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앞의 생 (특별판)
에밀 아자르 지음, 용경식 옮김 / 문학동네 / 200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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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때 우리집에 50년대 후반 60년대 초반 태생인 나이많은 언니 오빠들이 읽던 문학사상사 판 <자기 앞의 생>이 있었다. 책을 소중히 여기던 시대라 그랬는지 그 당시 책들은 모두 비닐이 씌어져 있었다. 그 책 역시 비닐이 씌워져 있는 세로쓰기 책이었다. 어찌나 읽기 싫게 만들었던지 그냥 내 책상 한 구석에 처박혀 있었다. 그래도 좋은 책이라는 느낌은 있었나 보다. 언니 오빠들이 읽던 다른 책들은 모두 버렸는데 그 책만은 버리지 않았던 것 보면... 아마 '자기 앞의 생'이라는 제목이 어렴풋이나마 나에게 무언가를 전해주었나 보다.

내 삶의 가장 가까운 사람이 죽었을 때의 감정을 느껴본 나로서는 모모가 로자 아줌마의 죽음을 바라보면서, 느꼈을 생의 배신과 두려움, 벗어나고 싶으면서도 순응하고자 했던 자연의 법칙 등을 다시 떠올리게 된다. 그 혼돈의 시간은 꽤 오래갔었다. 그리고 자주 온다. 책의 끝자락에 모모가 더 두고 봐야 할 것 같다고 말하듯이, 그 모든 것을 잊고 또다시 습관처럼 살아가야 하는 生은 가끔씩 아니 너무도 자주 지겹게만(?) 느껴진다. 반평생 가까이 살아온 지금도 조금 더 지켜봐야 하는 건지... 언제까지 두고봐야 하는 건지...

자신을 에밀 아자르라고 끝내 밝히지 않음으로써 세상을 한껏 비웃고

그것을 통해 자신이 진정 누구였던가를 비로소 표현하고 떠난 작가 로맹 가리.

책이 주는 감동도 크지만 작가의 삶과 죽음(권총 자살)이 보여준 그것 또한

큰 여운으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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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테라
박민규 지음 / 문학동네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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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박민규는 <지구영웅전설>을 읽었을 때부터 개인적으로 무척 기대했던 작가.

<지구영웅전설>을 읽었을 때는 와~ 무슨 이런 작가가 다 있지? 하며 흥미로웠는데,

소설집 <카스테라>는 이 작가와 내가 동시대인이구나, 혹은 다행이다 나만이 아니군 하는 생각으로 나를 안심시킨다.

특히 맘에 드는 작품은 <그렇습니까? 기린입니다>와 <하세요, 펠리컨>. 단편집을 읽을 때

첫 작품을 읽고 맨 뒤부터 읽는 요상한(?) 습관이 있는 나는 이번 책에서도 그 방법을 고수했다. 잘했다는 느낌이 든다. 뒤로 갈수록 더 맘에 든다. 작품마다 등장하는 동물들을 표지 그림으로 그린 작가 박민규의 표지 일러스트도 흥미롭다. 펠리컨, 오징어, 기린, 너구리, 그리고 냉장고...  작가의 풍부한 상상력과 그것을 작품화시키는 능력에 감탄할 뿐이다.


* 세상은 하나의 열차다. 한 량의 정원은 180명, 그러나 실은 400명이 타야만 한다. - <그렇습니까? 기린입니다>


* 어쩌면 피라미드의 건설 비결도 <억울함>이었는지 모른다. 지금 관두면 너무 억울해. 아마도 노예들의 산수란, 보다 그런 것이었겠지. - <그렇습니까? 기린입니다>


* 승객 여러분들은 안전선 밖으로 물러나주셔야겠지만, 그게 될 리가 없는 것이다. 승객들은 모두 전철을 타야 하고, 전철엔 이미 탈 자리가 없다. 타지 않으면, 늦는다. 신체의 안전선은 이곳이지만, 삶의 안전선은 전철 속이다 당신이라면, 어떤 곳을 택하겠는가. - <그렇습니까? 기린입니다>


* 모든 것을 알고 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이 조용한 소년을 우리는 ‘어른’이라고 부른다. - <해설, 뒤죽박죽, 얼렁뚱땅, 장애물 넘어서기>, 문학평론가 신수정


“모든 사람은 별이다” <카스테라> 작가의 말에 나오는 말이다. 슬라이 앤 패밀리 스톤의 노래라 한다. 그런데 정말 모든 사람은 별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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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륜과 남미
요시모토 바나나 지음, 김난주 옮김 / 민음사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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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종일관 죽음과 불륜, 그리고 남미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지만

책을 덮고 난 지금, 가장 가슴에 남는 건 '남미'라는 다른 세상에 대한 환상과

특별한 경험에 대한 동경이다. 작가 바나나가 줄곧 이야기하는

거대한 대자연 이과수 폭포, 핫초콜릿과 같다는 서브마리노,

믿기지 않을 정도의 캄캄한 남미의 밤, 뜨거운 햇살과 소름이 쫙 끼칠 정도로

짙푸른 하늘(사진으로 보니 영화 <십계>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등

모두 독특하고 이국적이고 매력적이다.

 

죽음에 대해, 삶에 대해 저자가 던지는 시선은 혼돈스러웠던 내 생각을 정리해놓은 듯하다.

" 남편의 사랑은 매일 걸려오는 전화에서도 전해진다. 엄마처럼 무턱대고가 아니라 자신감 없게, 그것이 타인이란 것일까. 가족을 만들었다고 생각했는데, 타인이 서로에게 신경을 썼을 뿐이었다. 하지만 나도 마음이 누그러져, 함께 지낸 긴 세월에 떠밀려, 오늘 밤, 남편에게 전화로 얘기하고 싶어질 것 같다." - <하치 하니> 중에서

"슬픔이란 결코 치유되지 않는다. 단지 엷어지는 듯한 인상을 주어 그것으로 위로 삼을 뿐이다. 저들의 슬픔에 비하면 나의 슬픔이란 이 얼마나 치졸한 것인가." - <하치 하니> 중에서

"내게 그것은 무엇일까? 누가 기다리고 있으면 집에 들어가지 못하는 성격도 아니고, 상자도 무섭지 않다. 하지만 언젠가는 내 안에서도 그것이 모습을 드러내겠지. 그러니까 그것도 성장한다는 뜻이다. 나는 그것과 어떤 식으로 마주할까? 어떻게 대처할까? 나는 아직 젊고 두려움을 모른다. 기다려지기까지 했다. 보고 싶었다. 밖에서 보면 태평하고 평화로웠던 우리 가족에게 조그맣고 깊은 어둠이 있었고, 그 어둠은 이 묘지를 감싼 정적만큼이나 역사를 은닉한 풍요로운 것이었다. 그것은 부끄러워할 일이 아니다." - <조그만 어둠> 중에서

"중요한 것은 식욕이 아니라 신경을 써주는 마음이다. 생활에서 그런 것이 사라지면 사람은 점점 탐욕스러워진다." - <플라타너스> 중에서

아르헨티나를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 아르헨티나를 즐길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저자의 말은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둔 것 같다. 그런데... 언젠간 가볼 수 있을까?

한 가지, 사진에 대한 설명이 간략하게나마 있었다면

훨씬 더 그 세상을 마음에 품을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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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랑에서 살다
조은 지음, 김홍희 사진 / 마음산책 / 200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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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에 출간되었던 책을 왜 이제서야 읽게 되었을까. 조은, 정말 대단한 필력이다. 한문장 한문장 가슴으로 커다란 울림이 전해졌다. 독신으로 살아가면서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현실에 대해, 삶에 대한 우리의 고민과 번뇌에 대해 어느 누가 그처럼 완벽하게 묘사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200페이지밖에 안 되는 산문집이지만 마지막 장을 덮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매 행간 읽고 또 읽고 또 읽고.... 이 책을 담당했던 편집자가 신경숙씨에게 했던 말, "요즘도 이렇게 뜨겁게 산문을 쓰는 사람이 있다는 것에 놀라고 있어요". 과연 그랬다. 담담하게 삶과 마주하면서도 결코 멈추지 않는, 삶에 대한 그의 뜨거운 열기! 문장 하나하나에서 그것을 느낄 수 있다.
"벼랑에서 살다"! 우리는 모두 매순간 벼랑에서, 아니 벼랑 끝에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도 나는 이 책을 읽으며 더 이상 혼자 벼랑끝에 매달려 있지 않다는 생각에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이 생에서의 모든 삶이 벼랑에서의 그것일 수밖에 없다면 오히려 혼자만의 그것이 아님에 감사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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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공지영 지음 / 푸른숲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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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몇 장을 남기면서 읽는 속도를 늦추었다. 이 책을 다 읽어버린다는 것이 아쉬웠다. 재미?? 있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이 책을 읽고 있는 이 순간에도 세상 어딘가에서는 똑같은 장면이 연출되고 있을 것을 생각하면서 나 자신에 대한 자책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내가 그들의 모습으로 선택되지 않은 것에 안도의 한숨을 쉬고 있는 나를 발견한 것이다.
언제 '집행'될 지도 모르는 채 하루하루를 보내는 사형수의 삶과 철창 밖에 사는 우리의 그것과는 다를 것이 없다는 저자의 말에 나도 모르게 깊은 한숨이 나온다. 내 삶에 대한 반추와 반성과 더불어, 그렇다면 언제쯤 나는 진심으로 내 주변을 돌아보며 살 수 있을까, 하는 스스로에 대한 질문이 뒤따른다.
이 책을 읽었다고 해서 지금 당장 "나도 불우한 이웃을 도와야지" 하는 등의 순간의 감동에서 비롯된 유치한 결심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내 삶에 대한 좀더 진진한 고민과 성찰을 할 수 있는 계기를 준 것만은 분명하다. 그리고 네 삶이 곧 내 삶이라는 '진실'이 다가왔다.

감히 이 작품은 작가 공지영의 최고의 작품이라고 말하고 싶다. 작가의 진실과 감정이 여실히 묻어나는 작품이다. 이 책을 위해 내가 들인 시간과 감정의 소모가 전혀 아깝지 않았다. 강력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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