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자는 없어 꿈꾸는돌 45
김지현 지음 / 돌베개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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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자는 없어

김지현. 돌베개 청소년 문학 꿈꾸는 돌

 

지방 소도시 청소년의 일상을 잔잔한 바다처럼 담아내고 있지만 유자처럼 도드라진 맛과 향기를 전해주는 책. 저 샛노란 유자가 저절로 향기로워질 리 없다. 저 안에 매서운 바닷 바람, 뜨거운 태양빛이 들어있을 터, 주인공 유자(유지안) 또한 끝없는 망망대해가 주는 무력감, 앞으로 무엇이 될지 모르는 불안함을 견디며 묵묵히 제 길을 걷는다. 유자청이 될지, 유자 빵이 될지 모르지만 일단 바닷바람을 견디며 맛과 향을 농축하고 있다.

거제에 살고 있는 고등학교 1학년 유지안과 수영이, 지안이네 고등학교로 전학 온 해민이가 주인공이다. 지안이네 동네로 잠깐 한달 살기하러 온 작가 혜현 언니는 조연쯤 된다고 할까. 서로 다른 시각을 지닌 소소한 일상을 통해 주인공 지안이와 수영이의 내면이 하루 하루 성장하는 이야기다.

지방 소도시 학생이 느끼는 씁쓸함과 자각

여기서 영화 좋아하면 좀 힘들지 않나전학생 해민이가 영화를 좋아한다고 하자 지안이가 제일 먼저 든 생각이다. 그렇다. 지방 소도시에는 영화관이 있으면 다행이니까.

수영이 서울에서 열리는 어떤 미술 전시회에 보내달라고 한 달을 부모님께 졸랐으나 결국 가지 못한 일이 있었다. 서울은 왜 이렇게까지 멀고, 좋아하는 것들은 왜 대부분 멀리 있을까. 나도 서울에서 많은 것들을 누리고 경험하면서 자랐다면 취향이 뚜렷한 인간이 되지 않았을까?’라고 지안이가 생각한다. 서울, 수도권에 거주하는 사람들이 이 부분은 적어도 두 번 정도 천천히 읽어봐 주길 바라는 마음이다. 지방에 살고 있는 청소년들이 느끼는 서울의 물리적 거리, 상대적 박탈감은 그 어떤 금전적 보상으로는 채워지지 않는 씁쓸한 공허감이다.

지안이와 수영은 대도시 서울(부산)에 대한 동경과 약간의 두려움이 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서울로 떠난다는 것은 거의 기승전 결론이다. 하지만 지안이가 부산의 친척집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는 것을 주저하는 모습에서는 나고 자란 고향을 떠나 낯선 곳으로 가는 데 대한 불안함이 엿보인다. 대도시를 동경하면서도 막상 떠나려니 주저되는 마음.

지금 생각해보니 그날 내가 느낀 감정은 부러움이었다. 특별할 것도 없는 바다를 보며 저렇게 감상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이. 나에게는 더 이상의 궁금증이나 기대가 일어나지 않는 이 도시에서 의미 있고 반짝이는 것들을 찾아내는 그 눈이 부러웠다.”

전학생 해민이 바다를 신기한 듯 바라보는 장면에서 지안이가 떠올린 생각이다. 전학생은 지안이가 늘 보면서 자란 바다를 보는 눈빛이 사뭇 다르다. 지안에게는 특별할 것 없는 바다를 해민이는 날이 좋으면 좋은 대로, 흐리면 흐린 대로 날마다 새롭게 바라본다. 해민이는 단체로 해변 쓰레기를 치우는 봉사활동을 가서도 휴식 시간에 저만치 혼자 바다를 보고 있다. 이곳 학생들은 봉사활동으로 해변 정화 활동을 하는 장면도 흥미롭다. 바다만큼 상대적인 풍경이 또 있을까? 매일 보는 바다가 지겹고, 감옥처럼 느껴질수도 있는 반면 끝없이 펼쳐진 수평선을 보며 무한한 가능성과 희망을 보는 이도 있을 터. 매일 봐서 지겨운 사람과 처음으로 보고 감격에 빠진 사람이 가장 극명하게 갈리는 풍경도 바다아닐까? 바다를 보는 시각을 통해 두 인물이 처한 상황이 모두 좋거나 나쁘기만 한 것은 아니라고 알려주는 듯 하다.

 

고등학교 1학년 학생의 진로 고민 혹은 방황, 그리고 일상

중학교에서 좋은 성적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그냥 지루한 것을 잘 참고 책상 앞에 오래 앉아 있는 끈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지안이 고등학교 첫 시험을 앞두고 자신이 전교생이 적은 중학교에서 전교 1등을 했던 일을 지극히 객관적인 어조로 말하는 장면이다. 1차 시험에서 지안이는 중학교 때와 달리 전교 19등을 하게 되는데 이후 자신 앞에 있는 18명을 떠올려 보는 장면은 고등학생이 되어 처음 시험을 본 이후 느끼는 감정들을 떠올려 보게 한다.

대학 원서를 넣으려면 2년은 남았는데 왜 벌써 전공을 정해야 하지? 일찍 준비를 시작하는 것도 좋지만, 하나의 방향을 선택한다는 것은 나머지 가능성과는 멀어지는 일 아닌가?’ 지안이가 담임샘과 면담 후에 하는 생각인데 이는 대한민국 모든 고등학생의 고민이다. 이어지는 지안의 생각을 통해 요즘 학생들의 모습을 좀 더 이해할 수 있다.

모두가 비슷한 것을 선망하는 만큼 그걸 성취할 수 있는 사람은 한정되어 있다. 아무리 애써도 누군가는 실망하고 좌절할 수밖에 없다. 이 세상이 애초에 그렇게 만들어져 있으니까. 엄마 아빠가 젊었을 때는 노력, 간절함 같은 단어가 지닌 힘이 있었다면 지금은 아니다. 그렇다면 처음부터 아무것도 갈망하지 않는 게 안전하지 않을까?’ 그래서 시작도 하기 전에 실명할 것을 우려해 아예 욕망하지 않기로 작정한 것 같은 아이들이 많다. 학교 현장에서 자주 보는 모습이다.

이대로 멈추지 않고 영영 한길로 가는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도로가 뚝 끊기고 바다가 나오면 그대로 바다 표면 위를 미끄러지며 나아가는 장면을. 하지만 아무리 상상을 이어 가도 망망대해뿐. 그 끝에 무엇이 있을지 떠오르지 않았다. 난 도대체 어떤 도착지가 보고 싶은 걸까?” 아빠 차를 타고 학원 가면서 지안이가 느끼는 감정은 어른들도 가끔 느끼는 바다. 지금처럼 열심히 달리면 앞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 자신이 원하는 건 무엇인지 지안이를 통해 생각해 보게 한다.

전형적인 모범생 지안이는 터널이나 깜깜한 극장 안에서 공황 증상을 보인다. 지안이처럼 심하지는 않아도 많은 청소년들이 한번씩은 자리를 박차고 소리 지르거나 창문을 열고 심호흡 하고 싶은 때가 있을 것이다. 오늘날 청소년들, 그들이 겪는 내신 상대평가 등급제와 대입의 좁은 문을 통과하기 위한 과정은 숨막힘과 공황 증상을 동반한다.

한편 수영이는 대놓고 방황을 한다. 수영이는 애초에 미술 전공으로 예고에 가고 싶었던 아이였으나 예고 입시에 실패한 전력이 있다. 고등학생이 되어 결석, 조퇴를 일삼더니 첫 시험을 아예 결시하며 학업 숙려제를 하게 된다. 속속들이 캐묻지 않고, 왜 미리 말해주지 않았느냐고 섭섭해하지도 않고, 일부러 알면서도 모른척 해주면서 옆에서 묵묵히 함께 시간을 내주는 지안이. 둘의 우정이 잔잔하게 감동적이다. 나중에 해민이까지 셋이서 각자 다른 곳에서 동시에 온라인 영화를 보며 메신저로 감상을 나누는 장면은 왜이리 아름다운가. 학업에 찌들고 불안한 미래를 안고 있는 일상이지만 이렇게 소소하게 우정을 나눌 수도 있는 시기가 청소년기라는 사실을 다시금 일깨운다. 그리고 힘든 상황에서는 언제나 친구가 필요한 법, 물론 그 친구는 혜현 언니처럼 인생을 좀 더 먼저 경험한 선배 혹은 어른이 될수도 있다.

엄청 큰 위기나 절정은 없지만 잔잔하면서도 파문이 이는 소설이다. 소설 속 유지안의 별명은 유자. 유자는 병아리 같은 노란색이지만 강렬한 맛과 향기를 지녔다. 소리 없이 조용하게 발산하는 향기, 지안이는 학교에서나 친구 관계에서나 조용히 향기를 뿜고 있다. 그러면서 자신의 주변에 들어온 전학생, 방황하는 친구 수영, 한달살이 온 작가 혜현 언니에게도 묵묵히 옆자리를 내주면서 오늘도 익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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