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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진 시대의 철학
김정현 지음 / 책세상 / 2018년 1월
평점 :
스프링폭스라는 아프리카 산양이 있다. 그들은 수천 마리 씩 떼를 지어 살면서 풀이 있는 곳을 찾아 다니는데 앞의 무리가 풀을 다 먹으면 뒤에 있는 놈들이 먹을 게 없어서 앞의 놈의 엉덩이를 뿔로 민다. 앞으로 좀 가라는 것이다. 그러다 또 앞의 무리가 풀을 다 먹으면 뒤에 있는 놈들이 다시 민다. 이게 거듭 반복되다 보면 뒤에 놈들은 자꾸 밀고 앞 놈들은 자꾸 밀리다 못해 벼랑 끝까지 다다른다. 위험을 깨닫고 그만 멈추면 좋으련만, 앞이나 뒤나 모두 어리석은 탓에 결국 벼랑 아래로 집단 추락하고 마는, 아주 가련한 동물이다.
그러나 마냥 어리석다 혀를 찰 수 없다. 스프링폭스가 꼭 우리 현대인의 모습 같아 그렇다. 현대인들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 집단을 이룬 것 같아 보여도 공동의 목표나 이해 없이 파편처럼 흩어진 지 오래임을 알 수 있다. 공동의 목표가 없다는 것은 어쩌면 국가나 전체를 위해 소를 희생하지 않는단 전제 하에 오히려 다행일 지 모른다. 이기주의가 아닌, 합리적 개인주의를 나는 환영한다. 허나 스프링폭스처럼 제 눈 앞에 있는 것만 열망하고 다른 사람이야 어떻게 되든 말든 방관하는 것은 옳지 않다. 또 멈춰야 할 때임에도 불구하고 제 욕심 탓에 뒤돌아 보지 않는 것도 그릇되다.
자신만의 삶의 철학 없이 살다 보면 잔잔한 물결에라도 쉽게 휩쓸리고 마는 법이다. 꼭 철학이란 거창한 말이 아니더라도 삶을 어떻게 살아가야겠다는 의식이 없으면 파도 위의 해초처럼 둥둥 떠다닐 수밖에 없다. 현대인들은 철학을 잃은 지 오래다. 이 사회 전체가 철학을 잃은 지 오래 되었다. 저자는 스마트폰과 페이스북, 트위터, 인스타그램 등 다양한 소셜 네트워크에 연결 된 채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지금을 '소진 시대'라고 명명한다. 현실에서 제대로 된 인간관계를 맺지 못하고 살아가는 현대인들은 소셜에 더욱 몰입하게 되고 그럴수록 자신의 에너지와 마음을 '충전이 필요한 배터리'처럼 소진하고 만다는 것이다.
저자는 니체, 프로이트, 제러미 리프킨 등 다양한 학자들의 말을 인용하며 "물질적 부유함에서 행복을 찾으며 불행해 하는 현대인에게 진정한 행복이란 무엇인가, 인간답게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를 근본적으로 성찰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한다. 현대 사회는 물질 만능 사회다. 이렇게 말하는 것조차 식상할 만큼 돈이란 곧 삶의 모든 것을 장악한 지배자가 되어버렸지만 말이다. 어쨌든 내 생각엔 부의 양극화가 극에 다다르고 계층 이동 사다리도 복구가 불가능할 만큼 산산이 부서져 버린 사회가 되어버렸다면, 그래서 가난이 평준화 될 수밖에 없는 사회라면(아, 슬프다.) 돈을 많이 벌지 않아도 '행복'할 수 있는 자신만의 방법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저자는 그러한 '행복'을 찾기 위한 방법으로 '고독'을 제시한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에 있는가?", "나는 어디의 누구에게 속하는가?" 같은 실존적인 물음에 답할 수 있어야 살아가는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철학자 아우구스티누스는 "밖으로 나가지 말라! 그대 자신 속으로 돌아가라! 진리는 인간 내면에 있다!"고 설파 한 적도 있다. 그러나 정작 현대인은 끝없이 뱃속으로 음식을 밀어 넣는 먹방, 타인은 안중에도 없단 듯이 노래에 심취하는 가요 프로그램, 온갖 자극적인 소재와 혐오를 끌어안고 오락으로 소비하는 인터넷 방송 등에 몰입 한다. 혼자의 시간을 갖는 법을, 사색 하는 법을 배워본 적도 권유 받은 적도 없는 탓이다. 물론 개인을 길러내는 사회의 문제가 가장 크다.
그렇다고 해도 언제까지나 철학을 가르치지 않은 사회를 탓할 수 만은 없다. 특히 기초 학문을 무시하기 일쑤인 나라에서 자란 한국인이라면 더더욱 철학을 배우고 공부해야 할 필요가 있다. 김정현의 <<소진 시대의 철학>>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거시적인 시각을 제시해 준단 점에서 의미가 있다. '철학 잃은' 한국 사회의 문제를 분석했으면 읽기가 더 좋았을 것이란 아쉬움이 있지만 세계가 한 마을, 아니 내 손바닥에 있는 지구촌 사회를 살아가는 현대인이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크고 넓은 시야를 갖도록 돕는다는 것으로도 '충실히 제 할 일을 한 책'이란 평가를 내리고 싶다. 근대철학의 아버지 데카르트를 비롯해 수많은 철학자들과 이야기 나누고 싶은 독자들에게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