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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트겐슈타인 - 시공 로고스 총서 19 ㅣ 시공 로고스 총서 19
데이비드 피어스 지음, 정영목 옮김 / 시공사 / 2000년 4월
평점 :
절판
* 이 책을 다 읽었다면 '레이 몽크(Ray Monk)'의 『How to read 비트겐슈타인』(2007, 웅진지식하우스)을 읽도록 하자.
p.56-58
칸트가 하려고 했던 일은 사고의 한계선을 확정하는 것이었다. 비트겐슈타인이 하려고 했던 유사한 일은 언어의 한계를 확정하는 것이었다. 비트겐슈타인의 작업은 논리학의 기초에 대한 연구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자신은 두 과제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고 보았다. 논리학은 필연적으로 참인 모든 것, 또는 경험에 대해 미리 참이라고 말할 수 있는 모든 것, 옛날 용어를 쓰자면 선험적으로 참인 모든 것을 포괄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 자, 언어의 한계는 사고의 한계와 마찬가지로 필연적 한계여야 한다. 따라서 논리학에 대한 비트겐슈타인의 폭넓은 개념을 고려할 때, 그 한계를 확정하는 일은 논리학에 맡겨지게 된다. 이런 식으로 논리학의 기초에 대한 연구는 언어의 한계에 대한 연구를 포함하게 되었다.
『논리철학 논고』의 중심적인 논제는 모두 이 지점에서 시작되는데, 바로 이것이 칸트의 『순수이성 비판』과 구체적으로 닮은 부분이다. 사고의 한계선과 언어의 한계선은 그냥 우연히 그 자리에 놓여진 것이 아니다. 그들의 위치는 필연적으로 결정된 것이다. 따라서 칸트가 그가 획정한 한계선을 넘어선 곳에서는 사고가 필연적으로 중단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 것과 마찬가지로, 비트겐슈타인도 언어는 그가 정한 한계선에서 필연적으로 중단될 수밖에 없으며, 그 이상 나아가면 침묵밖에 있을 수 없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칸트의 한계선은 사실적 지식을 둘러싸고 있으며, 비트겐슈타인의 한계선은 사실적 담론을 둘러싸고 있다. 양쪽 경우 모두 사변적 형이상학과 결별함으로써 종교와 도덕은 취약한 위치에 놓이게 된다. 이 문제에 대한 비트겐슈타인의 해결책은 칸트의 해결책과 똑같지는 않지만 매우 흡사하다. 그는 종교와 도덕을 사실적 담론 밖에 두지는 않았다. 대신 그는 그것이 사실적 담론 안에 있으면서도 그 일부는 아니라는 수수께끼같은 이야기를 했다.
그러나 두 사람의 체계에는 몇 가지 커다란 차이가 있다. 한 가지는 앞에 말했듯이, 비트겐슈타인의 비판은 언어라는 매개를 통하여 사고를 간접적으로 비판한 것이라는 점이다. 또 하나, 앞서 말한 차이만큼 두드러지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중요한 차이는 칸트와 비트겐슈타인 둘 다 철학적 명제가 필연성의 영역에 속한다고 생각했지만, 그들은 철학적 진리만이 아니라 필연적 진리에 대해서도 생각이 매우 달랐다는 점이다. 비트겐슈타인은 모든 필연성은 논리적 필연성이며, 논리학의 필연적 진리는 모두 실체가 없는 항진식이라고 주장했다.... 전문적인 말로 하자면, 종합적인 선험적 진리는 없다는 것이다.... 칸트는 포괄적인 논리학 이론을 전개하지도 않았고, 항진식에 흥미를 느끼지도 않았다. 그는 무엇보다도 가능한 경험의 테두리 내에 실체를 가진 필연적 진리라는 것이 있다고 주장했다.... 칸트와 비트겐슈타인이... 필연적 진리의 본질에 대해서는 의견이 달랐다면, 그 결과 철학적 논증과 그런 논증으로 입증한 결과물에 대한 그들의 생각 역시 달랐을 것이 틀림없다. 구체적으로 무엇이 달랐을까? 짧은 대답으로는 모호함을 피할 수가 없다... 그러나 몇 가지 점에 대해서는 당분간 모호함을 벗어날 수 없다 해도, 이 주제에 대한 두 철학자의 생각을 전체적으로 비교해 보는 게 가치있는 일일 것이다.
p.161
그의 전기 철학을 해설할 때는 방법론보다는 학설에서 시작하는 것이 자연스러웠다. 당시에 그는 낡은 관습 내에서 철학을 하고 있었고, 그가 한 발언의 전반적인 취지와 배경을 이해하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실 이 때는 그것이 그의 발언의 의미를 이해하는 것보다 덜 어려웠다. 그러나 후기에는 이것이 역전된다. 그가 하는 말을 이해하는 것은 더 쉬워졌지만, 그가 그런 말을 하는 목적을 이해하는 것은 더 어려워졌다. 그래서 철학자들이 그의 후기 작업에 당황하는 반면, 철학자가 아닌 사람들은 오히려 철학자만큼 당황하지 않는 경우가 종종 생긴다.
p.162
비트겐슈타인이 후기에 저술한 양은 엄청나며, 그 가운데 일부는 아직 출간되지도 않았다. 여기서 그의 주된 학설을 요약하려 해봤자 소용없는 일이다. 대신 가장 중요한 것 두 가지를 골라 논의해 보도록 하겠다. 이 장에서는 필연성에 대한 이야기를 할 것이며, 다음 장에서는 감각에 대한 이야기를 할 것이다. 이 두 가지 모두 그가 후기 철학에서 인간 중심주의로 이동한 것과 관련되어 있다. 이 이야기를 하다 보면 그의 방법론에 대해서도 좀 더 완전한 그림을 그려볼 수 있을 것이다.
p.163-165
그의 [전기]이론은 모든 필연적 진리들은 항진식이거나, 분석에 의하여 항진식으로 환원할 수 있다는 것이다. 모든 필연적 진리를 단일하고 일관되게 설명하기 위한 이러한 이론 확장은 모든 사실적 명제들이 실제로 요소 명제들로 완전히 분석 가능할 때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었다..... 모든 사실적 명제들은 설사 아무도 그 환원방식을 파악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요소 명제들로 반드시 환원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이런 일반 이론에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러한 분석이 수행되는 정확한 방식에는 별 관심을 가지지 않았으며, 자신이 그런 분석을 수행할 수 없다는 데 대해서도 별 걱정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나중에 자신의 일반이론이 어떤 것을 요구하는가를 생각해 본 뒤에, 자기 이론이 그런 요구 조건을 충족시킬 가능성이 높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비트겐슈타인은 이론을 바꾸었다.... 『논리철학 논고』에서 그는 명제란 실재에 갖다 대고 측정을 할 수 있는 자와 같다고 말했다. 하나의 사물을 측정했을 때 그것이 하나의 길이를 가지고 있다면, 그 사물은 자에 표시된 다른 길이들은 가질 수 없다. 그의 새로운 관점에 따르면 색깔을 언급하는 요소 명제들은 자에 표시된 간격과 같은 것이며, 이 명제들의 전 체계도 자와 같은 것이다. 이렇게 되면 우리는 요소 명제들을 단독으로 실재에 적용하는 것이 아니라, 체계적으로 관련된 그룹의 한 요소로 적용하게 된다. 이것은 원자론에서 한 발 벗어나 전체론으로 나아가는 것이었다. ... 이 변화는 훨씬 더 큰 변화의 시작으로 볼 수도 있다. 비트겐슈타인은 본질주의적 언어 이론으로부터 연역을 하는 대신, 다시 언어에 대한 경험적 사실들에 주목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그의 철학적 방법론을 180도 바꿔버린 혁명의 시작이었다.
p.170-173
새로운 이론에 이르기 위해서는 논리적 필연성에 대한 초기 이론에서 얼마나 많은 부분을 빼내야 할까? 첫째는 물론 존재론을 없애야 했다. 그러나 그것을 없앤 데에는 다른 이유가 있었다. 논리적 진리들의 존재는 실재가 단순한 대상들로 이루어졌음을 드러낸다는 것이 『논리철학 논고』의 이론이었다. 그 이론은 본질주의적 공리와 가정들에 의존하고 있었는데, 그는 나중에 이런 공리와 가정들을 버렸다. 따라서 새로운 이론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지위에 대한 낡은 관점이 변해야 했다. 『논리철학 논고』에서는 다른 모든 것에는 인간 중심주의적인 기초를 제공했으면서도 논리적 진리에는 제공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는 논리적 진리에도 그것을 제공해야 했다. 그러나 논리학과 수학의 진리들이 인간 중심의 기초를 가지고 있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이 의미를 이해하려 하는 순간 우리는 현기증 나는 역설의 세계에 빠져들게 된다. 논리와 대수가 정말로 인류의 어떤 선택으로부터 발전해 나왔다는 뜻일까? 그렇다면 인류가 선택할 수 있었던 다른 대안에는 어떤 것이 있었을까? .... 그러나 실재론자는 이런 대안에 만족하지 않는다. 그는 논리학과 수학에서 옳고 그름의 다른 기준을 세울 수 있는 다른 선택이 있다는 생각 자체를 거부할 것이다. 실재론자는 이들 공식 각각에 대하여, 논리학자나 수학자가 그것을 참이나 거짓으로 만들어주는 근거를 실재 속에서 찾아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 주장은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비트겐슈타인은 어떻게 이것을 공격하면서도 부조리에 빠지지 않을 수 있을까? .... 놀랍게도 비트겐슈타인은 실재론자의 관점을 부정한다.
p.176-178
그[비트겐슈타인]는 논리학과 수학이 실재론적 기초에 의존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려 했던 것이 아니라, 그 기초라는 것이 논리학과 수학을 위한 어떤 독립적인 받침대를 제공할 수는 없다는 것을 보여주려 했을 뿐이다.... 비트겐슈타인은 모두가 안전하다고 느끼고 또 사실 가장 안전한 논리학과 수학이 사실은 위험한 위치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그런 이론을 제시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것들이 안전하다고 할 때, 무엇이 그것들은 안전하게 만들어주느냐 하는 것이다.... 아직 분명하게 이야기하지 않은 중요한...사실은 만일 논리적이고 수학적인 진리들이 승인을 받는다고 할 때, 그것들을 승인하는 것 외에 존립가능한 다른 대안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이야기가 설득력을 가질까? 실재론자들이 이렇게 주장한다고 해보자. 논리학과 수학의 진리들을 '승인'하는 것에 대한 존립 가능한 대안이 없는 것은 단지 그런 진리들을 거부하는 것이 잘못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그 진리들이 '승인'에 의존한다는 개념이 오류임을 보여준다. 비트겐슈타인은 이에 대한 대답으로 네 가지 점을 지적할 것이다. 첫째, 자동적이고 주저하지 않는 승인 역시 승인이라는 것. 둘째, 대안이 존립할 수 없다는 것은 단지 결과의 문제이며, 이것은 잘못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것. 그러나 셋째, 정상이 아닌 비승인 체계들이 우리의 옳고 그름의 기준에서 잘못되었다는 불가피한 결론에 이르렀다 해도, 우리는 이런 판단이 상호적인 것이며, 따라서 그런 판단을 통해 우리의 체계가 어떤 독립된 근거를 가지고 있음을 보여줄 수는 없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 따라서 넷째, 지금과 같이 합의된 승인들이 있다는 것은 단지 우연적 사실에 불과하며, 논리학과 수학은 이런 사실에만 의존하고 있을 뿐이라는 것.
p.180-183
비트겐슈타인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우리 감각을 표현하고 묘사하는]이 언어가 필연적으로 교육 불가능한 것은 아니며, 또 필연적으로 교육 불가능한 것일 리도 없다는 것이다.... 그가 이런 두 가지 점을 논증할 필요를 느꼈다는 것이 이상해 보일지도 모르겠다. 감각에 대한 언어는 사실 교육되고 있고, 세대에서 세대로 전수되고 있는 것이 분명해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비트겐슈타인이 우리 언어 가운데 이 부분이 실제로 교육된다는 것...을 의심하는 사람에게 반대하여 그런 주장을 펼치는 것은 아님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그는 하나의 철학적 이론에 반대하는 논증을 하고 있다. 비트겐슈타인은 그 이론에 따르면 감각에 대한 언어는 교육될 수 없고, 따라서 교육되지 않았다는 결론이 나온다고 본다. 이 이론을 'C'라고 부르고, 그 구체적인 내용에 대한 설명은 잠시 미루어두기로 하자... 이런 논쟁은 앞서 이야기했던 흄의 감각 이론과 똑같은 구조를 가지고 있다. 흄은 감각의 동일성의 기준을 물질적 대상의 동일성의 기준과 똑같은 것으로 생각했다.... 비트겐슈타인의 전체적인 생각은 분명하다고 할 수 있다. 감각을 물질적인 대상과 동일화하는 일을 너무 멀리까지 밀고 나아가면, 각 사람의 감각은 타자에게는 절대로 접근할 수 없는 것이 되며, 따라서 우리 언어 가운데 이 부분은 필연적으로 교육 불가능한 것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감각에 대한 담론과 물질적 대상에 대한 담론이 혼동되고 있으며, 이런 혼란은 관련된 논리적 공간을 넘어 새로운 가능성을 가리키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이, 혼란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것 외에 다른 것이 또 필요하다. 비트겐슈타인에 따르면, 그 혼란이 가리키고 있는 이른바 새로운 가능성을 검토하고, 그것이 진정한 가능성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줄 필요가 있다. 그래서 비트겐슈타인은 필연적으로 교육 불가능한 언어란 있을 수 없다는 그의 두번째 테제를 논증하는 일에 나서게 된 것이다.
p.184
우선 이 주제의 중요성, 그리고 이 주제가 철학사에서 차지하는 위치에 대해 이야기를 좀 할 필요가 있다.... 지금의 논의는... 인식론적 관점에서 사실적 지식의 기초와 관련된 것이다. 이 질문, 즉 그 기초들이 어디에 놓여 있느냐에 대해서는 철학자들이 다양한 방법으로 답을 해왔다. 어떤 철학자들은 기초적 명제들은 물질적 대상에 대한 것이라고 말했고, 또 어떤 철학자들은 그것은 감각, 또는 감각 자료...에 대한 것이라고 말했다.... 예를 들어 버클리(George Berkeley, 1685-1753)는, 지식의 직접적 대상은 '지각의 관념들'-또는 감각자료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물질적 대상의 속성들을 이런 감각 자료들로 옮기는 것을 얼마나 자연스럽게 생각했는지 놀라울 정도다. 그의 이론은 C의 완벽한 예이다.... 중요한 것은, 그[비트겐슈타인]가 거부한 이론[C]이 여러 형태로 표현되면서 데카르트 시대 이후로 지각 이론을 지배해 왔다는 사실이다.... 우선 그[비트겐슈타인]가 자신의 학설을 뒷받침하기 위해 사용하는 논증들은 감각을 물질적 대상과 지나치게 동일화하는 이론들만이 아니라, 감정, 욕망, 의도들을 이런 식으로 취급하는 이론들에도 대항을 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또 하나 지적해야 할 점은 의도라는 개념이 모든 의미의 중심에, 아니면 그 근처에라도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두 가지를 합치면, 비트겐슈타인 철학의 발전에서 새로운 학설은 그것이 후기의 의미 이론에 기여하기 때문에 중요하다고 말할 수도 있다. 의미는 의도와 연결되며, 의도는 공적 기준과 연결된다. 여기서 그의 후기 철학은 인간 중심적이기는 하지만 절대 유아론적이지는 않다는 결론이 나온다. 우리가 늘 돌아가야 하는 기준선은 공적 기준을 가진 공유된 언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