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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는 인간에 대하여 - 라틴어 수업, 두 번째 시간
한동일 지음 / 흐름출판 / 2021년 9월
평점 :
절판
저자의 전작인 <라틴어 수업>을 읽었다. 이렇게 라틴어에 대해 정통하고 있고 또 그 어원과 파생어들로 인생의 지혜까지 논하는 책이라니, 저자에 대해 궁금한 것이 많았다. 나는 저자가 가톨릭 신부인 것을 이번 책의 서문을 보고야 알게 되었다. 라틴어를 전공한, 외국 변호사 자격증을 가진, 로마법 공부를 한 학자라고 생각했다. 물론 지금은 사제직을 벗고 강연과 책으로 좀더 지식과 지혜를 알리는 길을 선택하신 것 같다. 여튼, 저자의 이름만 보고도 이 책이 반가웠다. 부제인 [라틴어 수업, 두 번째 시간], 그리고 믿는 인간에 대하여 저자는 무엇을 말하고 싶은 건지 궁금했다.
믿는 인간, 말 그대로 종교에 대한 이야기다. 나는 어렸을 때 친구따라 몇 년간 교회를 다닌 적이 있지만 신앙심이라는 것이 생기지 않아 자발적 무교를 택한 철저한 무교인이다. 종교로 얻을 수 있는 지식과 지혜는 고전을 비롯한 책으로도 충분히 얻을 수 있으며, 신이나 부처 혹은 성인이라 칭하는 인간에 대한 믿음은 나 자신을 굳건히 믿고 행하는 것이 부족해서 기대는 심리에서 비롯되므로 결국 모든 것은 나의 의지로부터 비롯된다고 생각한다. 종교의 교리는 훌륭하지만 그 교리대로 살아가는 종교인은 없다고 생각하며 내가 만난 많은 '믿는 인간'들은 사실 그랬다. 모든 종교는 자기 종교를 지키거나 확장시키기 바쁘고 다른 종교를 인정하는 척하면서 사실은 배척한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즉, 나는 종교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큰 사람이다.
그래서 더 궁금해졌다. 학자인줄 알았던, <라틴어 수업>의 저자가 사실은 신부였고 그가 논하는 종교란 무엇인지, 결국 이 책도 믿어야만 영생하고 천국간다는 결론에 이르는 건 아닌지 매의 눈으로 살피고 싶었던 것이 사실이다.
결론적으로, 나는 종교에 대한 편견을 이 책을 통해 조금이나마 지울 수 있었으며, 종교인으로 종교를 최대한 객관적인 시선에서 바라보고 성찰하는 것에서 선입견을 거둘 수 있었다. 특히, 세계사를 공부하는 과정에서 종교가 떼려야 뗄 수 없는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며 불안한 존재인 인간이 왜 그토록 오래전부터 오랜 시간동안 신에 믿어왔는지 설명하는 부분이 내 마음을 움직였다.
부조리해 보이는 신, 그보다 훨씬 더 부조리한 인간! 신의 부조리함보다 인간의 부조리함이 더 크기에 인간은 신앙을 갖는 걸까요? (...) 인간은 나약함과 사악함 그 사이 어디쯤에서 각자가 믿는 신을 향해 그 뜻을 물으며 종교 생활을 해나가고 있는 듯합니다. 그 부조리함 사이에서 그것을 '신앙의 신비'로 믿고 살아가는 인간인 저는, 질문하는 인간에게는 분명히 언젠가 어떤 형태로든 답이 온다는 것을 믿으며, '나는 어떠한가'라는 질문을 해봅니다.
"부조리(불합리)하기 때문에 나는 믿는다."
p.54
종교인이 아니라 아직도 정확히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 있고 그 부분이 윗 구절이다. 부조리하기 때문에 조금 덜 부조리해보이는 신을 믿으며 부조리를 줄여나간다는 의미일까. 그렇다면 신에 의지하지 말고 인간만이 가진 생각의 힘으로, 스스로 부조리하지 않게, 합리적으로 이성적으로 살아갈 수는 없는걸까.
이제 부모가 자식에게 물려주어야 할 유산은, 한 번에 잃을 수도 있는 많은 돈이 아니라 실패의 시간을 버티고 살아갈 수 있는 건강한 태도와 정서일 것입니다. 실패를 마주할 수 있는 용기와 그것을 바라볼 수 있는 힘도 포함입니다. 그것을 해낸 사람은 자기가 약해졌을 때 오히려 강해질 수 있음을, 멈춰 섰을 때 더 멀리 나아갈 수 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p.65
인간이 기도하지 않는 세상이 될 때, 그때야말로 인간 세상은 평화로워지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했던 저자는 레바논, 예루살렘 등 한때는 성지였지만 지금은 분쟁지역인 곳으로 떠나 지내며 인간에게 종교의 의미, 그리고 종교가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담담하게 서술한다. 레바논이란 나라에 대해서도 많은 걸 배웠다. 이스라엘의 북쪽 국경과 접하고 있는 나라이며 패권 국가에 둘러싸여 쟁탈의 대상이 되고 분쟁도 많은 나라인 레바논은 어쩐지 우리나라의 옛 모습, 그리고 지금의 모습과도 겹쳐지며 묘한 동질감을 느끼게 된다. 대항해시대란 게임을 할 때 자주 들렀던 항구 베이루트가 레바논의 수도라고 한다. 이스라엘은 레바논을 2006년에도 습격했고 재건에 많은 시간이 소요됐지만, 영어 알파벳을 만든 페니키아인의 후손이 레바논 사람이다. 페니키아인을 라틴어로 '포에니쿠스'라고 부르고 그 유명한 로마-카르타고 전쟁인 '포에니전쟁'이 여기서 유래된거라고 하는데 저자의 라틴어 이야기는 정말 재미있고 유익하다. 우리가 쓰는 언어의 뿌리를 찾아가다보면 결국 그곳에는 종교가 있다. 우리나라나 중국, 일본 등도 불교를 제외하고 역사를 이야기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 책에서 "모든 옷은 그 옷에 합당한 무게를 요구"하기에 내 삶 가운데에서 내가 입은 옷이 무엇인지, 그 무게를 잘 견디며 살아가고 있는지 돌아봐야 한다고 이야기하는데, 이 책을 읽는 독자들, 특히 종교인들은 더욱 그 무게를 잘 견디며 살아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선교에 목적을 둔 선행이 아니라 선행을 통해 내가 사랑하는 분이 가르친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신을 가장 기쁘게 해드리는 길인 동시에 종교적 신념을 갖지 않은 사람들의 영혼과 발길이 자연스럽게 신을 찾도록 만드는 가장 좋은 길이 아닐까 싶습니다.
p.232
법과 종교가 분리되는 과정, 이 시대의 종교의 역할, 의학의 발달과 종교, 그리고 종교와 세계사를 아우르며 그 안에서 라틴어로부터 파생된 단어에 대한 공부까지 할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이름만 들어봤지 정확하게는 몰랐던 바티칸시국, 레바논이라는 나라,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분쟁 등 이 모든 것 안에는 종교가 자리잡고 있다. 왜 많은 사람들이 비합리적이라 보이는 종교를 무조건적으로 믿는지, 그리스 신화같은 예수의 부활과 절대자 하느님에 대한 믿음의 근원은 무엇인지를 어렴풋하게나마 알 수 있었고 가장 중요한, 이 혼란한 시대에 종교의 역할은 무엇이며 어떠해야 하는지를 매 장마다 저자는 종교인으로서 자성하고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신이든 무엇이든 종교를 '믿지 않는 인간'인 내가 무언가를 '믿는 인간'에 대한 시각이 조금은 달라졌다는 것이다. '믿는 인간'에게는 삶의 이정표가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믿지 않는 인간'인 나는 이 책을 읽음으로써 더욱 단단한 나의 이정표를 세워야겠다고 다짐해본다. 믿는 인간, 믿지 않는 인간 모두가 한번 읽어봄직한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