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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는 남자 - 2017 제11회 김유정문학상 수상작품집
황정은 외 지음 / 은행나무 / 2017년 7월
평점 :
품절
지난 7월! 내가 좋아하는 은행나무 출판사에서 신간을 내놓았다. 책을 펼쳐 든 나는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는데 그 이유는 첫째, 5500원이라는 파격적인 가격과 둘째, 제 11회 김유정문학상 수상작품집이라는 사실 때문이었다! 다시 말해, 수상자인 황정은 작가 뿐 아니라 김 숨, 김언수, 편혜영 등 한국 문학에서 내로라하는 작가들의 작품을 고작 커피 한 잔 값(그러니 책책책 책을 읽읍시다!)으로 즐길 수 있다는 기쁨 때문이었다.(은행나무 출판사는 이전에도 '호텔 프린스'라는 소설집을 5000원에 출간한 적이 있다!)
은행나무 출판사, 아주 칭찬해
무엇보다 수상 후보에 오른 김 숨, 김언수(작가님 사랑합니다), 윤고은, 윤성희, 이기호(유머취향내취향), 편혜영('재와 빨강' 리스펙) 작가님들 모두 정말 작품성이 뛰어난 것으로 명성이 자자하신 분들이라서 이 분들 작품을 한데 모아 읽으려니, 마치 문학 뷔페에 온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총 일곱 개의 단편들이 실린 이 소설집에서 내게 가장 인상 깊었던 작품은 이기호 작가님의 "최미진은 어디로"였다. 수상작인 황정은 작가님의 "웃는 남자"는 물론이고 어떤 작품이 더 좋았는지 꼽는 것은 정말 힘들고 무의미한 일이다. 그러니 내가 이기호 작가님의 "최미진은 어디로"를 꼽았더라도, 그것은 결코 순위를 매긴 것이 아니니!! 만일 이 책을 읽으신다면 제 생각은 집어치우고 부디 여유롭고 감미롭게 읽어주시길^^
줄거리 소개!
"최미진은 어디로"의 주인공 "나"는 중고나라에서 물건을 사려던 어느 날, 자신의 소설이 매물로 올라온 것을 보게 된다. 그 밑엔 "병맛 소설, 갈수록 더 한심해지는 꼴에 저자 사인본"이라는 모욕적인 코멘트까지 달려 있었다. 자존심이 상한 '나'는 이 맹랑한 판매자가 괘씸하단 생각을 하게 되고, 궁리 끝에 직접 이 판매자를 만나러 가게 된다. 그 판매자가 자신이 팔 소설의 저자를 직접 만나게 된다면 분명 꼴이 우스워지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막상 만나게 된 판매자는 소설가인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고, 팔기 위해 가져온 자신의 책에는 "최미진"이라는 익숙한 이름이 쓰여져 있다. 아, 혹시 그렇다면 당신은....? (스포 금지, 뒷이야기는 소설에서 직접 확인하시길!)
소설 속 주인공인 '나'는 작가고, 이름은 이기호다. 혹시 진짜 작가님이 이런 일을 겪으셨을까? 궁금했지만 알 수가 없어서 아쉽다 ㅠㅠ
어쨌든 이 소설이 내게 가장 인상 깊었던 이유는 주인공 '나'의 행동이 과거에 내가 저질렀던 실수와 아주 많이 닮아 있었기 때문이다. 주인공은 자신에게 모욕감을 주었던 판매자에게 똑같이 모욕을 되갚아 주기 위해서 KTX로 2시간이나 달려서 일산까지 도착하는 집요함을 보인다. 막상 뭘 어떻게 해야 할 지 자신도 모르면서 일단은 그 사람에게 낭패감을 선사하고 싶다는 그 순수한 악심(惡心)! 예상대로 판매자는 창피함을 느끼고, 이후 주인공에게 전화를 걸어 '죄송하다'고 사과를 한다.
씨발, 아무것도 모르면서...내가 왜 책을 파는지...내가 당신이 쓴 글씨를 얼마나 오랫동안 바라봤는지...아무것도 모르잖아요... 모르면서 그냥 그런 거잖아요...그런데 씨발,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다고...내가 죄송하다는 말을 얼마나 많이 하고 사는데....꼭 그 말을 들으려고...꼭 그 말을 들으려고 그렇게....p243
주인공은 결국 원하는 사과를 받아냈지만, 기분이 썩 좋지 않다. 아니, 오히려 더 큰 낭패감과 자기 혐오감을 맛 본 사람은 판매자가 아니라 주인공 자신이었다.
나도 이런 경험을 한 적이 있어서 이 때 느꼈을 주인공의 마음을 아주 잘, 아주 아프게 이해할 수 있었다. 사연은 구구절절 말할 수 없지만, 나도 그 때 그 친구에게 내가 느꼈던 모욕을 되돌려주기 위해서 그래 너도 X돼 봐라, 라는 심정으로 대했던 적이 있다. 그러면 그 친구가 내게 사과할 줄 알았다. 그러면 내 마음이 풀릴 줄 알았다. 그러면 다시 우리 관계가 다시 회복될 줄 알았다.
친구는 내게 사과했다. 하지만 내 마음은 풀리지 못했고, 우리 관계는 그 날 이후 조금씩 조금씩 어긋나더니 완전히 틀어져 버리고 말았다. 그 때의 상처는 비수가 되어서 내 마음에 그대로 박혀 있다. 반성을 많이 했지만 되돌릴 수 없기에 여전히 아픈 기억이다.
그 때 나는 왜 그랬을까?
비단 나 뿐만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이런 모순적인 경험을 해보았을 것이다. 누군가와 크게 싸우고, 내가 이겼지만, 속이 답답하고 결국엔 왠지 모를 자기 혐오감을 느끼게 되는 그런 경험.
마치 끝을 생각하지 않고 도로 위를 무자비하게 질주하는 오토바이와도 같은 것이 아닐까? 중간에 브레이크를 밟았어야 하지만, 그러니 주인공은 중간에 역에서 내려 집으로 돌아왔어야 하지만, 그러니 나는 친구에게 너X돼봐라 라고 생각하지 말았어야 하지만
멈추지 않고 끝까지 달려버려서 결국 파멸에 이르고 만다. 어리석게도.
참고, 한 번 더 생각하고, 아량이나 관용을 베풀었어야 할 때에도 때때로 우리는 잘못된 선택으로 자신에게 상처를 줘 가면서까지 관계를 그르치고 만다.
그런데 사실 그런 상황의 원인은 상대방에게 있는 것보다는 자신에게 있는 경우가 많다. 소설 속 주인공은 작가로서, 가장으로서 제대로 일을 하지 못할 때 그런 일을 겪고, 자신의 그 스트레스를 애꿎은 사람에게 풀어버린 것이다. 그처럼 나도 나에게 만족스럽지 못할 때, 괜한 화풀이 상대를 찾고 있었다.
이 일로 뒤통수를 크게 얻어맞은 듯 충격을 받은 주인공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나의 적의가 무섭다p243
나도 나의 적의가 무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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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때로 나는 생각한다. 모욕을 당할까 봐 모욕을 먼저 느끼며 모욕을 되돌려주는 삶에 대해서. 나는 그게 좀 서글프고, 부끄럽다. p2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