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따위를 삶의 보람으로 삼지 마라 - 나답게 살기 위해 일과 거리두기
이즈미야 간지 지음, 김윤경 옮김 / 북라이프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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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별: ★★★☆☆

책은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무엇이 되지 않아도 괜찮아'


사람들은 살면서 수많은 다짐을 하고 계획을 세운다. 새해이고 월요일이면서 1일이기까지 했던 그런 계획들을 세우기 더없이 좋은 타이밍이었다. 그것들 중 상당수가 실패하리란 것을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사람들이 계획 세우는 것을 멈추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는 아주 어릴 때부터 계획 하는 삶을 살았다. 가장 기초 교육기관인 유치원에 입학하기 전부터 가정에선 부모와 함께 기상시간, 간식시간, 잠 자는 시간 등을 만들었고(물론 부모의 강요가 대부분이었겠지만) 공교육에 편입된 이후론 그 계획에 '부지런할 것'과 '시간낭비 하지 말 것'을 가치로서 교육 받으며 칸이 꽉꽉 찬 시간표를 짠다. 이로써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은 '낭비'이고, 결국 아무것도 되지 않은 사람 역시 '낭비'라는 것을 체득하게 되었다. 의심할 것 없이 훌륭한 사회화였다.


그런데 그것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정신과 의사인 저자는 자신을 찾아오는 청년들이 하는 질문이 과거와 미묘하게 바뀌었단 걸 알게 된다. "내가 이 직업을 가질 수 있을까요?"에서 "내가 무엇을 하고 싶은지 모르겠다"가 된 것이다. 후자의 질문은 '주체성'이 결여되어 있다. 어릴 때부터 강요 된 부지런함을 주입 받은 청년들이 스스로 무언가를 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스스로 삶을 계획해서 산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자신의 가치가 아닌 사회의 가치를 쫓는 경우가 많다. 아이들에게 꿈을 물어보면 '무엇이 되겠다'고 하지 '어떻게 살겠다'고 하지 않는다. 성인도 마찬가지다. '무엇이 될 수 없는'사회에서 '무엇이 되리라'다짐하는 것은 개인을 괴롭게 만든다. 악순환이다.


최근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실존적인 물음을 고민하는 상담자가 늘어나는 현상은 어느 사이엔가 물질적이고 경제적인 만족이 포화점에 달해 이것만으로 더는 우리에게 '살아가는 의미'를 부여할 수 없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p12


그렇다면 언제부터 노동이 신성시 되었을까. 우리를 채찍질하는 '일 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말라'는 슬로건은 어떻게 생겨난 것일까. 마치 태초부터 있었을 것만 같은 이 노동의 신성함은 사실 몇 백 년 전 유럽의 종교개혁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라는 사도 바울의 명제는 무조건 모든 사람에게 적용된다. 노동 의욕이 없다는 것은 구원 받지 못한 상태를 드러내는 징후다 p93


기독교 국가가 아닌 나라에서 살고 있는 우리에게도 친숙하게 들리는 '일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말라'는 말이 여기에서 비롯되었다는 데 놀라움을 감출 수 없다. p93


 이와 비슷하게 '노동이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명제 역시 반어적이다. 노동은 인간을 기계의 부품처럼 속박 시키고, 노동하지 않는 자, 노동할 수 없는 자를 사회에서 배제시키기 때문이다. 물론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은 필수다. 돈 없이 살 수 없진 않은가. 저자가 지적한 것은 노동하지 말라가 아니라 노동을 통해서 삶의 의미를 찾겠다는 강박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노동이 자신의 삶을 위한 수단이란 것을 기억해야 한다는 것이다. 노동에 속박되지 않기 위해서 필요한 것으로 저자는 '관계에서의 자유로움'과  '자발성'을 든다.


한편, 고독에 떨며 의지할 데 없는 외로움과 무의미에 짓눌려 뭉개질 듯한 상태는 달에 비유할 수 있다. 달은 스스로 열과 빛을 낼 수 없기에 어떻게 해서든 누군가가 빛을 비춰주고 따뜻하게 해주길 바랄 수밖에 없다. 이것이 인연에 매달리거나 무리 짓고 싶어하는 심리를 만들어낸다. 그래서 '자신이 자신답게 존재한다'는 자유를 포기하고서라도 무언가에 복종하고 마는 것이다. p148


삶을 주체적으로 살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고독'이다. 앞서 말한 '고독'과는 다르다. 신경증 환자를 치료하기 위해 정신과 의사인 모리타 마사타케가 만든 '모리타 요법'이란 게 있다. 이는 초기에 누구하고도 교류하지 않으면서 심지어 기분을 달래는 일조차 일절 금지하고 오로지 자신과 마주하는 절대와욕기(환자가 개인실에서 일주일간 침대 또는 이불 위에서 지내는 것)라는 과정이다. 자신의 내면과 조용히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치료가 될 수 있단 것이다. 삶은 노동과 무관하게 가치 있어야 한다. 어딘가에 속박 되는 순간 괴로움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저자의 말대로 새로운 삶을 살기 위해서, 지금의 괴로움을 이겨내기 위해서 자신만의 고독을 찾아보는 것이 어떨까. 삶의 보람을 삶 그 자체에서 찾아보는 것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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