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쿼시 - 그림자 소년, 소녀를 만나다
팀 보울러 지음, 유영 옮김 / 놀(다산북스) / 2008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한 때 아버지를 원망한 적이 있었다. 자식 교육에 무관심하고 스스로에게도 뚜렷한 목표의식이 없이 그냥 그렇게 세월을 죽이며 살아오신 아버지의 인생에 대해서 한심하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있었다. 그래서 난 그런 인생을 살지 않겠다고 이를 악물고 공부한 적이 있었다. 어쩌면 그것은 무능한 아버지 때문에 평생 고생하며 살아야 했던 어머니의 힘들고 고통스런 삶에 대한 내 방식의 반발이었는지 모른다. 자식만은 번듯하게 잘 키워보겠다고 평생 시장바닥에서 청과물 노점상을 하셨던 어머니는 매사에 우유부단한 아버지를 대신해서 네 자녀를 단호하고 엄격하게 교육시켰다.   
 

그렇게 자라난 아들은 이제 한 아이의 아빠가 되었다. 벌써 12년을 아버지로서 가정을 이끌고 있다. 내 아버지와의 화해는 내가 아버지가 되고도 10여 년이 더 걸렸다. 내 자신이 아버지가 되고서야 난 차츰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하고 받아들였다. 아버지도 나처럼 자식이 잘 되기를 무척 바라고 계셨다는 것을 난 내가 아버지가 되고서야 알았다. 이 세상 아버지는 누구나 자기 자식이 잘되기를 바라면서 그렇게 노력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다만 나의 아버지는 그 방법을 제대로 알지 못했고 자식 교육을 위해 자신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제대로 알지 못했기 때문에 그냥 방치했던 것뿐이었다.  

그럼 지금의 나는 어떤가? 아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아빠인가? 난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내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잘 수행하고 있고 아들에게도 아버지로서의 책무를 잘 수행하고 있는가? 그저 아버지이기 때문에 아들에게 가부장적인 권위를 휘두르고 있지는 않는가? 늘 자문해보고 먼 훗날 아들이 멋있는 아빠로 떠올리긴 기대하며 부단히 노력한다. 하지만 그 옛날 내가 아버지에게 가졌던 감정을 아들 또한 갖게 될는지 어찌 알겠는가? 내 스스로는 열심히 노력한다고 하지만 받아들이는 아들은 또 다른 의미로 수용할는지 어찌 알겠는가?  

사람은 자신이 겪어온 경험의 울타리를 크게 벗어나진 못한다. 그것이 순방향이든 역방향이든 마찬가지다. 꼭 폭력적인 아버지 밑에서 자랐다고 해서 자식 또한 그런 아버지가 되는 것만은 아니다. 오히려 현재 아버지의 모습에서 훗날 내가 절대 그리 되어서는 안 되는 아버지의 형상을 가슴에 새기기도 한다는 말이다. 혹은 지나치게 어렵고 힘들게 살아온 아버지의 인생이 자식에게 감당하기 힘든 부담을 지워주는 경우도 종종 있다. 가난을 이겨내고 오로지 성공만을 추구하며 살아온 아버지의 인생은 자신의 뇌리에 뿌리 깊게 박혀있는 성공도식에 도취되어 아들에게도 아버지의 성공도식을 지나치게 강요하는 경우가 있다. 주인공 제이미와 데니의 아버지처럼.

이 책은 이 두 주인공의 아버지를 따지기 이전에 나를 되돌아보게 한다. 내 아버지와 나, 그리고 또 나와 내 아들의 관계. 상황이 다르고 추구하는 바도 다르지만 결국 부자(父子) 사이에 이루어지는 인간관계의 도식은 별반 다르지 않다. 나와 내 아버지의 관계는 두 주인공 아버지와 그 아버지의 관계와 비슷하리란 연상을 해보게 되며, 또한 두 주인공과 그들의 아버지와의 관계는 나와 내 아들의 관계 도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제이미와 데니는 스쿼시 선수의 꿈을 키우고 있는 어린 학생이다. 라이벌 관계인 동갑내기 두 친구는 자신의 의지로 스쿼시를 하기보다는 아버지의 강요와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노력한다. 결국 아버지의 목표가 아들의 목표가 되어야 하는 타율적 의지의 삶이 지속되는 것이다. 물론 어린 나이엔 대체로 부모의 의지가 아이에게 굳건한 삶의 의지를 심어주는 역할을 하는 측면이 있기도 하다. 하지만 열여섯 살이 되어 이젠 자신의 의지를 표출할 수 있는 청소년기에 접어들었는데도 두 부모는 본인의 의사를 무시한 채 아버지의 의지만을 강요하고 있는 것이 문제이다.  
 

부모의 입장에서 그것은 나름 사랑의 표현이었을 것이다. 내 부모가 내게 베푼 사랑이 내가 보기엔 일종의 자식에 대한 교육의 방기나 포기로 비춰진 것과 반대로 두 아이에겐 그들 부모의 지나친 관심과 강요가 단지 부모 세대의 못다 이룬 자신들의 욕심을 채우기 위한 과정으로 비춰질 것이다. 그 결과는 어찌될 것인가? 두 주인공의 대처방법은 극명하게 엇갈린다. 데니는 자신의 삶을 스스로 포기한 채 아버지의 꿈을 실현시켜주기 위해 아버지의 울타리 속에 머무른다. 하지만 제이미는 반항한다. 그는 아버지의 울타리를 벗어나 자신의 울타리를 새로 치고자 한다. 그것이 설령 스쿼시가 되더라도 자신의 의지로 선택된 길이 되어야함을 그는 자각한 것이다.  

아버지가 튼튼하게 구축한 울타리 안에선 자신의 의지가 조금이라도 끼어들 틈이 보이지 않자 결국 제이미는 울타리를 넘어 다른 세계로 길을 떠난다. 그 영역에서 그는 자신과 비슷한 처지에 있던 데니의 쌍둥이 여동생 애비를 만난다. 그녀 또한 제이미처럼 아버지의 울타리에서 벗어나 있는 존재이다. 오로지 스쿼시를 통한 아들의 성공만을 바라는 아버지에게 딸은 안중에도 없었다. 그녀는 가정 내에서 자신의 존재 가치를 상실해버린 것이다. 따라서 그녀는 타인의 울타리에서 벗어나 자신의 울타리를 스스로 찾아 나섰던 것이다. 동병상련의 처지에 있던 둘은 새로운 보금자리를 향해 길을 떠난다. 둘에게 그 여행은 자신만의 빛을 찾아 떠나는 험난한 여정이다. 그것은 자신들의 빛을 앗아간 아버지의 그늘을 벗어나 꿈과 희망을 찾아 떠나는 새 인생의 출발점일 수도 있다.  
 

난 다시 나와 내 아들의 관계를 생각해본다. 내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유산이 또 내 아들에게 강요되고 있진 않는지 되돌아본다. 나 또한 내가 못다 이룬 꿈을 내 자식에게 지나치게 강요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곰곰이 새겨본다. 그래서 내 아들 또한 데니처럼 자신의 꿈이 아닌 아버지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공부하고 있는 건 아닌지 따져본다. 현재 우리 사회는 부모의 지나친 관심과 기대가 아이를 주눅 들게 하고 힘들게 한다. 그것만이 오직 부모가 자식에게 베풀 수 있는 사랑인 것처럼 과대 포장되고 있는 시대이다. 먼 미래에 아들이 살아야 할 모습을 부모가 재단하고 그 미래를 위해서 현재의 희생을 강요하고 있는 삶을 살고 있다.  

아들의 생각이 너무 궁금한 나머지 난 단도직입적으로 아들에게 묻고 싶은 충동을 자주 느낀다. '아들! 영어 학원, 수학 학원 다니는 거 힘들지 않아? 힘들면 말해.' 라고. 하지만 다음 순간 아들에게서 나올 대답이 두려운 나머지 슬그머니 거둬들인다. 이미 내 자신의 뇌리엔 그런 경쟁에서 이겨야만 내 미래가 보장된다는 사회적 암시가 뿌리 깊게 박혀 있기 때문이다. 혹여 '아빠! 나 너무 힘들어 학원 그만 다닐래!' 라는 대답이 나올까봐 두려운 마음이 앞선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기특한 나의 아들은 벌써 아버지의 마음을 읽었음인지 힘들다는 내색을 전혀 하지 않는다.  

그러나 내겐 겉으로 표현되지 않은 아들의 내면이 더 두렵다. 혹여 어렸을 적부터 내면화된 사회적 강요와 암시가 자신의 진정한 의지와 상관없는 삶을 살면서도 아무런 비판 없이 그냥 수용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두렵다. 그건 오히려 제이미의 가정 탈출보다 더 큰 독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데니처럼 실은 그렇지 않으면서도 아버지의 권위가 두려워 아버지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살아가는 삶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들의 책상위에 이 책을 슬며시 올려놓는다. 내가 직접적으로 묻는 것보다 스스로 읽고 느껴볼 수 있는 기회를 갖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는 나 나름의 의도에 따라 아들의 책상에 올려놓는다. 이것은 독서의 강요가 아니라 아들이 아버지의 그늘을 벗어나 스스로 자신의 인생을 설계하고 자신만의 삶의 목표를 설정해서 나아가길 바라는 아버지의 조그만 배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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