 가지고 있다. 심지어는 다른 목적으로 목숨을 걸고 카인의 징표를 찾는 이들도 하나같이 상처 입은 영혼들이다. 그들은 그들 나름의 목적으로 카인의 징표를 찾아 나선다. 그러다 그 과정에서 운명처럼 서로 엮어진다. 보물을 향한 인간적 욕망의 엮임이 서로에게 더 큰 상처를 만들어 내기에 독자인 나의 마음을 아리게 한다. 하지만 독자 입장에선 애초 그들의 어쩔 수 없는 슬픈 운명에 공감하기에 이어지는 살인에도 오히려 등장인물에 대한 무한한 애정을 느끼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저자 스스로가 그런 애정을 가지고 캐릭터를 창조했다고 생각된다.

둘째로 저자의 이야기엔 가족이 있다. 서로의 상처를 염려하고 보듬어주는 가족이 있다. 자신이 낳은 자식이 아닌데도 처녀의 몸으로 죽은 동료의 아들을 자식처럼 돌보는 연방경찰 나오미, 부부 싸움 도중 아내를 밀쳐 죽음에 이르게 한 아버지를 19년 동안 기다린 주인공 캘빈 하퍼, 겉으로 와는 달리 내심으론 아들에 대한 애틋한 감정을 지워내지 못한 캘빈 하퍼의 아버지 리오드 등은 내게 가족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 묻게 한다. 무엇보다 거리의 부랑아들에게 새로운 쉼터를 안내하는 주인공 캘빈 하퍼의 삶이 소설 내용의 긴박함 속에서도 가정에서 느끼는 마음의 여유를 갖게 한다. 

 셋째로 영혼을 뒤흔드는 강렬한 메시지가 있다. 카인의 징표가 바로 독자에게 던지는 메시지의 핵심이다. 독자는 주인공과 함께 결국 그 비밀의 징표에 담긴 메시지를 찾아 끝까지 숨 가쁘게 달려온 것이다. 그 징표는 인간적 화해를 이야기 한다. 그들이 찾던 징표인 ‘궁극의 그림’은 아버지의 무릎에 앉아 있는 어린 아이가 아버지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지극히 소박한 내용이다. 주인공은 독자와 함께 그 궁극의 그림을 찾아 나선 것이다. 그림이 던지는 메시지는 다름 아닌 가족 간의 대화, 이야기, 소통이다. 너무나 평범하고 진부한 결론이지만 그 무엇과도 견줄 수 없는 소중한 보물이다. 그렇다면 아버지가 무릎에 앉아 있는 아이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는 무엇일까? 무슨 신비한 주문이나 마법 같은 주술이 아닐 것이다. 그저 평범한 부자간의 대화, 그건 ‘너만의 이야기를 들려주라.’는 메시지이다.

 이전에 내가 접한 미스터리 추리 소설과 다른 이런 몇 가지의 핵심적 요소 때문에 나는 이 책을 끝까지 놓지 못했다. 오히려 마지막 장의 극적 반전이 책을 덮고 난 후에도 내 심중을 자극하는 감동의 여운으로 오래도록 남았기에 중간에 읽기를 멈췄다면 크게 후회할 뻔했다는 생각이 든다. 그만큼 이 책은 오락적 요소의 추리가 남기는 허탈감과 확연히 구분되는 미묘한 뒤끝이 있다. 그것의 징표는 눈물 자국으로 남는다. 카인의 징표가 던지는 메시지를 접한 주인공의 눈에서 저절로 흐르는 눈물. 그것은 고스란히 내 마음에 전이되어 내 눈에도 그렁그렁 눈물이 맺히게 했다. 캘빈 하퍼가 자신의 아버지에 대한 슬픈 기억으로 눈가가 슬며시 젖었듯이 나 또한 나의 아버지에 대한 기억으로 눈가에 눈물방울이 맺힌 것이다.

나의 눈물은 회한의 눈물이다. 평생 가정을 잘 돌보지 못한 아버지를 내심 무시한 내 스스로의 죄책감의 표식이다. 아들을 낳고 기르면서 나는 아버지를 이해하게 되었다. 무능한 아버지도 늘 자식의 앞날을 걱정하며 나름대로 노력하셨다는 것이 이제는 내 눈에 보인다. 다만 그분의 능력이 그 열정에 미치지 못해 가끔 실수를 하신 것뿐이란 것을 이젠 진심으로 느끼고 있다. 카인의 징표는 이런 나의 죄책감을 다소나마 씻어준다. 그리고 앞으로 그 죄책감을 말끔히 씻기 위해 내가 해야 할 일을 또렷이 보여준다. 이제는 몸이 불편하신 아버지가 아니라 내가 아버지에게 ‘나만의 이야기’를 들려주어야 할 시기인 것 같다. 또한 먼 훗날 아버지를 회한의 시선으로 바라보지 않도록 아들에게도 ‘나만의 이야기’를 들려주어야 겠다. 그것이 카인의 징표인 ‘진실의 서’를 내 인생의 보물로 영원히 간직하는 길이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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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해, 스이카
하야시 미키 지음, 김은희 옮김 / 다산책방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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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오늘 교사로서 내 스스로에게 묻는다. 나를 거쳐 간 지금까지의 학생 중에 스이카처럼 고통스러워한 학생은 없었는가? 말 못할 고민을 가슴에 품은 채 아무에게도 털어놓지 못하고 소중한 학창시절을 고통 속에 보냈던 학생은 없었는가? 꼭 스이카처럼 죽음에 이르는 큰일을 당하진 않았더라도 급우의 사소한 괴롭힘에 나름대로 힘들어하는 학생을 외면한 채 그냥 넘겨버린 적은 없었는가? 혹 성격상 스스로 남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 아이를 성격 탓으로 여기고 무심히 넘겨버린 경우는 없었는가? 뭔가 절실히 도움을 요청하는 학생이 있었는데 그 눈빛을 발견하지 못하고 그냥 지나치지는 않았을까?

이런 계속적인 자문은 주인공 스이카의 고통스런 학교생활이 내 심금을 뒤흔들어 놓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집단 따돌림을 혼자서 감당하며 그에 맞서 싸우다 결국 삶을 포기하기에 이른다. 그녀의 죽음이 나를 자책하게 한 것은 그녀를 둘러싼 주변의 어른들이 조금만 관심을 기울였더라면, 혹은 그녀가 겪고 있는 힘든 상황을 외면하지만 않았더라면 결코 그녀가 죽음이라는 극단적 선택을 하진 않았을 것이란 예상 때문이다. 무엇보다 그녀를 가장 가까이서 지켜봤고 어느 정도 집단 괴롭힘을 목격했던 교사가 그녀를 외면했고, 또한 자녀의 심리적 변화를 가장 빨리 감지할 수 있는 부모가 그녀에게 너무 무관심했다는 사실이 나를 분노케 한다. 그것은 비단 내가 교사나 학부모여서가 아니다. 어리고 여린 여학생이 자신이 감당하기 힘든 고통을 당하고 있고, 자신을 도울 수 있는 가장 가까이 있는 보조자에게 간절한 눈빛으로 도움을 요청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외면한다면 그건 부모나 교사 차원을 떠나 누구라도 관심을 기울여야할 인간관계의 기본적 윤리를 저버린 일이다. 

주인공 스이카에 대한 요우코 그룹의 집단 따돌림은 아주 노골적이다. 이는 조금만 주의를 기울였으면 곧바로 드러날 일이다. 아니 주의를 기울일 필요조차 없다. 매일 일상처럼 반복되는 일이 교사에게 발각되지 않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스이카는 학교건물 뒤편이나 화장실 같은 어두운 곳에 끌려 나가 폭력을 당했던 것이 아니다. 학교생활의 기본적 공간인 교실 내에서 집단 따돌림을 당하고 있고, 그 빈도 또한 한두 차례가 아니었다. 그 수법도 그다지 교묘하지 않아서 거의 공개적으로 드러내놓고 이루어졌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따라서 조금만 관심을 기울였다면 반드시 발각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이 글 속에서의 교사들도 이미 그녀가 당하고 있는 상황을 몇 차례 직접 목격하기도 한다. 하지만 교사들은 그녀의 간절한 눈빛을 외면한 채 무심히 지나쳐 버린다. 학생이 존재 이유인 교사가 어찌 이럴 수 있단 말인가?

부모 또한 마찬가지이다. 거의 매일 반복적으로 지속되는 폭력은 어린 스이카를 점점 지치게 한다. 처음엔 자신의 힘으로 저항해 보지만 결국 견딜 수 없는 한계에 직면한다. 그런 상황이 그녀를 어떤 심적 상황으로 몰아넣었을까? 점점 평소와 다른 행동 양식과 불안 심리를 분명히 드러내게 될 것이다. 스이카도 분명 평소와 다른 행동의 변화가 있었다. 아무리 그녀가 부모 앞에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연극을 해도 어린 그녀가 완벽하게 감출 수는 없는 일이다. 결국 스이카는 학교에 가기 싫다는 의사를 명백히 표출하기까지 한다. 하지만 부모는 그녀의 등교 거부를 바보 같은 소리로 취급하고 그 이유를 밝히라고 닦달하기까지 한다. 그 상황에서 ‘내가 말하지 않아도 알아줄 수 있잖아.’라고 말하는 스이카의 절규는 자식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엄마에 대한 극단적 절망감의 표현일 것이다.

그래도 절망의 끝에는 희망의 빛줄기가 한 가닥쯤 존재하는 법이다. 학교에서도 집에서도 제자리를 잃고 헤매는 스이카가 몽유병 환자처럼 새벽에 집을 나와 죽을 결심으로 길거리를 방황하다 만나게 된 유리에가 바로 스이카에겐 희망의 빛이었다. 그녀 또한 교통사고로 부모를 잃고 눈까지 실명되어 그런 삶의 무게를 견디다 못해 자살을 결심한 어린 영혼이다. 동병상련이라고 극한 상황에서 조우한 두 영혼은 서로에게 삶의 의지가 되어준다. 자신보다 더 곤란한 처지에서도 교사의 꿈을 키워가는 유리에는 스이카의 마음에 긍정적으로 사는 법을 심어준다. 스이카에게 던지는 그녀의 한 마디 “ 스이카, 그냥 힘내는 거야.”라는 말은 그 누구도 주지 못한 힘과 용기를 북돋는다. 하지만 그마저도 집요한 요우꼬 그룹의 감시망에 발각되고 스이카는 점점 깊은 나락으로 추락하고 말았던 것이다.

결국 죽음이라는 비극적 결말에 이르렀지만 죽음의 순간 우리는 꺼져버린 한 가닥 희망의 불씨를 다시 당긴다. 스이카에게 삶의 용기를 심어주었던 유리에와 , 따돌림을 당하던 그녀를 외면했던 급우 치카의 마지막 용기 있는 행동, 아무런 인간관계도 없는 자신을 살리려 온 힘을 쏟는 의사, 딸의 죽음 앞에서 흐느껴 우는 부모에게서 독자와 스이카는 모두 희망의 불씨를 발견한다. 죽음의 목전에 이른 스이카는 이들의 사랑의 손길로 인해 한 순간 해방감을 느낀다. 그녀는 그 순간 자살을 결심한 이후 처음으로 강렬한 삶의 의욕을 느낀다.

스이카에게 필요한 것은 딱 한 마디 따뜻한 말이었던 것이다. 그것은 유리에의 말 “ 네 덕분에 지금 난 여기 있는 거야! 스이카, 빨리 눈을 떠야지, 아직 네게 중요한 말을 하지 못했어. 아직 고맙다는 말도 하지 못했단 말이야.”라든가, 치카의 말 ‘나, 스이카 덕분에 지금까지 견딜 수 있었어. 난 네가 필요해.’ 라는 짧은 말 속에 잘 표현되어 있다. 스이카는 죽음의 직전에서야 자신이 그토록 듣고 싶어 했던 말을 들은 것이다.

이처럼 이 책은 주인공의 비극적 결말이 독자의 심중을 후비는 아픔이 있다. 하지만 그것이 결코 비극적이지만은 않다. 그것은 그녀의 죽음이 헛되이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리라. 자신을 외면했던 모든 친구들의 마음에 진정한 용기를 심어주고, 부모와 사회엔 따뜻한 관심과 사랑이 얼마나 중요한 지 일깨워주었기 때문이리라. 그녀 또한 이들의 따뜻한 마음을 소중히 간직한 채 다른 세상으로 갈 수 있었기 때문이리라.

이 책이 네게 큰 여운으로 남는 것은 단지 주인공의 비극적 결말 때문만은 아니다. 우리 사회의 학교 현장에서 아직도 집단 괴롭힘은 현재 진행형이고, 우리 사회가 아직도 피해자와 소통의 부재를 안고 있기 때문이다. 입시라는 경쟁 체제에서 명문대 진학에만 관심을 보이는 우리의 학교 현장은 소통의 부재라는 치명적 결함을 안고 있다. 학교의 유일한 관심사는 성적이 뛰어난 학생을 모집하고 그들을 중심으로 학업을 증진시켜 소위 명문대학에 많이 진학시키는 것이다. 그 안에서 교사는 학생들의 생활지도보다는 학습지도에만 관심을 기울이며 자신의 담당 교과목만 잘 가르치면 된다는 안이함에 빠져있다. 이런 학교 현장에서 교사와 학생 간의 진정한 인간적 만남이란 기대하기 힘들다.

그렇다면 우리의 가정은 어떤가? 아이의 적성과는 무관하게 부모의 못다 이룬 꿈을 강요하는 상황이 아닌가? 진정 아이가 이루고자 하는 꿈은 도외시한 채 의사, 한의사, 판사, 변호사 등 일명 잘 나가는 직종에만 얽매여 아이들을 다그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아이들은 암묵적으로 자신의 의지보다는 부모의 의지에 따라 삶의 목표를 정하고, 그것이 자신의 진정한 삶의 목표인양 타인과 동일시된 삶을 지향하게 된다. 이런 상황 속에서 부모와 자식간의 소통은 불가능하다. 그리고 그 소통의 부재는 향후 필연적으로 비극적 결말을 예고한다.

그러므로 이 책은 집단 괴롭힘의 피해자가 읽어야할 책이라기보다 그 주변 인물들이 읽어야할 책이다. 우리의 어린 영혼들이 밝고 건강하게 자랄 수 있도록 그들의 슬픔과 괴로움을 보듬어야할 어른들이 읽어야할 책이다. 부디 이 책을 통해 우리 어린 자녀들에게 사랑과 관심을 쏟는 어른들이 늘어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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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계 천재가 된 홍대리 1 (개정판) - 회계와 성장의 비밀 천재가 된 홍대리
손봉석 지음 / 다산북스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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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또 한 가지 잘못된 편견이 벗겨진다. 나와 상관없는 일이고 복잡하고 골치 아픈 분야라고 여겼던 회계라는 단어가 이토록 쉽게 다가오다니. 대부분의 사람들이 나와 비슷하겠지만 난 회계라는 단어와 전혀 무관한 삶을 산 사람이다. 가정에서든 직장에서든 회계란 단어는 내 삶의 영역에서 저 멀리 떨어져 있는 단어였다. 가정의 재무담당은 아내요, 직장에선 아이들 가르치는 일을 업으로 삼고 있으니 어쩌면 회계란 내 삶의 영역에 전혀 파고들 여지가 없었다. 아니 내 스스로 회계란 숫자놀음을 전문가인 회계사들의 밥벌이 정도로 여겼다고 함이 옳을 것이다. 오죽했으면 주식투자자들에게 제시되는 기업의 손익대차대조표에서 영업이익과 순이익도 제대로 구분하지 못할까?  


그러나 회계란 그리 멀리 있는 게 아니었다. 어찌 보면 삶이란 것 자체가 회계의 연속이었다. 월급을 받고 그것을 쪼개어 생활에 활용하는 것 자체가 회계가 아닌가? 내 가정의 자산과 비용을 산출해 가장 최적의 상태로 운영하는 것. 그를 바탕으로 자신의 부를 축적해나가는 경제 활동. 이것이 바로 회계란 말에 여태 나의 뇌리에 뿌리 깊게 박혀있는 편견이 와르르 무너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렇다면 회계적 측면에서 내 삶을 판단해 볼 때 거의 영점에 가까운 초라한 성적표가 들려진다. 재테크에 늘 관심을 가지면서도 회계란 단어를 멀리했으니 당연한 결과다.  


이 책은 이처럼 회계란 단어를 일상의 생활 영역으로 끌어내렸다. 아니 끌어내렸다기보다는 일반인들의 생활속에 이미 내재되어 있음에도 의식하지 못했던 부분을 인식의 지평으로 끌어냈다는 표현이 맞는 말이다. 이 책으로 인해 회계란 단어는 내 일상의 중요한 부분으로 정착했다. 난 처음으로 내 자산과 생활비용 등을 확실한 원칙에 따라 점검해 보았다. 그리고 앞으로 자산 운용을 어떻게 해야 내 가정의 행복을 보장받고, 내 노후를 편안하게 할 수 있을지도 진지하게 고민해 보았다. 주먹구구식 계산법이 아니라 자산과 비용에 따라 철저히 분리하여 나름대로 장래 계획을 세워보았다.  


하지만 이 책의 내용은 개인적 차원의 회계 문제라기보다는 회사를 경영하는 과정에서 회계의 중요성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영업 실적이 시원찮은 홍대리가 사장의 돌연사로 행해진 새로운 조직 개편 과정에서 회계 담당부서를 지원한다. 당사자의 능력을 고려한 것이 아니고 개인적으로나 회사차원에서나 분위기 쇄신 차원에서 이루어진 이동인지라 영업만 해왔던 홍 대리에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생소한 낯선 환경에 놓여진 셈이다. 이제 그에겐 회계라는 새로운 분야를 정복해야 할 과제가 주어진 것이다. 홍대리가 수행하는 과제는 곧 독자가 따라가야 할 과제이다. 홍 대리의 앞으로의 행적을 쫓아가다보면 자신도 모르게 회계의 기초지식을 습득하는 성과를 얻게 된다.  


이 책의 장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 홍대리가 회계에 관한 한 전혀 초짜라는 사실이다. 즉 완전 초보의 입장에서 시작된 홍 대리처럼 독자 또한 회계의 첫 입문자로 간주된다. 그래서 새내기라는 그 경계선을 넘지 않는다. 지루한 숫자놀음이라는 회계에 대한 흔한 편견에 빠지지 않도록 될 수 있는 한 쉽게 설명한다. 어렵고 난해한 용어를 최대한 자제하고 단지 회계의 기본 골격을 잡아갈 뿐이다. 책의 중간 중간 삽입된 회계의 기초 지식도 평이한 일상적 용어로 설명하는데 주안점을 둔다. 따라서 독자는 다른 회계 용어 사전이나 보조설명서 등 부차적인 도움이 없이도 책을 이해하는데 전혀 지장을 느끼지 않는다.  


무엇보다 이 책은 재미가 있다. 위기에 처한 중소기업을 무대로 극적인 스토리가 전개되기 때문에 한 편의 소설을 읽듯이 술술 읽어나간다. 회계는 흥미진진한 스토리 전개 과정에 내포된 하나의 주제일 뿐이다. 따라서 독자는 지루할 틈이 없다. 이야기는 남편의 돌연사로 졸지에 회사 경영을 맡게 된 아내 최영순 사장이 매각을 강요하는 이사들의 요구에 맞서 회사의 매출 신장을 약속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그녀는 여러 난관에도 불구하고 신상품을 출시하여 매출 신장을 꾀하지만 회사 운영의 실질적 실세인 두 상무의 농간으로 위기에 봉착한다. 그 위기를 홍 대리의 끈질긴 추적과 노력으로 헤쳐 나간다는 줄거리다. 홍 대리의 노력이란 게 바로 회계 문제인 것이다. 바로 상무의 비리 추적과정에서 회사의 경영에 있어 회계의 투명성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독자들은 인식하게 될 것이다.  


이제 독자는 홍 대리의 자신감이 내면에 투사됨을 느끼게 된다. 반드시 회계 전문가는 아닐지라도 회계에 대한 기본적인 골격은 세웠을 것이고, 그것이 자신의 직장생활뿐만 아니라 개인의 자산 운용에도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 자신감이 흔들리는 직장에서의 입지를 공고히 세워주지 않을까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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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쿼시 - 그림자 소년, 소녀를 만나다
팀 보울러 지음, 유영 옮김 / 놀(다산북스)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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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때 아버지를 원망한 적이 있었다. 자식 교육에 무관심하고 스스로에게도 뚜렷한 목표의식이 없이 그냥 그렇게 세월을 죽이며 살아오신 아버지의 인생에 대해서 한심하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있었다. 그래서 난 그런 인생을 살지 않겠다고 이를 악물고 공부한 적이 있었다. 어쩌면 그것은 무능한 아버지 때문에 평생 고생하며 살아야 했던 어머니의 힘들고 고통스런 삶에 대한 내 방식의 반발이었는지 모른다. 자식만은 번듯하게 잘 키워보겠다고 평생 시장바닥에서 청과물 노점상을 하셨던 어머니는 매사에 우유부단한 아버지를 대신해서 네 자녀를 단호하고 엄격하게 교육시켰다.   
 

그렇게 자라난 아들은 이제 한 아이의 아빠가 되었다. 벌써 12년을 아버지로서 가정을 이끌고 있다. 내 아버지와의 화해는 내가 아버지가 되고도 10여 년이 더 걸렸다. 내 자신이 아버지가 되고서야 난 차츰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하고 받아들였다. 아버지도 나처럼 자식이 잘 되기를 무척 바라고 계셨다는 것을 난 내가 아버지가 되고서야 알았다. 이 세상 아버지는 누구나 자기 자식이 잘되기를 바라면서 그렇게 노력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다만 나의 아버지는 그 방법을 제대로 알지 못했고 자식 교육을 위해 자신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제대로 알지 못했기 때문에 그냥 방치했던 것뿐이었다.  

그럼 지금의 나는 어떤가? 아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아빠인가? 난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내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잘 수행하고 있고 아들에게도 아버지로서의 책무를 잘 수행하고 있는가? 그저 아버지이기 때문에 아들에게 가부장적인 권위를 휘두르고 있지는 않는가? 늘 자문해보고 먼 훗날 아들이 멋있는 아빠로 떠올리긴 기대하며 부단히 노력한다. 하지만 그 옛날 내가 아버지에게 가졌던 감정을 아들 또한 갖게 될는지 어찌 알겠는가? 내 스스로는 열심히 노력한다고 하지만 받아들이는 아들은 또 다른 의미로 수용할는지 어찌 알겠는가?  

사람은 자신이 겪어온 경험의 울타리를 크게 벗어나진 못한다. 그것이 순방향이든 역방향이든 마찬가지다. 꼭 폭력적인 아버지 밑에서 자랐다고 해서 자식 또한 그런 아버지가 되는 것만은 아니다. 오히려 현재 아버지의 모습에서 훗날 내가 절대 그리 되어서는 안 되는 아버지의 형상을 가슴에 새기기도 한다는 말이다. 혹은 지나치게 어렵고 힘들게 살아온 아버지의 인생이 자식에게 감당하기 힘든 부담을 지워주는 경우도 종종 있다. 가난을 이겨내고 오로지 성공만을 추구하며 살아온 아버지의 인생은 자신의 뇌리에 뿌리 깊게 박혀있는 성공도식에 도취되어 아들에게도 아버지의 성공도식을 지나치게 강요하는 경우가 있다. 주인공 제이미와 데니의 아버지처럼.

이 책은 이 두 주인공의 아버지를 따지기 이전에 나를 되돌아보게 한다. 내 아버지와 나, 그리고 또 나와 내 아들의 관계. 상황이 다르고 추구하는 바도 다르지만 결국 부자(父子) 사이에 이루어지는 인간관계의 도식은 별반 다르지 않다. 나와 내 아버지의 관계는 두 주인공 아버지와 그 아버지의 관계와 비슷하리란 연상을 해보게 되며, 또한 두 주인공과 그들의 아버지와의 관계는 나와 내 아들의 관계 도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제이미와 데니는 스쿼시 선수의 꿈을 키우고 있는 어린 학생이다. 라이벌 관계인 동갑내기 두 친구는 자신의 의지로 스쿼시를 하기보다는 아버지의 강요와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노력한다. 결국 아버지의 목표가 아들의 목표가 되어야 하는 타율적 의지의 삶이 지속되는 것이다. 물론 어린 나이엔 대체로 부모의 의지가 아이에게 굳건한 삶의 의지를 심어주는 역할을 하는 측면이 있기도 하다. 하지만 열여섯 살이 되어 이젠 자신의 의지를 표출할 수 있는 청소년기에 접어들었는데도 두 부모는 본인의 의사를 무시한 채 아버지의 의지만을 강요하고 있는 것이 문제이다.  
 

부모의 입장에서 그것은 나름 사랑의 표현이었을 것이다. 내 부모가 내게 베푼 사랑이 내가 보기엔 일종의 자식에 대한 교육의 방기나 포기로 비춰진 것과 반대로 두 아이에겐 그들 부모의 지나친 관심과 강요가 단지 부모 세대의 못다 이룬 자신들의 욕심을 채우기 위한 과정으로 비춰질 것이다. 그 결과는 어찌될 것인가? 두 주인공의 대처방법은 극명하게 엇갈린다. 데니는 자신의 삶을 스스로 포기한 채 아버지의 꿈을 실현시켜주기 위해 아버지의 울타리 속에 머무른다. 하지만 제이미는 반항한다. 그는 아버지의 울타리를 벗어나 자신의 울타리를 새로 치고자 한다. 그것이 설령 스쿼시가 되더라도 자신의 의지로 선택된 길이 되어야함을 그는 자각한 것이다.  

아버지가 튼튼하게 구축한 울타리 안에선 자신의 의지가 조금이라도 끼어들 틈이 보이지 않자 결국 제이미는 울타리를 넘어 다른 세계로 길을 떠난다. 그 영역에서 그는 자신과 비슷한 처지에 있던 데니의 쌍둥이 여동생 애비를 만난다. 그녀 또한 제이미처럼 아버지의 울타리에서 벗어나 있는 존재이다. 오로지 스쿼시를 통한 아들의 성공만을 바라는 아버지에게 딸은 안중에도 없었다. 그녀는 가정 내에서 자신의 존재 가치를 상실해버린 것이다. 따라서 그녀는 타인의 울타리에서 벗어나 자신의 울타리를 스스로 찾아 나섰던 것이다. 동병상련의 처지에 있던 둘은 새로운 보금자리를 향해 길을 떠난다. 둘에게 그 여행은 자신만의 빛을 찾아 떠나는 험난한 여정이다. 그것은 자신들의 빛을 앗아간 아버지의 그늘을 벗어나 꿈과 희망을 찾아 떠나는 새 인생의 출발점일 수도 있다.  
 

난 다시 나와 내 아들의 관계를 생각해본다. 내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유산이 또 내 아들에게 강요되고 있진 않는지 되돌아본다. 나 또한 내가 못다 이룬 꿈을 내 자식에게 지나치게 강요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곰곰이 새겨본다. 그래서 내 아들 또한 데니처럼 자신의 꿈이 아닌 아버지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공부하고 있는 건 아닌지 따져본다. 현재 우리 사회는 부모의 지나친 관심과 기대가 아이를 주눅 들게 하고 힘들게 한다. 그것만이 오직 부모가 자식에게 베풀 수 있는 사랑인 것처럼 과대 포장되고 있는 시대이다. 먼 미래에 아들이 살아야 할 모습을 부모가 재단하고 그 미래를 위해서 현재의 희생을 강요하고 있는 삶을 살고 있다.  

아들의 생각이 너무 궁금한 나머지 난 단도직입적으로 아들에게 묻고 싶은 충동을 자주 느낀다. '아들! 영어 학원, 수학 학원 다니는 거 힘들지 않아? 힘들면 말해.' 라고. 하지만 다음 순간 아들에게서 나올 대답이 두려운 나머지 슬그머니 거둬들인다. 이미 내 자신의 뇌리엔 그런 경쟁에서 이겨야만 내 미래가 보장된다는 사회적 암시가 뿌리 깊게 박혀 있기 때문이다. 혹여 '아빠! 나 너무 힘들어 학원 그만 다닐래!' 라는 대답이 나올까봐 두려운 마음이 앞선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기특한 나의 아들은 벌써 아버지의 마음을 읽었음인지 힘들다는 내색을 전혀 하지 않는다.  

그러나 내겐 겉으로 표현되지 않은 아들의 내면이 더 두렵다. 혹여 어렸을 적부터 내면화된 사회적 강요와 암시가 자신의 진정한 의지와 상관없는 삶을 살면서도 아무런 비판 없이 그냥 수용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두렵다. 그건 오히려 제이미의 가정 탈출보다 더 큰 독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데니처럼 실은 그렇지 않으면서도 아버지의 권위가 두려워 아버지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살아가는 삶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들의 책상위에 이 책을 슬며시 올려놓는다. 내가 직접적으로 묻는 것보다 스스로 읽고 느껴볼 수 있는 기회를 갖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는 나 나름의 의도에 따라 아들의 책상에 올려놓는다. 이것은 독서의 강요가 아니라 아들이 아버지의 그늘을 벗어나 스스로 자신의 인생을 설계하고 자신만의 삶의 목표를 설정해서 나아가길 바라는 아버지의 조그만 배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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