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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랜드 ; 짓다 - 듣는 순간 갖고 싶게 만드는 브랜드 언어의 힘
민은정 지음 / 리더스북 / 2019년 3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사람이 하루 동안 마주치는 브랜드가 수천 개라는 것을 듣고 충격을 받았던 적이 있다. 압도적인 숫자가 아니라 그 많은 브랜드들 중 내 뇌리에 각인된 것들이 손에 꼽을 만큼 적다는 데서 오는 놀라움 때문이었다. 지금까지 살아남은 그 브랜드들은 어떻게 탄생했고 생존해서 우리의 구매욕을 자극하는 것일까? 어떻게 한 시대의 향수를 자극하는 것일까? 때론 한 도시나 국가의 이미지를 결정하기도 하는 것일까? 결코 잊혀지지 않을 첫인상을 결정하는 '이름'들의 이야기가 한국 최고의 브랜드 버벌리스트인 저자 민은정의 손으로 직접 쓰였다. 그가 참여했던 네이밍 사업과 거기서 탄생한 이름들의 친숙하고 풍부한 예시들이 이 책에 가득하다.

강한 것은 구구절절 말하지 않는다. 잘 벼린 칼날은 그 무엇보다 단순하다. 그러면서도 상대를 위협하는 날카로움이 있다. 이름도 그러해야 했다. 아주 단순하면서도 날카로워야 했다. '촌철살인' 딱 그것이 필요했다 -책 中
찰나의 첫인상을 강렬하게 만들기 위해 고려해야 할 사항은 꽤 복잡하고 다양하다. 발음되기 편하게 유성음과 무성음을 적절히 조합하고 타겟에 맞춰 글자 수를 조절한다. 제품의 속성이 바로 떠올라야 좋은 이름이다.
네가 그냥 커피라면, 난 TOP야. 라는 문구로 유명해진 음료도 저자의 작품이다. 그는 첫맛은 강하고 목을 넘어갈 때의 끝 맛은 부드러운 커피의 특성을 최대한 살리면서도 소비자에게 강한 인상을 주기 위해 다양한 후보들을 만들고 고민했다. TOP는 수많은 후보들 중 가장 적합한 이름이었다.
커피의 강한 첫맛은 '티', 부드러운 맛은 '오', 여운이 남는 향은 '피' 이렇게 세 음절이 각각의 역할을 나누어 수행한다. 그렇기 때문에 티오피라는 이름을 부르고 들을 때 커피다움을 느낄 수 있다.(...)이후로 프리미엄 원두 캔 커피 시장은 빠르게 성장하여 10여 년 만에 1조 원을 넘는 시장이 되었다. 지금 이 시장의 최강자는 롯데칠성음료의 칸타타와 동서식품의 티오피다. p10
이름을 만들었다고 끝이 아니다. 이름의 이미지를 풍부하게 만들도록 스토리도 만들어야 한다. 대개 한 제품이나 기업의 이야기는 인상 깊은 슬로건과 함께 전달되곤 한다. 슬로건은 단지 멋지고 강렬한 것을 넘어 기업이 추구하는 미래와 정신을 담아야 한다. 종종 슬로건이 집단의 가치관에 영향을 미치곤 하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구글은 'Don't be Evil'에서 'Do the Right Thing'으로 슬로건을 변경했다. '올바른 일을 통해 세상에 보탬이 되기 위해서'라는 존재 이유를 정립하고, '더 나은 세계를 위한 올바른 일'이라고 스스로의 업을 새롭게 정의한 것이다. 구글은 이러한 존재 이유와 업의 재정의를 바탕으로 주력 사업이 무엇인지 알 수 없을 만큼 세계인의 삶 모든 단면에서 활약 중이다 p97
그래서 기업이 슬로건에 반하는 일을 하거나 불법을 저지를 때 소비자는 물론 직원들까지 기업을 규탄하고 나설 때가 있다. 책에는 나오지 않았지만 이 부분을 읽고 두 가지 예시가 생각났다. 사람이 미래라고 했던 한 대기업이 갓 입사한 신입사원들까지 포함해 대규모 정리 해고를 단행한 사실이 밝혀지며 국민들과 직원들로부터 많은 비판을 받았던 적이 있다. 반면 잘 만든 슬로건을 긍정적으로 활용하면 기업의 이미지가 향상되고 사람들에게 좋은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역시 책에는 나오지 않았지만 최근 스포츠 브랜드 나이키가 Just Do it 을 내세우며 다양한 여성 셀럽들이 능동적이고 주체적인 모습으로 활약하는 장면을 내세웠는데 이는 많은 여성들의 가슴을 뛰게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기업에 대한 호감도도 수직 상승시켰다.
브랜드가 시대 정신을 담기도 한다. 무궁화호,새마을호, 통일호, 비둘기호 같은 열차 이름은 통일을 염원하거나 애국심을 고취시키기 위한 당시의 분위기가 반영된 결과다. 한국인의 소울 푸드 중 하나인 소주 이름의 변천을 살펴보는 것도 흥미롭다.
1951년 '금련', 1952년 '낙동강'에 이어 1954년에 출시된 레전드 브랜드 '진로'는 전후 복구, 새마을 운동, 한강의 기적, 민주화 운동을 함께 하며 삶의 고단함을 위로해준 국민 소주였다. 1998년 외환 위기로 한창 어려움을 겪던 진로는 이름을 '참眞이슬露'로 바꾼다. 그리고 2014년, 한자를 빼고 진정한 '참이슬'로 리뉴얼했다.(...) 기존 고객을 지키면서 젊은 세대에게도 어필할 수 있는 브랜드로의 변화를 이끌어냈다 p129
저자는 이런 이름들은 '머릿속에 새겨지는 것이 아니라 차곡차곡 시간을 지나오며 가슴에 새겨진 추억'이라고 말한다. 그러니 이름을 짓는 것은 때로 '시대의 감각과 감성을 기록하는 역사 그 자체'가 되기도 한다. 브랜드 하나에 기업이, 도시가, 나라가 흔들리거나 성장하는 것을 보는 건 마치 어린 아이의 그것을 보는 것처럼 신기하고 흥미롭다. 카피라이터, 네이미스트 등 광고계에서 일하고자 하는 이들에게 이 책은 업계 선배가 들려주는 노하우이자 진심 어린 조언이 될 것이다. 나에겐 브랜드의 유래와 탄생 과정을 알 수 있어서 아주 흥미로운 시간이었다.
이번엔 어떤 브랜드가 우리를 유혹할까.
책을 덮고 나니 세상이 꽤 재밌어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