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상한 기독교 - 대담으로 풀어 본 기독교 다시 이해하기
오사와 마사치.하시즈메 다이사부로 지음, 이주하 옮김 / 북앤월드(EYE)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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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에 대한 종교사회학적 대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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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의 역사를 통해 배우는 지정학
다카하시 요이치 지음, 김정환 옮김 / 시그마북스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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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배경에는 예외없이 국가의 야심이 존재했으며, 이는 바로 영토와 관련된 야심이다‘는 전제로 글로벌 세계의 국제관계와 그 역사를 바라보는 시선이 바로 지정학이라 하겠다. 다만 이 책의 불편한 지점은 그 야심을 응시하는 냉정한 시선에서 유독 일본만은 예외로 두고 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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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탈 - 정치적인 것에 있어서의 수행성에 관한 대화
주디스 버틀러.아테나 아타나시오우 지음, 김응산 옮김 / 자음과모음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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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락된 번역이 있는 것 같아 적어봄.


한글번역본 p.37

"선생께 있어서 자아가 그 자신과 맺는 관계는 "자기 현전(self-presence)"이라는 말로 표현되고 있습니다만, 저는 현전이 자아-정체성, 그리고 심지어 자족성과 구분될 수 있는지 의아스럽습니다. 선생께 이것은 어떤 가능성인가요? 저는 신체적 노출이라는 생각이 수반하는 현전도 있다고 생각하는데, 이러한 노출은 해당 신체의 예속이나 인정을 이끌어내기 마련이지요."


Judith Butler and Athena Athanasiou, 2013, Dispossession: The Performative in the Political, Polity Press, p.13.

"For you, it seems, this relation of a self to itself is described as “self-presence” and is itself implicated in a metaphysics of presence. I wonder whether presence can be distinguished from self-identity and even self-sufficiency. If we are, for instance, “present” to one another, we may be dispossessed by that very presence. Is this at least a possibility for you? It seems to me that there is a presence implied by the idea of bodily exposure, which can become the occasion of subjugation or acknowledgement."


"당신에게는 이와 같은 자아의 그 자신과의 관계가 "자기-현전(self-presence)"으로서 기술되고 있고, 이는 그 자체로 어떤 현전의 형이상학을 암시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저는 (당신에게 있어)현전이 자아-정체성, 더 나아가서는 자기-충족성과 구별될 수 있을지 궁금합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서로에게 "나타난다(present)"면 우리는 바로 그 현전(presence)에 의해 박탈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당신에게는 이러한 상황이 적어도 가능한 것인지요? 저는 신체적으로 드러내기(bodily exposure)라는 관념이 함축하는 현존이 존재하며, 이 신체적으로 드러내기는 예속(subjugation)이나 인정(acknowledgement)의 계기가 될 수 있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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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차 세계 리셋 - 아이디어 중심 창조경제로 비즈니스의 새판 짜기
리처드 플로리다 지음, 김민주.송희령 옮김 / 비즈니스맵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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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다가 무슨 말인지 싶어 영어 원서를 찾아보았는데, 번역자분이 번역하시면서 원문을 좀 바꾸시거나 추가한 부분이 꽤 많은 걸 확인하게 되었다. 책은 저자의 명성에 끌려 읽게 된 건데 이래서야 내가 저자의 글을 읽는건지 역자의 글을 읽는건지 도무지 알 수 없게 되어버렸다.



원문 차례


Part I: Past as Prologue
1. The Great Reset
2. The Crisis Most Like Our Own
3. Urbanism as Innovation
4. The Most Technologically Progressive Decade
5. Suburban Solution
6. The Fix Is In
7. Unraveling


Part II: Redrawing the Economic Map
8. Capital of Capital
9. Who’s Next?
10. Fire Starter
11. Big Government Boomtowns
12. Death and Life of Great Industrial Cities
13. Northern Light
14. Sun Sets on the Sunbelt


Part III: A New Way of Life
15. The Reset Economy
16. Good Job Machine
17. The New Normal
18. The Great Resettle
19. Big, Fast, and Green
20. The Velocity of You
21. Faster Than a Speeding Bullet
22. Renting the Dream
23. Resetting Point


pp.73-74

1920년대에는 포드, GM, GE같은 기업들의 산업생산 붐이 크게 일어났고, 이것은 새로운 경제 팽창 현상에 한몫했다. 그러나 산업생산은 미국의 자본과 투자를 늘리는데 가장 중요한 요소는 아니었다. 그것은 바로 주택시장이었다. 바로 신도시에 지어진 주거용 주택이 기업 생산 및 건설, 도로 등 인프라 발전을 유도해 국가가 자본을 축적하는데 가장 크게 기여했다. 동시에 이 분야는 가장 많은 투자자본의 유입을 가져왔다. 사람들은 교외의 작은 아파트 단지에서부터 상가 건물에 이르기까지 신도시에 지어지는 건물이라면 닥치는 대로 투자했다. 플로리다 주에 은퇴 노인들을 위한 휴양 거주지가 출현한 것도 바로 이 시기였다. "당시 교외 신도시 건설 붐을 잘 보여주는 것은 여기저기 지어진 고층 아파트였다. 위치와 상관없이 무조건 짓다보니 아파트 실제 거주율은 매우 낮았는데, 텅 비어있는 고층 아파트들은 1920년대 후반의 전형적인 모습 중 하나였다"라고 경제사학자 알렉산더 필드는 쓰고 있다. 이처럼 아파트가 많이 건설되었으나 실제로 주택시장 투자 자금의 80퍼센트가 들어간 주택 구조는 뭐니 뭐니 해도 1가구 주택에서부터 2~4가구가 붙어 있는 것이었다.
주택시장에 모든 투자 자금이 쏠리자 당연히 부동산 가격이 상승했고, 서민들은 내집마련의 꿈에서 오히려 멀어졌다. 주택 건설에서 발생한 큰 문제 중 하나는 인프라가 주택 건설 붐을 뒷받침하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주택을 건설하면 돈이 된다는 생각에 건설회사는 상하수도, 도로, 고속도로가 개발되지 않은 지역에도 집을 지었다. 그런 신도시 주택가는 도시의 경제활동 중심지에서 지나치게 먼 곳에 있었으며, 교통 환경도 형편없었다. 시설의 좋고 나쁨을 떠나서 정상적인 주택가가 형성되는데 필요한 '도시 시스템'이 총체적으로 부재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당연히 그런 집은 팔리지 않았고, 결국 부동산시장은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영어원문
The 1920s saw a huge boom in industrial production, as companies such as Ford, General Motors, and General Electric helped power renewed economic expansion. But guess what was the biggest single contributor to the nation’s total stock of capital and investment? Not companies, not railroads, not industrial buildings, but housing. Residential homes—mainly in the form of new developments—made up the largest single component of the nation’s capital stock—factories, buildings, roads, and more—and its largest single source of net investment flows. Investment in everything from small apartment blocks and commercial buildings to early suburban subdivisions and Florida retirement communities surged during the decade. “White elephant apartment buildings, poorly located and with low occupancy rates, figure prominently in accounts of the boom, and were certainly a feature of the late 1920s,” writes Alexander Field. But 80 percent of this residential investment went into one- to four-family structures.
The problem went beyond rising prices and declining affordability, which played their roles. There was also the disconnect between the single-family housing construction boom and the infrastructure of the period, which from lax building codes and zoning ordinances to underdeveloped water and sewer systems, roads, and highways, simply could not support the housing that was being built. Some of the new construction was located too far away from urban hubs and transport connections; some simply lacked good utility hookups. The “urban system” was insufficiently developed to support the housing being built. And then the whole thing collapsed.


나의 어설픈 번역
1920년대에는 포드, 제너럴 모터스, 제너럴 일렉트릭과 같은 기업들이 새로워진 경제적 팽창에 힘을 싣는 등, 산업생산에서 거대한 붐이 일어났다. 그러나 국가의 총 자본(total stock of capital)과 투자에 가장 크게 기여한 요인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기업도, 철로도, 산업시설도 아니고 바로 주택이었다. (주로 신규개발 형태의)주거용 주택은 공장, 건물, 도로 등과 같은 국가 자본(capital stock)의 가장 큰 요소이자 순투자(net investment flow)의 가장 큰 원천을 구성했다. 작은 아파트 단지나 상가건물에서부터 초기 교외 지역이나 플로리다 은퇴자 주택지구에 이르기까지 모든 투자가 이 시기에 급증했다. “낮은 점유율에 어설피 들어선 돈만 많이 들고 쓸모없는 아파트 건물들이 그러한 투자 붐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며, 이는 분명 1920년대 말의 특징이었다”라고 알렉산더 필드는 말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택 투자의 80퍼센트는 1~4인 가구에 투입되었다.
가격 상승과 비용을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의 저하도 그렇지만 문제는 이를 훨씬 넘어서 있었다. 여기엔 단독주택 건설 붐과 당시의 인프라구조 사이의 단절문제도 있어서, 느슨한 건축법과 지역지구조례에서부터 상하수도 시스템, 도로, 고속도로의 미개발문제에 이르기까지 인프라구조는 건설 중이던 주택가를 전혀 뒷받침해주지 못하였다. 몇몇 신축지들은 도시 중심지와 교통수단에서 너무 멀리 위치해있었고, 몇몇은 양질의 공공서비스 시스템(utility hookups)이 매우 부족했다. 이러한 “도시 시스템”은 건설 중인 주택을 뒷받침할 수 있도록 충분히 개발되지 않았다. 그리고는 모든 것이 무너졌다.


p.78
사실 교외화, 즉 신도시 건설해법은 오랫동안 잘 먹혀왔으며 그 간의 경제성장을 주도했다. 텔레비전을 많이도 팔아먹은 라이프스타일의 변화는 단순히 문화적 차원에서 일어난 것이 아니었다. 미국인들은 라이프 스타일의 변화를 통해 더 나은 삶을 구축하기 위해 노력했고, 그런 노력이 대량생산 엔진의 풀가동으로 이어졌다. 흔히 교외 신도시는 개성이 없고 획일화된 특성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사회조직을 연구해온 윌리엄 화이트같은 학자들은 실제로는 그 반대라고 주장한다. 신도시 개발로 사람들이 전통적 공동체, 즉 인종 및 민족 위주의 거주 방식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신도시가 개발되기 이전에는 친척들이 한동네에 모여살며 친척인 동시에 이웃으로 지냈다. 또한 친척이 아닌 이웃들끼리도 친척처럼 살았다. 그러나 신도시 개발로 사람들은 이 획일적 사회에서 벗어나 더 폭넓고 자유롭게 사람들을 사귀는 코스모폴리탄 생활 방식으로 전환했다.


영어원문
Suburbanization worked well for a time. The lifestyle that played out on millions of television screens was much more than a cultural phenomenon; it made people’s lives better and did much to keep the engines of American mass production humming. Though we’ve come to think of suburbs as dull and homogeneous, many of the bland “organization men” whom William Whyte wrote about actually came out of traditional communities and ethnic neighborhoods. Families walked away from environments where neighbors and relatives knew everyone’s business in pursuit of a freer, more cosmopolitan life in the then-new suburbs.


나의 어설픈 번역
교외화는 한동안 잘 작동했다. 수백만의 텔레비전 스크린에서 보여진 라이프스타일은 어떤 문화적 현상 이상의 것이었다. 이러한 라이프스타일이 사람들의 삶을 더 낫게 만들었고, 미국식 대량생산의 엔진들을 계속 돌아가게 하는데 기여했다. 우리는 교외지역이 따분하고 동질적인 곳이라 생각하게 되지만, 사실 윌리엄 화이트가 말하는 수많은 단조로운 "조직인간(organization men)"은 전통적인 공동체와 종족적 이웃관계로부터 나왔다. (오히려)당대의 새로운 교외지역(the then-new suburbs)에서 보다 자유롭고 더 코스모폴리탄적인 삶을 추구하기 위해 가족들은 이웃과 친척들이 서로의 모든 것을 알고 있던 그런 환경들을 떠나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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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의 위기 - 21세기 문제군 시리즈 6 21세기 문제군 6
우에다 노리유키 지음, 양억관 옮김 / 푸른숲 / 199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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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p.171-176.


여기서 먼저 지적해두고 싶은 것이 있다. 비일상적 세계인 종교가 사람들을 틀에 가둔다고는 하지만, 과연 일상 세계는 종교 세계를 비판할 만큼 열려있는 다양한 세계인지 의문스럽다는 것이다. 만일 일상 세계가 열린 다양성을 가지고 있고 자유로운 삶의 가능성을 추구할 수 있게 하는 것이라면, 또한 자유로운 삶의 추구를 위한 자유로운 논의의 장도 마련하고 있다면, 종교가 어떤 하나의 세계로 사람들의 의식과 삶을 속박한다고 비판해도 무방할 것이다. 그러나 현실 사회는 어디를 보나 그렇지 않은 것 같다. 

....
자의적으로 선택된 하나의 삶의 방식을 세상에 그것밖에 없는 것처럼 믿게 하고, 그 집단적 규범에 따르게 만드는 시스템. 그 시스템은 학교에 한정되지 않고 이 사회 전체에 만연되어 있다. 종교를 '세뇌'의 기술이라고 비판하기 이전에, 일상 세계의 시스템이 얼마나 '세뇌'적인가를 알아야 할 것이다.
그러한 일상적 상황을 내버려두고 종교의 어느 일면만을 추출하여 그것을 이상하다고 규탄할 생각은 전혀 없다. 그것보다는 오히려 이런 일상 쪽이 종교적이라고 비난받아 마땅하다. 종교에 '자유'가 없다고 말하기 전에, 과연 이 사회는 자유로운가를 먼저 물어야 한다.
그것은 인간의 로봇화라는 현상이다. 제1장에서 살펴보았듯이, 누구든 자기 자신 속에 어떻게 행동해야 한다는 프로그램을 심어두고 있고, 그 프로그램에 따라 행동하는 로봇을 가지고 있다. 물론 '뭔가 이상하다'라는 생각은 한다. 그러나 적은 보이지 않는다. 누가 자신을 억합하는지 명백하지 않으므로 누구를 어떻게 공격하면 좋을지 모른다. 왜냐하면 진정한 적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스며들어 있는 자기 자신 속의 프로그램이기 때문이다.
이제 결론을 도출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사회에서 우리가 가장 우선적으로 추구해야 할 것은 본래적인 의미의 '다양성'이라는 사실이다. 단순히 자의적으로 정해진 하나의 가능성만을 진실이라고 믿어버릴 것이 아니라, 세계에는 다양한 삶의 방식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 그리고 자기 자신이 탑재하고 있는 프로그램을 반성적으로 파악하고 해체하여 자기 나름대로 재구축하는 것, 시스템이 그려주는 줄거리대로 행동할 것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살아 있는 드라마를 구성하는 것이다.


p.195-196


21세기의 종교는 '모든 사람이 한 종교를 믿으면 세계의 구원이 일어난다는 말은 맞을지도 모르지만, 그런 사태는 절대로 일어나지 않는다'라는 사실에서 출발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현실 그 자체가 다양성을 가지고 있다는 근본적인 인식을 갖추는 것이 무엇보다 시급하다. 그런 전제하에서 자신의 교단이 얼마나 독자성을 가지고 그 가르침을 넓혀갈 수 있을지를 탐색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종교 교단이 자신의 교의를 존중하면서도 '메타종교'의 시점을 가질 것을 요구한다. 종교가 사람들을 울타리 안에 가두어두고서 어떤 대립을 일으키고 있고, 앞뒤 없이 무조건 포교 활동만 벌이면서 어떤 폐단을 일으키고 있는지를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시점을 가지고 종교의 행방을 모색하는 태도가 필요하다.
'메타종교'적 발상, 그것은 종교를 넘어선 예지라고 해도 좋을지 모르겠다. 지금 그런 예지를 가진 종교가 요청된다. 그러한 열린 시점을 가졌을 때, 종교는 결고 가능한 한 많은 신자를 울타리 안에 가두려 하지 않고, '세상의 모든 사람을 신자로'와 같은 사고방식을 갖지 않게 될 것이다. 21세기를 항한 지구적 규모의 개혁 운동을 상징하는 언어로서 '지구적으로 생각하고 지역적으로 행동한다(Think globally, act locally!)'라는 말이 있지만, 종교라는 영역만큼 이러한 실천이 요청되는 분야는 없을 것이다. 이는 어느 종교 교단의 일원이라는 정체성에 앞서 '지구인'이라는 정체성을 가질 것을 요청하는 것이며, 지구적인 시야로 자신의 종교를 재인식할 필요성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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