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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진기행 - 문학상 제정 작가 10인 작품선 ㅣ 대한민국 스토리DNA 15
김동인 외 지음 / 새움 / 2017년 8월
평점 :
절판
여러분, 혹시 '알쓸신잡' 보셨나요?유시민 작가님, 김영하 작가님, 황교익 맛칼럼니스트, 가수 유희열, 정재승 과학자까지! 유명한 지식인들이 모여서 '알아두면 쓸데없는 신비한' 이야기들을 마구마구 수다 떠는 예능이었죠! 저도 참 즐겨보던 프로그램 중에 하나인데 종영을 해서 너무 아쉬워요 ㅠㅠ 워낙 인기가 많았던 방송이라 거기에 소개된 책들도 덩달아 관심을 얻고 있습니다!(서점에 가면 알쓸신잡 코너가 따로 있을 정도!)
순천으로 여행을 떠났던 2회에서 소개된 책은 김승옥 작가님의 '무진기행'이었습니다! 김승옥 작가님 고향이 순천인 거 다들 알고 계셨나요? 순천만 근처에는 실제로 김승옥 작가님과 '오세암'으로 유명한 정채봉 작가님의 문학관이 있답니다! 저도 가본 적이 있는데 아담하고 고즈넉하고 참 좋더라고요.
김영하 작가님은 '무진기행'을 손으로 전부 써보기도 했을 만큼 이 소설을 좋아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방송을 보고 나니 저도 어릴 때 읽은 '무진기행'을 다시 한 번 읽어보고 싶더라고요. 다른 분들도 같은 마음이셨는지 최근 '무진기행'이 베스트셀러 목록에 오르기도 했죠!
저는 한 달 전에 새움 출판사에서 나온 책을 읽었어요. 아니, '무진기행'이 이렇게 두꺼웠나? 깜짝 놀랐는데 문학상 제정 작가 10인의 작품이 전부 담겨 있던 거더라고요! (민망^^;) 무진기행만 읽으려고 했는데 김동인, 김유정 등 한국 문학의 한 획을 그은 작가들의 작품까지 함께 있어서 더 든든하고 좋았습니다.
고등학생 때 입시를 위해 읽었던 소설들을 성인이 되어 다시 읽으려니 마음이 새로웠습니다. 그 땐 너무 어리기도 했고 성적이 급해서 무슨 말인지도 잘 몰랐어요. 재미도 없었고요. 그런데 조금은 쓸쓸하고, 조금은 힘든 어른이 되어 다시 읽어보니... 사실 조금 울 뻔했어요. 참 마음에 와 닿더라고요, 모든 이야기들이. 그 때는 모르고 지금은 아는 것들이 말이에요. 여러분들도 그러시지 않을까요?
저는 오늘 김승옥 작가님의 '무진기행'만 이야기하려고 해요. 여러분들도 저마다 마음에 남는 소설들을 다른 분들과 함께 이야기 해보시면 좋을 것 같아요.
제약회사 회장의 딸과 결혼해 곧 상무 승진을 앞두고 있는 주인공이 있습니다. 그는 아내로부터, 승진이 확정될 동안 잠시 고향인 무진에 휴식차 다녀오라는 제안을 받고 무진으로 떠납니다. 지루하고 조용한 그 곳에서 그는 한 여자를 만나게 되고, 일탈을 꿈꾸기 시작합니다. 그는 과연 가정과 승진과 그 모든 책임을 버리고 그 일탈을 시작할 수 있을까요?
'누구나 자신만의 '무진'이 있다.'는 띠지가 인상 깊습니다. 사회는 녹록지 않은 곳입니다. 가면을 쓰게 되고, 의도치 않게 말하고 행동하게 됩니다. 책임과 구속이 개인을 옭아맵니다. 그러나 누구나 자신만의 무진, 그러니까 고향이든, 가정이든, 친구든 자신이 자신의 본 모습대로, 자신의 부끄러움과 수치 등을 드러낼 수 있는, 책임에서 자유로워져서 방종하게 되는, 그런 곳이 있을 겁니다. 그 곳은 그런 이유로 피난처이기도 하지만, 그런 이유로 불편한 이중적인 속성을 가지게 됩니다. 마치 온갖 몽상 속에 살던 조금은 부끄럽고 아무것도 몰랐던, 유아기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언제나 그 곳에 갇혀 살 순 없습니다. 그 곳에 갇혀 살고 싶다면, 안개에 둘러싸여 마치 세상에서 고립된 것처럼 보이는 무진처럼 외따로이 지내야만 합니다. 대부분의 인간은 선택해야 할 순간에, 자연스레 사회를 고르게 됩니다. 어쩌면 주인공의 일탈이 실패한 것도, 욕망을 누르고 사회적 책임을 선택한 것도, 처음부터 예정되어 있던 일일지 모릅니다. 무진은 영원히 살 수 없는, 공간이니까요. 여러분에게도 '무진'이 있나요?
※밑줄 친 문장들
무진에 오기만 하면 내가 하는 생각이란 항상 그렇게 엉뚱한 공상들이었고 뒤죽박죽이었던 것이다. 다른 어느 곳에서도 하지 않았던 엉뚱한 생각을 나는 무진에서는 아무런 부끄럼 없이, 거침없이 해내곤 했었던 것이다. p115
내가 나이가 좀 든 뒤로 무진에 간 것은 몇 차례 되지 않았지만 그 몇 차례 되지 않은 무진행이 그러나 그때마다 내게는 서울에서의 실패로부터 도망해야 할 때거나 하여튼 무언가 새출발이 필요할 때였었다. 새출발이 필요할 때 무진으로 간다는 그것은 우연이 결코 아니었고 그렇다고 무진에 가면 내게 새로운 용기라든가 새로운 계획이 술술 나오기 때문도 아니었었다. 오히려 무진에서의 나는 항상 처박혀 있는 상태였었다. 더러운 옷차림과 누우런 얼굴로 나는 항상 골방 안에서 뒹굴었다. 내가 깨어 있을 때는 수없이 많은 시간의 대열이 멍하니 서 있는 나를 비웃으며 흘러가고 있었고, 내가 잠들어 있을 때는, 긴긴 악몽들이 거꾸러져 있는 나에게 혹독한 채찍질을 하였다. p116
그 여자가 정말 무서워서 떠는 듯한 목소리로 내게 바래다주기를 청했던 바로 그때부터 나는 그 여자가 내 생애 속에 끼어든 것을 느꼈다. 내 모든 친구들처럼. 이제는 모른다고 할 수 없는, 때로는 내가 그들을 훼손하기도 했지만 그러나 더욱 많이 그들이 나를 훼손시켰던 내 모든 친구들처럼. p129
모든 것이 세월에 의하여 내 마음속에서 잊혀질 수 있다고 전보는 말하고 있었다. 그러나 상처가 남는다고. 나는 고개를 저었다. 오랫동안 우리는 다투었다. 그래서 전보와 나는 타협안을 만들었다. 한 번만, 마지막으로 한 번만 이 무진을, 안개를, 외롭게 미쳐 가는 것을, 유행가를, 술집 여자의 자살을, 배반을, 무책임을 긍정하기로 하자. 마지막으로 한 번만이다. 그리고 나는 내게 주어진 한정된 책임 속에서만 살기로 약속한다. 전보여, 새끼손가락을 내밀어라. 나는 거기에 새끼손가락을 걸어서 약속한다. 우리는 약속했다. p146
그럴 때의 무진은 내가 관념 속에서 그리고 있는 어느 아늑한 장소일 뿐이지 거기엔 사람들이 살고 있지 않았다. 무진이라고 하면 그것에의 연상은 아무래도 어둡던 나의 청년(靑年)이었다. p1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