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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해, 스이카
하야시 미키 지음, 김은희 옮김 / 다산책방 / 2008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나는 오늘 교사로서 내 스스로에게 묻는다. 나를 거쳐 간 지금까지의 학생 중에 스이카처럼 고통스러워한 학생은 없었는가? 말 못할 고민을 가슴에 품은 채 아무에게도 털어놓지 못하고 소중한 학창시절을 고통 속에 보냈던 학생은 없었는가? 꼭 스이카처럼 죽음에 이르는 큰일을 당하진 않았더라도 급우의 사소한 괴롭힘에 나름대로 힘들어하는 학생을 외면한 채 그냥 넘겨버린 적은 없었는가? 혹 성격상 스스로 남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 아이를 성격 탓으로 여기고 무심히 넘겨버린 경우는 없었는가? 뭔가 절실히 도움을 요청하는 학생이 있었는데 그 눈빛을 발견하지 못하고 그냥 지나치지는 않았을까?
이런 계속적인 자문은 주인공 스이카의 고통스런 학교생활이 내 심금을 뒤흔들어 놓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집단 따돌림을 혼자서 감당하며 그에 맞서 싸우다 결국 삶을 포기하기에 이른다. 그녀의 죽음이 나를 자책하게 한 것은 그녀를 둘러싼 주변의 어른들이 조금만 관심을 기울였더라면, 혹은 그녀가 겪고 있는 힘든 상황을 외면하지만 않았더라면 결코 그녀가 죽음이라는 극단적 선택을 하진 않았을 것이란 예상 때문이다. 무엇보다 그녀를 가장 가까이서 지켜봤고 어느 정도 집단 괴롭힘을 목격했던 교사가 그녀를 외면했고, 또한 자녀의 심리적 변화를 가장 빨리 감지할 수 있는 부모가 그녀에게 너무 무관심했다는 사실이 나를 분노케 한다. 그것은 비단 내가 교사나 학부모여서가 아니다. 어리고 여린 여학생이 자신이 감당하기 힘든 고통을 당하고 있고, 자신을 도울 수 있는 가장 가까이 있는 보조자에게 간절한 눈빛으로 도움을 요청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외면한다면 그건 부모나 교사 차원을 떠나 누구라도 관심을 기울여야할 인간관계의 기본적 윤리를 저버린 일이다.
주인공 스이카에 대한 요우코 그룹의 집단 따돌림은 아주 노골적이다. 이는 조금만 주의를 기울였으면 곧바로 드러날 일이다. 아니 주의를 기울일 필요조차 없다. 매일 일상처럼 반복되는 일이 교사에게 발각되지 않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스이카는 학교건물 뒤편이나 화장실 같은 어두운 곳에 끌려 나가 폭력을 당했던 것이 아니다. 학교생활의 기본적 공간인 교실 내에서 집단 따돌림을 당하고 있고, 그 빈도 또한 한두 차례가 아니었다. 그 수법도 그다지 교묘하지 않아서 거의 공개적으로 드러내놓고 이루어졌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따라서 조금만 관심을 기울였다면 반드시 발각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이 글 속에서의 교사들도 이미 그녀가 당하고 있는 상황을 몇 차례 직접 목격하기도 한다. 하지만 교사들은 그녀의 간절한 눈빛을 외면한 채 무심히 지나쳐 버린다. 학생이 존재 이유인 교사가 어찌 이럴 수 있단 말인가?
부모 또한 마찬가지이다. 거의 매일 반복적으로 지속되는 폭력은 어린 스이카를 점점 지치게 한다. 처음엔 자신의 힘으로 저항해 보지만 결국 견딜 수 없는 한계에 직면한다. 그런 상황이 그녀를 어떤 심적 상황으로 몰아넣었을까? 점점 평소와 다른 행동 양식과 불안 심리를 분명히 드러내게 될 것이다. 스이카도 분명 평소와 다른 행동의 변화가 있었다. 아무리 그녀가 부모 앞에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연극을 해도 어린 그녀가 완벽하게 감출 수는 없는 일이다. 결국 스이카는 학교에 가기 싫다는 의사를 명백히 표출하기까지 한다. 하지만 부모는 그녀의 등교 거부를 바보 같은 소리로 취급하고 그 이유를 밝히라고 닦달하기까지 한다. 그 상황에서 ‘내가 말하지 않아도 알아줄 수 있잖아.’라고 말하는 스이카의 절규는 자식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엄마에 대한 극단적 절망감의 표현일 것이다.
그래도 절망의 끝에는 희망의 빛줄기가 한 가닥쯤 존재하는 법이다. 학교에서도 집에서도 제자리를 잃고 헤매는 스이카가 몽유병 환자처럼 새벽에 집을 나와 죽을 결심으로 길거리를 방황하다 만나게 된 유리에가 바로 스이카에겐 희망의 빛이었다. 그녀 또한 교통사고로 부모를 잃고 눈까지 실명되어 그런 삶의 무게를 견디다 못해 자살을 결심한 어린 영혼이다. 동병상련이라고 극한 상황에서 조우한 두 영혼은 서로에게 삶의 의지가 되어준다. 자신보다 더 곤란한 처지에서도 교사의 꿈을 키워가는 유리에는 스이카의 마음에 긍정적으로 사는 법을 심어준다. 스이카에게 던지는 그녀의 한 마디 “ 스이카, 그냥 힘내는 거야.”라는 말은 그 누구도 주지 못한 힘과 용기를 북돋는다. 하지만 그마저도 집요한 요우꼬 그룹의 감시망에 발각되고 스이카는 점점 깊은 나락으로 추락하고 말았던 것이다.
결국 죽음이라는 비극적 결말에 이르렀지만 죽음의 순간 우리는 꺼져버린 한 가닥 희망의 불씨를 다시 당긴다. 스이카에게 삶의 용기를 심어주었던 유리에와 , 따돌림을 당하던 그녀를 외면했던 급우 치카의 마지막 용기 있는 행동, 아무런 인간관계도 없는 자신을 살리려 온 힘을 쏟는 의사, 딸의 죽음 앞에서 흐느껴 우는 부모에게서 독자와 스이카는 모두 희망의 불씨를 발견한다. 죽음의 목전에 이른 스이카는 이들의 사랑의 손길로 인해 한 순간 해방감을 느낀다. 그녀는 그 순간 자살을 결심한 이후 처음으로 강렬한 삶의 의욕을 느낀다.
스이카에게 필요한 것은 딱 한 마디 따뜻한 말이었던 것이다. 그것은 유리에의 말 “ 네 덕분에 지금 난 여기 있는 거야! 스이카, 빨리 눈을 떠야지, 아직 네게 중요한 말을 하지 못했어. 아직 고맙다는 말도 하지 못했단 말이야.”라든가, 치카의 말 ‘나, 스이카 덕분에 지금까지 견딜 수 있었어. 난 네가 필요해.’ 라는 짧은 말 속에 잘 표현되어 있다. 스이카는 죽음의 직전에서야 자신이 그토록 듣고 싶어 했던 말을 들은 것이다.
이처럼 이 책은 주인공의 비극적 결말이 독자의 심중을 후비는 아픔이 있다. 하지만 그것이 결코 비극적이지만은 않다. 그것은 그녀의 죽음이 헛되이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리라. 자신을 외면했던 모든 친구들의 마음에 진정한 용기를 심어주고, 부모와 사회엔 따뜻한 관심과 사랑이 얼마나 중요한 지 일깨워주었기 때문이리라. 그녀 또한 이들의 따뜻한 마음을 소중히 간직한 채 다른 세상으로 갈 수 있었기 때문이리라.
이 책이 네게 큰 여운으로 남는 것은 단지 주인공의 비극적 결말 때문만은 아니다. 우리 사회의 학교 현장에서 아직도 집단 괴롭힘은 현재 진행형이고, 우리 사회가 아직도 피해자와 소통의 부재를 안고 있기 때문이다. 입시라는 경쟁 체제에서 명문대 진학에만 관심을 보이는 우리의 학교 현장은 소통의 부재라는 치명적 결함을 안고 있다. 학교의 유일한 관심사는 성적이 뛰어난 학생을 모집하고 그들을 중심으로 학업을 증진시켜 소위 명문대학에 많이 진학시키는 것이다. 그 안에서 교사는 학생들의 생활지도보다는 학습지도에만 관심을 기울이며 자신의 담당 교과목만 잘 가르치면 된다는 안이함에 빠져있다. 이런 학교 현장에서 교사와 학생 간의 진정한 인간적 만남이란 기대하기 힘들다.
그렇다면 우리의 가정은 어떤가? 아이의 적성과는 무관하게 부모의 못다 이룬 꿈을 강요하는 상황이 아닌가? 진정 아이가 이루고자 하는 꿈은 도외시한 채 의사, 한의사, 판사, 변호사 등 일명 잘 나가는 직종에만 얽매여 아이들을 다그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아이들은 암묵적으로 자신의 의지보다는 부모의 의지에 따라 삶의 목표를 정하고, 그것이 자신의 진정한 삶의 목표인양 타인과 동일시된 삶을 지향하게 된다. 이런 상황 속에서 부모와 자식간의 소통은 불가능하다. 그리고 그 소통의 부재는 향후 필연적으로 비극적 결말을 예고한다.
그러므로 이 책은 집단 괴롭힘의 피해자가 읽어야할 책이라기보다 그 주변 인물들이 읽어야할 책이다. 우리의 어린 영혼들이 밝고 건강하게 자랄 수 있도록 그들의 슬픔과 괴로움을 보듬어야할 어른들이 읽어야할 책이다. 부디 이 책을 통해 우리 어린 자녀들에게 사랑과 관심을 쏟는 어른들이 늘어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