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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고] Behavior in Public Places: Notes on the Social Organization of Gatherings (Paperback)
Free Pr / 196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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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고] The Will to Power (Paperback)
Vintage Books / 196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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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고] Matter and Memory (Paperback)
Dover Pubns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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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고] On the Genealogy of Morals and Ecce Homo (Paperback)
Vintage Books / 198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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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의 나선 - 사람들은 실수보다 고립을 더 두려워한다
엘리자베스 노엘레 노이만 지음, 김경숙 옮김 / 사이 / 2016년 3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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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베르트 볼츠의 저서에서 이 책의 핵심 내용을 소개하기에 옮겨본다.


노르베르트 볼츠(Norbert Bolz), 2011(2007), 『미디어란 무엇인가(Das ABC der Medien)』, 김태옥.이승협 역, 한울아카데미.



p.115

억압이라는 심리학적 개념과 유사하게 사회학에는 침묵의 소용돌이라는 중요한 개념이 존재한다. 토크빌은 이러한 사실관계를 이미 1835년에 알아냈다. 그 이후 엘리자베스 노엘레-노이만(Elisabeth Noelle-Neumann)은 이 개념을 커뮤니케이션 이론으로 발전시켰다.



p.114

그 어느 누구도 알렉시스 드 토크빌(Alexis de Tocqueville)보다 더 먼저 그리고 더 정확하게 이러한 사실을 알아차리지는 못했다. 토크빌이 미국의 민주주의를 보고 간파해냈던 사실은 그 어느 때보다 지금 더 현재적이다. 근대 이전에 인간은 관습이라는 불문법, 신의 계율, 또는 적어도 국가의 법을 따랐다. 이러한 전통적 가치는 현대사회에 이르러 파괴되었고, 여론으로 대체되었다. 동시에 뛰어난 심미안이 보여주던 방향감각 또한 사라졌으며, 마찬가지로 대중민주주의에서 여론으로 대체되어버렸다.... "다수가 확신하지 못하는 상황에서는 사람들이 입을 열지만, 다수가 단호하게 주장하는 상황에서는 어느 누구도 쉽게 입을 열지 못한다(Tocqueville, 1976: 294)."



pp.115-117

엘리자베스 노엘레-노이만은 일생일대의 저작을 통해 이 증후군은 다뤘다. 그렇지만 침묵의 소용돌이라는 정밀한 개념이 이 나라에서 아직도 미디어학의 기본 개념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현실은 오히려 그의 이론을 반증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침묵의 소용돌이 이론은 그 자체가 침묵의 소용돌이의 희생양이다.


그녀가 내린 결론에 대해서는 논쟁의 여지가 없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 믿기 때문에, 그들이 믿는 것을 믿는다. 그리고 지금까지 하나의 주제에 대해 다른 견해를 가졌던 사람은 익명으로 남아 있는 한, 즉 침묵하는 한에서는 체면을 구기지 않고도 견해를 바꿀 수 있다. 고립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사람들은 항상 여론을 주시한다. 또한 고립의 두려움 없이 표출할 수 있는 견해가 바로 공론이 된다. 따라서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세상을 관찰하는지를 관찰하며, 이를 통해 우리 모두의 내부에서는 '사람들이 그러던데'라고 말하면서 다른 사람들의 견해에 기댈 수 있는 일종의 유사 통계학적 감각이 훈련된다.


그러나 '사람들이 그러던데'라는 것은 민주주의에서는 최소한 잘 정리된 소수의 견해를 말한다. 미디어 민주주의에서 사람들 대부분은 다수의 단호함을 대변하는 언어를 통해 노예화되었다. 따라서 여론은 다수가 아니라 오늘날 정치적 올바름을 뜻하는 정통성이 표출될 수 있게 해주었다. 


여기서 우리는 민주주의의 핵심적 역설에 부딪히게 된다. 즉, 인간은 자유로우면 자유로울수록 여론을 통해 더욱더 노예화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역설은 아마도 마르틴 하이데거가 거장의 특별성과 세인의 익명성을 구별하는데 영감을 주었을 것이다. 거장이란 당연히 견해를 두려워하지 않는 니체 식의 위대한 인간이다. 세인은 이와 반대로 유사 통계학적인 감각을 지닌 사람을 말한다. 세인(!)들은 유사 통계학적 감각을 통해 관찰한 다른 사람들의 견해에 기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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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트겐슈타인 - 시공 로고스 총서 19 시공 로고스 총서 19
데이비드 피어스 지음, 정영목 옮김 / 시공사 / 2000년 4월
평점 :
절판


* 이 책을 다 읽었다면 '레이 몽크(Ray Monk)'의 How to read 비트겐슈타인(2007, 웅진지식하우스)을 읽도록 하자. 



p.56-58
칸트가 하려고 했던 일은 사고의 한계선을 확정하는 것이었다. 비트겐슈타인이 하려고 했던 유사한 일은 언어의 한계를 확정하는 것이었다. 비트겐슈타인의 작업은 논리학의 기초에 대한 연구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자신은 두 과제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고 보았다. 논리학은 필연적으로 참인 모든 것, 또는 경험에 대해 미리 참이라고 말할 수 있는 모든 것, 옛날 용어를 쓰자면 선험적으로 참인 모든 것을 포괄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 자, 언어의 한계는 사고의 한계와 마찬가지로 필연적 한계여야 한다. 따라서 논리학에 대한 비트겐슈타인의 폭넓은 개념을 고려할 때, 그 한계를 확정하는 일은 논리학에 맡겨지게 된다. 이런 식으로 논리학의 기초에 대한 연구는 언어의 한계에 대한 연구를 포함하게 되었다.
『논리철학 논고』의 중심적인 논제는 모두 이 지점에서 시작되는데, 바로 이것이 칸트의 『순수이성 비판』과 구체적으로 닮은 부분이다. 사고의 한계선과 언어의 한계선은 그냥 우연히 그 자리에 놓여진 것이 아니다. 그들의 위치는 필연적으로 결정된 것이다. 따라서 칸트가 그가 획정한 한계선을 넘어선 곳에서는 사고가 필연적으로 중단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 것과 마찬가지로, 비트겐슈타인도 언어는 그가 정한 한계선에서 필연적으로 중단될 수밖에 없으며, 그 이상 나아가면 침묵밖에 있을 수 없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칸트의 한계선은 사실적 지식을 둘러싸고 있으며, 비트겐슈타인의 한계선은 사실적 담론을 둘러싸고 있다. 양쪽 경우 모두 사변적 형이상학과 결별함으로써 종교와 도덕은 취약한 위치에 놓이게 된다. 이 문제에 대한 비트겐슈타인의 해결책은 칸트의 해결책과 똑같지는 않지만 매우 흡사하다. 그는 종교와 도덕을 사실적 담론 밖에 두지는 않았다. 대신 그는 그것이 사실적 담론 안에 있으면서도 그 일부는 아니라는 수수께끼같은 이야기를 했다.
그러나 두 사람의 체계에는 몇 가지 커다란 차이가 있다. 한 가지는 앞에 말했듯이, 비트겐슈타인의 비판은 언어라는 매개를 통하여 사고를 간접적으로 비판한 것이라는 점이다. 또 하나, 앞서 말한 차이만큼 두드러지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중요한 차이는 칸트와 비트겐슈타인 둘 다 철학적 명제가 필연성의 영역에 속한다고 생각했지만, 그들은 철학적 진리만이 아니라 필연적 진리에 대해서도 생각이 매우 달랐다는 점이다. 비트겐슈타인은 모든 필연성은 논리적 필연성이며, 논리학의 필연적 진리는 모두 실체가 없는 항진식이라고 주장했다.... 전문적인 말로 하자면, 종합적인 선험적 진리는 없다는 것이다.... 칸트는 포괄적인 논리학 이론을 전개하지도 않았고, 항진식에 흥미를 느끼지도 않았다. 그는 무엇보다도 가능한 경험의 테두리 내에 실체를 가진 필연적 진리라는 것이 있다고 주장했다.... 칸트와 비트겐슈타인이... 필연적 진리의 본질에 대해서는 의견이 달랐다면, 그 결과 철학적 논증과 그런 논증으로 입증한 결과물에 대한 그들의 생각 역시 달랐을 것이 틀림없다. 구체적으로 무엇이 달랐을까? 짧은 대답으로는 모호함을 피할 수가 없다... 그러나 몇 가지 점에 대해서는 당분간 모호함을 벗어날 수 없다 해도, 이 주제에 대한 두 철학자의 생각을 전체적으로 비교해 보는 게 가치있는 일일 것이다.



p.161
그의 전기 철학을 해설할 때는 방법론보다는 학설에서 시작하는 것이 자연스러웠다. 당시에 그는 낡은 관습 내에서 철학을 하고 있었고, 그가 한 발언의 전반적인 취지와 배경을 이해하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실 이 때는 그것이 그의 발언의 의미를 이해하는 것보다 덜 어려웠다. 그러나 후기에는 이것이 역전된다. 그가 하는 말을 이해하는 것은 더 쉬워졌지만, 그가 그런 말을 하는 목적을 이해하는 것은 더 어려워졌다. 그래서 철학자들이 그의 후기 작업에 당황하는 반면, 철학자가 아닌 사람들은 오히려 철학자만큼 당황하지 않는 경우가 종종 생긴다.


p.162
비트겐슈타인이 후기에 저술한 양은 엄청나며, 그 가운데 일부는 아직 출간되지도 않았다. 여기서 그의 주된 학설을 요약하려 해봤자 소용없는 일이다. 대신 가장 중요한 것 두 가지를 골라 논의해 보도록 하겠다. 이 장에서는 필연성에 대한 이야기를 할 것이며, 다음 장에서는 감각에 대한 이야기를 할 것이다. 이 두 가지 모두 그가 후기 철학에서 인간 중심주의로 이동한 것과 관련되어 있다. 이 이야기를 하다 보면 그의 방법론에 대해서도 좀 더 완전한 그림을 그려볼 수 있을 것이다. 



p.163-165
그의 [전기]이론은 모든 필연적 진리들은 항진식이거나, 분석에 의하여 항진식으로 환원할 수 있다는 것이다. 모든 필연적 진리를 단일하고 일관되게 설명하기 위한 이러한 이론 확장은 모든 사실적 명제들이 실제로 요소 명제들로 완전히 분석 가능할 때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었다..... 모든 사실적 명제들은 설사 아무도 그 환원방식을 파악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요소 명제들로 반드시 환원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이런 일반 이론에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러한 분석이 수행되는 정확한 방식에는 별 관심을 가지지 않았으며, 자신이 그런 분석을 수행할 수 없다는 데 대해서도 별 걱정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나중에 자신의 일반이론이 어떤 것을 요구하는가를 생각해 본 뒤에, 자기 이론이 그런 요구 조건을 충족시킬 가능성이 높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비트겐슈타인은 이론을 바꾸었다.... 『논리철학 논고』에서 그는 명제란 실재에 갖다 대고 측정을 할 수 있는 자와 같다고 말했다. 하나의 사물을 측정했을 때 그것이 하나의 길이를 가지고 있다면, 그 사물은 자에 표시된 다른 길이들은 가질 수 없다. 그의 새로운 관점에 따르면 색깔을 언급하는 요소 명제들은 자에 표시된 간격과 같은 것이며, 이 명제들의 전 체계도 자와 같은 것이다. 이렇게 되면 우리는 요소 명제들을 단독으로 실재에 적용하는 것이 아니라, 체계적으로 관련된 그룹의 한 요소로 적용하게 된다. 이것은 원자론에서 한 발 벗어나 전체론으로 나아가는 것이었다. ... 이 변화는 훨씬 더 큰 변화의 시작으로 볼 수도 있다. 비트겐슈타인은 본질주의적 언어 이론으로부터 연역을 하는 대신, 다시 언어에 대한 경험적 사실들에 주목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그의 철학적 방법론을 180도 바꿔버린 혁명의 시작이었다.
 


p.170-173
새로운 이론에 이르기 위해서는 논리적 필연성에 대한 초기 이론에서 얼마나 많은 부분을 빼내야 할까? 첫째는 물론 존재론을 없애야 했다. 그러나 그것을 없앤 데에는 다른 이유가 있었다. 논리적 진리들의 존재는 실재가 단순한 대상들로 이루어졌음을 드러낸다는 것이 『논리철학 논고』의 이론이었다. 그 이론은 본질주의적 공리와 가정들에 의존하고 있었는데, 그는 나중에 이런 공리와 가정들을 버렸다. 따라서 새로운 이론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지위에 대한 낡은 관점이 변해야 했다. 『논리철학 논고』에서는 다른 모든 것에는 인간 중심주의적인 기초를 제공했으면서도 논리적 진리에는 제공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는 논리적 진리에도 그것을 제공해야 했다. 그러나 논리학과 수학의 진리들이 인간 중심의 기초를 가지고 있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이 의미를 이해하려 하는 순간 우리는 현기증 나는 역설의 세계에 빠져들게 된다. 논리와 대수가 정말로 인류의 어떤 선택으로부터 발전해 나왔다는 뜻일까? 그렇다면 인류가 선택할 수 있었던 다른 대안에는 어떤 것이 있었을까? .... 그러나 실재론자는 이런 대안에 만족하지 않는다. 그는 논리학과 수학에서 옳고 그름의 다른 기준을 세울 수 있는 다른 선택이 있다는 생각 자체를 거부할 것이다. 실재론자는 이들 공식 각각에 대하여, 논리학자나 수학자가 그것을 참이나 거짓으로 만들어주는 근거를 실재 속에서 찾아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 주장은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비트겐슈타인은 어떻게 이것을 공격하면서도 부조리에 빠지지 않을 수 있을까? .... 놀랍게도 비트겐슈타인은 실재론자의 관점을 부정한다.



p.176-178
그[비트겐슈타인]는 논리학과 수학이 실재론적 기초에 의존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려 했던 것이 아니라, 그 기초라는 것이 논리학과 수학을 위한 어떤 독립적인 받침대를 제공할 수는 없다는 것을 보여주려 했을 뿐이다.... 비트겐슈타인은 모두가 안전하다고 느끼고 또 사실 가장 안전한 논리학과 수학이 사실은 위험한 위치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그런 이론을 제시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것들이 안전하다고 할 때, 무엇이 그것들은 안전하게 만들어주느냐 하는 것이다.... 아직 분명하게 이야기하지 않은 중요한...사실은 만일 논리적이고 수학적인 진리들이 승인을 받는다고 할 때, 그것들을 승인하는 것 외에 존립가능한 다른 대안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이야기가 설득력을 가질까? 실재론자들이 이렇게 주장한다고 해보자. 논리학과 수학의 진리들을 '승인'하는 것에 대한 존립 가능한 대안이 없는 것은 단지 그런 진리들을 거부하는 것이 잘못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그 진리들이 '승인'에 의존한다는 개념이 오류임을 보여준다. 비트겐슈타인은 이에 대한 대답으로 네 가지 점을 지적할 것이다. 첫째, 자동적이고 주저하지 않는 승인 역시 승인이라는 것. 둘째, 대안이 존립할 수 없다는 것은 단지 결과의 문제이며, 이것은 잘못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것. 그러나 셋째, 정상이 아닌 비승인 체계들이 우리의 옳고 그름의 기준에서 잘못되었다는 불가피한 결론에 이르렀다 해도, 우리는 이런 판단이 상호적인 것이며, 따라서 그런 판단을 통해 우리의 체계가 어떤 독립된 근거를 가지고 있음을 보여줄 수는 없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 따라서 넷째, 지금과 같이 합의된 승인들이 있다는 것은 단지 우연적 사실에 불과하며, 논리학과 수학은 이런 사실에만 의존하고 있을 뿐이라는 것.



p.180-183
비트겐슈타인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우리 감각을 표현하고 묘사하는]이 언어가 필연적으로 교육 불가능한 것은 아니며, 또 필연적으로 교육 불가능한 것일 리도 없다는 것이다.... 그가 이런 두 가지 점을 논증할 필요를 느꼈다는 것이 이상해 보일지도 모르겠다. 감각에 대한 언어는 사실 교육되고 있고, 세대에서 세대로 전수되고 있는 것이 분명해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비트겐슈타인이 우리 언어 가운데 이 부분이 실제로 교육된다는 것...을 의심하는 사람에게 반대하여 그런 주장을 펼치는 것은 아님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그는 하나의 철학적 이론에 반대하는 논증을 하고 있다. 비트겐슈타인은 그 이론에 따르면 감각에 대한 언어는 교육될 수 없고, 따라서 교육되지 않았다는 결론이 나온다고 본다. 이 이론을 'C'라고 부르고, 그 구체적인 내용에 대한 설명은 잠시 미루어두기로 하자... 이런 논쟁은 앞서 이야기했던 흄의 감각 이론과 똑같은 구조를 가지고 있다. 흄은 감각의 동일성의 기준을 물질적 대상의 동일성의 기준과 똑같은 것으로 생각했다.... 비트겐슈타인의 전체적인 생각은 분명하다고 할 수 있다. 감각을 물질적인 대상과 동일화하는 일을 너무 멀리까지 밀고 나아가면, 각 사람의 감각은 타자에게는 절대로 접근할 수 없는 것이 되며, 따라서 우리 언어 가운데 이 부분은 필연적으로 교육 불가능한 것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감각에 대한 담론과 물질적 대상에 대한 담론이 혼동되고 있으며, 이런 혼란은 관련된 논리적 공간을 넘어 새로운 가능성을 가리키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이, 혼란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것 외에 다른 것이 또 필요하다. 비트겐슈타인에 따르면, 그 혼란이 가리키고 있는 이른바 새로운 가능성을 검토하고, 그것이 진정한 가능성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줄 필요가 있다. 그래서 비트겐슈타인은 필연적으로 교육 불가능한 언어란 있을 수 없다는 그의 두번째 테제를 논증하는 일에 나서게 된 것이다.



p.184
우선 이 주제의 중요성, 그리고 이 주제가 철학사에서 차지하는 위치에 대해 이야기를 좀 할 필요가 있다.... 지금의 논의는... 인식론적 관점에서 사실적 지식의 기초와 관련된 것이다. 이 질문, 즉 그 기초들이 어디에 놓여 있느냐에 대해서는 철학자들이 다양한 방법으로 답을 해왔다. 어떤 철학자들은 기초적 명제들은 물질적 대상에 대한 것이라고 말했고, 또 어떤 철학자들은 그것은 감각, 또는 감각 자료...에 대한 것이라고 말했다.... 예를 들어 버클리(George Berkeley, 1685-1753)는, 지식의 직접적 대상은 '지각의 관념들'-또는 감각자료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물질적 대상의 속성들을 이런 감각 자료들로 옮기는 것을 얼마나 자연스럽게 생각했는지 놀라울 정도다. 그의 이론은 C의 완벽한 예이다.... 중요한 것은, 그[비트겐슈타인]가 거부한 이론[C]이 여러 형태로 표현되면서 데카르트 시대 이후로 지각 이론을 지배해 왔다는 사실이다.... 우선 그[비트겐슈타인]가 자신의 학설을 뒷받침하기 위해 사용하는 논증들은 감각을 물질적 대상과 지나치게 동일화하는 이론들만이 아니라, 감정, 욕망, 의도들을 이런 식으로 취급하는 이론들에도 대항을 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또 하나 지적해야 할 점은 의도라는 개념이 모든 의미의 중심에, 아니면 그 근처에라도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두 가지를 합치면, 비트겐슈타인 철학의 발전에서 새로운 학설은 그것이 후기의 의미 이론에 기여하기 때문에 중요하다고 말할 수도 있다. 의미는 의도와 연결되며, 의도는 공적 기준과 연결된다. 여기서 그의 후기 철학은 인간 중심적이기는 하지만 절대 유아론적이지는 않다는 결론이 나온다. 우리가 늘 돌아가야 하는 기준선은 공적 기준을 가진 공유된 언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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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소수민족입문
다바타 히사오 지음, 원정식 옮김 / 현학사 / 2006년 9월
평점 :
절판


중국 소수민족 관련해 이만큼 잘 정리해놓은 책도 없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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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 지배 동문선 현대신서 67
피에르 부르디외 지음, 김용숙 옮김 / 동문선 / 2003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영문번역본을 대조한 것이지만 책의 첫 문단만 옮겨본다.



머리말 첫문단, pp.7-8.


본 연구가 지닌 논리적 흐름에 나를 맡기지 않았다면, 나는 이처럼 어려운 주제를 감히 다루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이른바 공론의 모순(paradoxe de la doxa)이라 부르는 것에 대해서 놀라움을 금치 못했었다. 공론의 모순이라 함은 존재하는 그대로의 세상의 질서가 고유의 의미에서건 문체적 의미에서건 그 독특한 의미나 금지된 의미를 갖고 있으며 그 의무나 제재와 함께 대체적으로 존중되고 있어서 위반이나 전복, 범죄와 ‘광기’가 보다 더 팽배하지는 않다는 사실을 가리킨다. (바스티유 광장이나 콩코르드 광장 위에 자동차들이 5분 동안 달리고 있다고 가정하고, 그 수천의 각기 다른 성향들-혹은 의지들-이 기묘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음을 생각해보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은가.) 더욱 놀라운 것은 몇몇 역사적인 불의의 사건들을 제외하고 지배와의 관계들, 권리와 특혜, 그리고 그 특권과 불공평성을 가지고 세워진 질서가 그토록 쉽게 결정적으로 정착하여 존속되고 있으며, 가장 용납할 수 없는 존재 조건들이 마치 허용될 수 있는 것처럼, 당연한 것처럼 흔히 나타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또한 나는 남성지배 속에서, 그리고 그것이 강요되고 강요받는 방법 속에서 그러한 모순된 순종의 예를 줄곧 보아 왔다. 상징적인 폭력의 결과, 즉 부드럽고 느낄 수 없는, 희생자들에게조차도 보이지 않는 폭력의 결과가 그 예라 할 수 있으며 이는 의사전달과 지식, 정확하게 말해서 무지와 인식, 감정에 이르기까지 그 상징적인 경로에 의해 행해지는 폭력이다. 그리하여 불가사의하게 일상적인 이 사회적 관계는 피지배층에 의해서와 마찬가지로 지배층에 의해 알려지고 파악된 상징적 원칙하에 행해진 지배 논리를 감지하는 특권적 기회를 제공하는데 상징적 원칙이란 언어(또는 발음)와 생활양식(또는 사고방식, 언어 표현방식, 행동방식), 좀 더 보편적으로 말해 표징이나 낙인 같은 하나의 변별적 특성이며, 그 중 가장 효율적인 특성은 피부 색깔이라는 순전히 임의적이며 예고되지 않은 신체적 특성이다.



영문번역본

Pierre Bourdieu, 2001[1998], Masculine Domination, translated by Richard Nice, Stanford, California: Stantord University Press, pp.1-2


I would probably not have embarked on such a difficult subject if I had not been compelled to do so by the whole logic of my research. I have always been astonished by what might be called the paradox of doxa - the fact that the order of the world as we find it, with its one-way streets and its no-entry signs, whether literal or figurative, its obligations and its penalties, is broadly respected; that there are not more transgressions and subversions, contraventions and ‘follies’ (just think of the extraordinary concordance of thousands of dispositions - or wills - implied in five minutes' movement of traffic around the Place de la Bastille or Place de la Concorde...); or, still more surprisingly, that the established order, with its relations of domination, its rights and prerogatives, privileges and injustices, ultimately perpetuates itself so easily, apart from a few historical accidents, and that the most intolerable conditions of existence can so often be perceived as acceptable and even natural. And I have also seen masculine domination, and the way it is imposed and suffered, as the prime example of this paradoxical submission, an effect of what I call symbolic violence, a gentle violence, imperceptible and invisible even to its victims, exerted for the most part through the purely symbolic channels of communication and cognition (more precisely, mis-recognition), recognition, or even feeling. This extraordinarily ordinary social relation thus offers a privileged opportunity to grasp the logic of the domination exerted in the name of a symbolic principle known and recognized both by the dominant and by the dominated - a language (or a pronunciation), a lifestyle (or a way of thinking, speaking and acting) - and, more generally, a distinctive property, whether emblem or stigma, the symbolically most powerful of which is that perfectly arbitrary and non-predictive bodily property, skin colour.



부족한 나의 번역


전체적인 나의 연구논리를 따라 다루지 않을 수 없었던 게 아니었다면 나는 아마도 이토록 어려운 주제의 연구를 시작하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소위 독사의 역설(paradox of doxa)이라 하는 것, 이를테면 일방통행로와 통행금지 사인들에서, 직설적이든 비유적이든 그 의무와 벌칙들에서 우리가 발견하게 되는 것과 같은 세계의 질서가 더 많은 선넘기나 전복, 위반이나 ‘무절제’없이 폭넓게 존중되고 있다는 사실에 항상 놀라움을 금치 못하곤 했다(바스티유 광장이나 콩코르드 광장 주위로 5분 간 차량의 움직임 속에 담긴 수천가지 성향들-혹은 의지들-의 놀라운 일치를 한 번 생각해보라). 아니, 더 놀라운 사실은 권리와 특혜, 특권들, 불공정함들, 그 지배관계로 확립된 질서가 결국 몇몇 역사적인 돌발사건들의 경우를 제외하곤 그 자체로 그렇게 쉽게 영속한다는 것, 그리고 가장 견디기 힘든 수준의 실존조건들이 그렇게 자주 받아들여질만한 것으로, 심지어는 자연스러운 것으로 여겨질 수 있었다는 것이다. 나는 남성지배를, 그리고 그것이 부과되고 감내되는 방식을 내가 상징폭력-대개 커뮤니케이션과 인식(더 정확히는 오인), 재인, 더 나아가서는 감정의 순수하게 상징적인 경로를 통해 행사되며, 심지어 그 피해자들에게조차도 지각할 수 없고, 비가시적인 온화한 폭력-이라 부른 것의 한 효과인 이러한 역설적인 복종을 보여주는 최고의 사례로 여겨왔다. 따라서 놀라울 정도로 평범한 이 사회적 관계는 지배자들과 피지배자들 모두가 알고 인정하는 어떤 상징적 원리-어떤 언어(또는 발음), 어떤 생활양식(혹은 사고방식, 말하고 행동하는 방식)-의 이름으로, 그리고 보다 일반적으로는 (표장이든 낙인이든)어떤 구별적 속성-상징적으로 가장 강력한 속성은 완벽하게 자의적이고 비-예견적인 신체적 속성, 피부색이다-으로 행사되는 지배논리를 파악하기 위한 특별한 기회를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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