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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령 ㅣ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7
정용준 지음 / 현대문학 / 2018년 10월
평점 :
범죄자는 교화 될 수 있을까? 소설을 읽는 내내 머릿속을 떠돌았던 질문. 요즘처럼 끔찍하고 믿을 수 없는 범죄가 세 끼 밥 먹듯 나오는 현실에서 이런 질문에 답은 당연히 '아니오'인 것만 같다. 그러나 이 질문은 정답을 내릴 수 없고 존재하지도 않는 넌센스다. 범죄자에게 믿음이나 인류애가 있기 때문이 아니라 모든 인간이 하루하루 매일같이 크고 작은 죄를 짓고 있으며 모든 평범한 인간들은 감옥에 갇힐 만한 범죄를 저지르지만 않았을 뿐 모두 더럽고 불쾌한 짓들을 벌이면서 사는 까닭이다.
감옥 밖에서도 지옥도를 그리고 있는 인간들이 감옥 안이라고 교화될 리가 없다. 그러니 이 질문은 이렇게 바뀌어야 한다. '인간은 교화될 수 있는가?' 그리고 답은 예스나 노로 명확히 구분되는 명사가 아니라 언제든지 왔다갔다할 수 있는 동사가 되어야 한다. 보아라. 정용준의 소설 속 끔찍한 살인범은 474한 명이지만, 그를 둘러싼 인간들을 과연 선하다고 할 수 있는지. 그리고 그들이 지금 책을 읽고 있는 우리와 다른 것이 있는지. 우리는 모두 평범한 악마들이다. 그러니 474가 더 나쁜 놈일 뿐, 그 외 인물들이 선한 것이 아니다. 그들은 덜 나쁠 뿐이다. 자주 사람들은 이 더 나쁜 것과 덜 나쁜 것을 혼동하고, 후자를 '선하다'고 말한다.
내게 이 소설에서 가장 마음이 이끌리는 존재가 누구냐고 묻는다면 나는 주저없이 신해경을 고르겠다. 그녀는 적어도 이 위악이 넘치는 세상에서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고백하기라도 했으니까. 독자들이여, 부디 이 초라하고 볼품없는 중년의 여성을 단지 474의 누나로만 여기시지 말기를. 474의 과거를 캐내는 수단으로 도구화 하지 말기를. 신해경을 잊는 순간, 우리는 소설 속에서 길을 잃고 말 것이다. 474를 죽여야하나 살려야 하나 바보 같은 질문을 던지면서.
신해경은 바둑돌을 놓는 고수, 들개를 조련하는 주인같다. 살인을 저지른 건 474지만 그를 그렇게 하도록 충동질한 건 신해경이다. 무심코 놓은 바둑돌이 게임을 의외의 결과로 이끌기도 하는 것처럼 그녀가 원하진 않았지만 결국 474는 그녀가 우려한 대로 운명을 몰고 갔다. 474가 살인을 저지른 이유가 그녀에게서 버림받았기 때문에, 관심을 얻고 싶어서라는 것도 흥미롭다. 꼬리를 살랑거리다가도 주인이 등을 돌리면 금세 시무룩한 표정을 짓는 개와 그 앞에 신해경. 악이 또다른 악에게 영향을 끼치고 그것이 실현되는 장면들은 매일같이 예상치 못한 운명의 손아귀에서 시달리고 불쾌한 타인과 살을 부대끼며 살아가야만 하는 인간의 삶을 떠올리게 한다.
신해경을 진정한 악마라고 얘기하는 것이 아니다. 한나 아렌트가 말한 것처럼 악은 허무할 만큼 평범하고, 평범한 인간들은 그래서 저마다 악하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들만은 선하다고 믿는 것이 인간이니까. 474를 어서 죽으라면서 경멸하는 교도소장도, 실천에 옮기지만 않았을 뿐 살인범에 근접하지 않은가. 실행의 유무가 법에 심판대에 올릴 순 있어도 선악을 가를 수는 없는 것이다.
자신이 누군지 알고, 자신의 죄를 진심으로 인정하는 자가 혹, 그것이 손톱만한 차이일지라도 그렇지 않은 자보다 더 자유롭다. 신해경은 아마 바람처럼 날았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