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쿠라 진다 - 전후 70년, 현대 일본을 말하다
우치다 타츠루.시라이 사토시 지음, 정선태 옮김 / 우주소년 / 2019년 5월
평점 :
절판


p.90-93


우치다 나의 아버지는 중국에서 오랫동안 머물렀습니다. 그러나 전후 중국에 있었을 때의 이야기는 결코 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 경험을 말로 표현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중국에 강한 부채감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일본과 중국이 국교를 회복하자 중일우호협회의 회원이 되어 중국인 유학생을 받아들이기도 하고 취직하는데 보증을 서기도 했습니다. 집으로 불러 식사를 대접하기도 하고 돈을 빌려준 적도 있었지요. 어머니가 “우리도 힘든데 왜 그렇게 중국인을 챙기는지 원” 하면서 볼멘소리를 해도 아버지는 아무 말이 없었습니다. ‘중국인에게는 갚을 수 없을 정도의 빚을 졌다’는 감정이 아버지에게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중국에 있을 때 도대체 무엇을 경험하고 중국인에게 어떤 빚을 졌는지는 끝내 말해주지 않았습니다. 만년에 딱 한 번 짧은 에세이에서, 예전에 베이징에서 살았던 집 근처를 다시 찾았을 때의 이야기를 했지요. 그 글에서 중국인 두 명의 실명을 거론하면서 “그들은 나의 벗이었다는 이유로 살해되었다. 중국인은 일본인인 나에게 보여준 아량을 일본인과 어울려 지낸 동포에게는 베풀지 않았다”고 썼습니다. 두 줄 정도의 문장인데, 내가 아는 한 아버지가 중국에서 무엇을 경험했는지 말해준 딱 한 번의 회상이었습니다. 


 전중 세대가 갖는 대중(對中)감정은 많든 적든 비슷하리라 생각합니다. 홋타 요시에(堀田善衛)처럼 패전 직전에 건너간 사람이라면 방관자 입장에서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아버지처럼 만주사변 전부터 만주에 있었던 일본인은 입이 찢긴대도 말할 수 없는 일을 많이 보았겠죠. 자신들의 식민주의적 행동, 중국인이나 조선인을 차별했던 감정에 관해서도 ‘절대 말하지 않고 무덤까지 갖고 가겠다. 다음 세대에게는 전할 수 없다’는, 어떤 의미에서 세대적인 결단을 한 것처럼 보입니다. 이런 더러운 기억은 죽을 때까지 말하지 않겠노라고 생각했을 겁니다. 


 사후 약방문일지도 모르지만 뱃속에 품고 무덤까지 가져갈 게 아니라 모조리 말해버렸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생각하기도 합니다. “이런 일이 있었다”, “이런 짓을 했다”고 말이지요. 하지만 입을 꾹 다물고 있었습니다. 물론 결코 자기 변호나 자기정당화를 위해서만 한 일은 아니었겠죠. ‘더러운 역할’은 자신들이 떠맡고 아이들 세대는 ‘깨끗한 손’을 갖게 해서, 전후 일본에서 민주주의의 기수가 되게끔 하겠다는 애틋한 계획을 갖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시라이 씨 세대가 들으면 놀라겠지만 실제로 우리 세대가 어렸을 때 학교 선생님은 진지하게 “너희들은 민주주의의 자식이다. 모든 전쟁 책임으로부터 결백한 너희들이 일본의 미래다”라고 늘 말했습니다. 이처럼 우리 세대는 전쟁에 “전혀 책임이 없다”는 말을 앞선 세대로부터 되풀이해 들어왔습니다. 그랬던 까닭에 그로부터 50년이 지나 이웃나라 사람이 “전쟁 책임을 어떻게 다룰 생각이냐?”고 따지고 들면 깜짝 놀라곤 했지요. 참으로 미안한 얘기지만 이런 상황은 전쟁 세대가 전쟁에 관하여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세상을 떠난 데 따른 부정적인 귀결입니다. 


p.99-100


우치다 무라카미 하루키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중국행 슬롯보트』 이래 줄곧 중국과 관련한 ‘껄끄러운’ 문제를 다루고 있지요. 그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말할 수 없는 까닭에 그 이후 모든 경험의 의미를 결정짓는 트라우마로서의 중국 체험을 이야기합니다. 무라카미도 아버지가 중국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고 일본으로 돌아온 후 중국 경험은 전혀 말하지 않고 그저 사자(死者)들의 넋을 위로하는 기도만 계속했다고 합니다. 이처럼 자식 세대는 아버지의 침묵을 유언처럼 물려받았습니다. 작가 자신은 경험조차 못 한 일이 트라우마가 되어 작가의 글쓰기에 강한 영향을 미치고 있지요.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중국인에 대한 트라우마를 문학적 주제로 잡으면서 무라카미 하루키의 세계성이 구축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중국인에 대한 전후 일본인의 ‘입장 없음’을 적절하게 그려냈기 때문에 중국에서도 압도적 인기를 누리고 있지요. 


p.94-96


시라이 결국 이러한 봉인도 영속패전 체제로 지켜질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직면하지 않아도 상관없는 구조가 갖추어져 있었던 셈이지요. 만약 그렇지 않았더라면 조부모 세대는 내키지 않더라도 말해야 했을 터입니다. 하지만 더 이상 없었던 일로 미룰 수가 없습니다. 그런 시대에 들어서고 말았습니다. 


.....


 얘기를 듣다 보니까 떠오르는 다큐멘터리 영화가 있습니다. <행군하라, 신의 군대여!>에서 오쿠자키 겐조가 야마다 요시타로에게 전쟁 당시 남태평양 제도에서 인육을 먹었던 일과 관련하여 증언을 요구하는 장면입니다. 야마다 씨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런 얘기를 다시 꺼내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저 지옥을 어렵사이 빠져나온 후 나를 포함해 모두가 전후에 많은 고통을 맛보았고, 지금은 어쨌든 보잘것없지만 행복하게 살고 있다. 그런데도 당신은 왜 굳이 저 지옥의 일을 다시 파헤치려 하는가?” 야마다 씨의 심정은 어떤 의미에서 지극히 당연합니다. 그러나 오쿠자키 씨는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결국에는 때리려는 자세까지 취하면서 증언을 요구합니다. 시민적 상식에 비춰보면 오쿠자키 씨는 미친 사람입니다. 하지만 야마다 씨는 결국 설득되어 너무나 고통스러운 기억을 꺼내놓습니다. 그때 그의 표정은 정말 감동적입니다. 귀신에게 홀린 듯한 표정을 하고 있지요. 지금 역사수정주의의 충동에 사로잡혀 있는 일본인은 말하자면 기억을 말하기 전의 야마다 씨와 같은 상태라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하기 싫은 이야기는 꺼내기가 괴롭겠지만 그렇게 하고 나면 반드시 효과가 있습니다. 


p.107-111

시라이 ‘영속패전’이 어떤 개념인지 『영속패전론』의 내용을 요약하는 식으로 말씀드려보겠습니다.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일본 입장에서는 패배의 형태로 전쟁이 마무리됐습니다. 그런데 전후 일본은 그 순전한 패배, 이의의 여지가 없는 패배를 속여왔습니다. 저는 이것을 ‘패전의 부인’이라 부릅니다. 


 왜 패전을 부인해야만 했을까요? 전쟁을 이끌었던 사람들이 전후에 또다시 지배적 지위에 계속 머물렀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큰 잘못을 저질렀으므로 본래대로라면 그런 지위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패전 사실을 가능한 한 애매모호하게 처리해야 했죠.


 그렇다면 왜 그런 일이 가능했을까요? 미국이 원했기 때문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기 전부터 냉전 구조가 형성되고 있었습니다. 미국은 일본을 자유주의 진영에 붙들어 두어야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러면 누구에게 일본 통치를 맡기겠습니까? 일단 좌익은 제외입니다. 일본이 소련 진영으로 내달릴지도 모르니까요. 또 하나 선택지는 이전의 파시스트입니다. 미국 입장에서 보면 파시스트든 좌익이든 별 볼 일 없기는 마찬가지이나 그들은 파시스트 쪽이 낫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결과 전전의 보수 세력이 계속해서 권력의 자리에 머무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전후 일본은 민주 국가가 되었다고들 얘기하지만 허구입니다. 일본을 패전으로 이끈 무리가 그대로 머물렀고 계속해서 후계자들이 권력의 자리를 지키면서 현재까지 어어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런 나라에 진짜 민주주의 따위는 있었을 리가 없습니다. 


 이러한 비판을 다양한 사람이 여러 차례 되풀이해왔습니다. 저의 작업도 그 연장선상에 있습니다. 바꿔 말하면 낡은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그런 이야기는 이미 낡았다”며 그냥 끝낼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비판은 새로운 채 영원히 계속되며 그 자체가 바로 일본 전후 시대의 본질이기 때문입니다. 


 안에서는 패전을 속이고, 미국에는 아무 조건없이 항복했습니다. 두 손 두 발 다 들었죠. 일본의 보수 정치 세력은 미국의 허락 아래 권력의 자리에 머무를 수 있었던 터라 미국에 감히 맞설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대미 종속 구조를 형성한 근본 원인입니다. 이리하여 일본은 미국에 영원히 질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입니다. 


 한편 국내에서는 패전을 속였다고 했는데 어떻게 했을까요? 아시아 여러 나라에서 패전한 사실을 감추는 방법입니다. 일본이 침략했던 중국과 식민 지배했던 한반도에 대해서는 오만한 태도를 취해왔지요.


 이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냉전 구조입니다. 미국은 일본을 파트너로 취급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바꿔 말하면 보호해야 할 대상이었습니다. 다른 하나는 전후 일본이 경제적으로 성공했으며 특히 공업생산력이 아시아에서 두드러졌다는 점입니다. 아시아 국가들로서는 전후 일본의 태도에 불만은 있었지만 돈이 아쉽다 보니 강하게 이의를 제기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결국 체면이 깎이지 않는 선에서 타협하고 열매를 취한다는 방침을 선택하게 되었죠.


 그러나 이러한 영속패전 구조도 1990년을 전후로 유통기한이 끝납니다. 냉전이 끝났기 때문에 미국 입장에서는 일본을 아시아의 가장 중요한 파트너로 여길 필요가 없게 되었죠. 다른 한편으로 중국이 성장하면서 국력의 차이도 좁혀졌습니다. 물론 한국의 성장도 두드러집니다. 이리하여 영속패전 체제를 지탱하고 있던 두 개의 기둥이 모두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그런데도 아직껏 영속패전 체제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최근 20년 동안 우리는 하늘에 붕 떠 있는 상태였습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 공중을 걷고 있지요. 하지만 언젠가 반드시 추락하고 맙니다.


p.112-114


우치다 대미 종속과 대미 자립은 모순되지 않습니다. 전후 일본 외교 전략의 기본은 ‘대미 종속을 통한 대미 자립’이었습니다. 대단히 교묘했지만 일본인은 그다지 위화감을 품지 않았습니다. 나는 앞에서 이것을 ‘분점 전략’이라 불렀습니다. 그런대로 일본인에게 ‘유전자’처럼 이어져오는 좋은 이야기지요. 어떤 의미에서 일본인에게 가장 전통적 프로모션 형식이니까요.


 기노시타 도키치로(木下藤吉郞)가 주군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의 짚신을 품어 따뜻하게 하자 눈치 빠른 사내라 하여 총애를 받습니다. 그 후 그는 하시바 히데요시(羽柴秀吉)로 이름을 바꾸고 다시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가 되지요. 이처럼 ‘윗사람의 총애를 받아 입신출세하는’ 것이 일본인에게는 정통적 경력 쌓기 방법입니다. 강자에게 철저히 충의를 다해 이루어진 이해관계의 완벽한 일치를 과시함으로써 독립을 획득합니다. 종속성을 강조함으로써 독립성을 획득하는 프로모션 형식을 서구인은 선뜻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일본인은 별다른 위화감 없이 받아들입니다.


 따라서 역대 일본 총리가 미국 대통령과 친밀한 표정으로 찍은 사진을 보면 ‘주인과 지배인’이 찍은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풍자 미디어에서 일본 총리를 ‘강아지’나 다름없다고 조롱하기도 합니다만 일본의 경우, 충견의 충성심을 움직이는 것은 ‘하루라도 빨리 주인으로부터 떨어져 나오고 싶다’는 마음입니다. 하지만 주인은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하지요. 그런데 애견이 필사적으로 매달리는 행동을 보고 ‘일찍 주인 곁을 떠나고 싶어서 그렇다’고 해석하는 것도 무리입니다. 


 전후 70년 동안 일본이 지켜온 국가 전략의 기본은 ‘대미 종속을 통한 대미 자립’입니다. 미국에 착 달라붙어 모든 정책을 지지하고 이해관계의 일치를 강조하며, 모든 주요 정책을 미국이 결정하도록 하는 등 철저하게 종속적 태도를 취해 ‘미국에 관한 일 말고는 뭐든 결정할 수 있는 나라’로 가는 로드맵입니다. 이러한 전략의 합리성을 이해하는 자는 일본인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전후 일본 정치가는 모두 이러한 양가감정을 견뎌왔습니다. 자그마치 70년이나 이런 태도를 보여왔으니 우리도 익숙해졌겠지요. 다른 아시아 사람이나 유럽인 관점에서 보면 뭔가 섬뜩한 광경이겠지만 이러한 ‘분점 전략’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p.118-121


시라이 그렇다면 냉전 구조가 사라진 후에도 대미 종속이 계속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멈추기는커녕 점점 더 심각해지고 있습니다. 종속 상태가 아니라 완전한 속국이지요.


 그렇게 된 배경의 핵심은 천황제라고 생각합니다. 영속패전 구조는 전후의 국체(國體)입니다. 전전의 천황제가 모양만 바꿔 전후에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권력이 기능하는 방식에서 유사성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메이지 헌법하 전전의 통치 시스템을 보면 헌법의 표현상 모든 권한을 천황이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천황의 의사에 따라 위대한 정치를 펼친다는 것이었지요.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천황이 처음부터 끝까지 신경을 쓸 수 없는 노릇이기 때문에 신하가 천황의 뜻을 헤아려 실제의 정치를 행합니다. 이것이 보필 또는 익찬(翼贊)이라 불린 행위입니다. 그러면 그때 천황의 뜻이라는 게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일종의 블랙박스입니다. 신하가 결정한 일을 천황이 백팔십도 다른 방향으로 변경하기란 근본적으로 불가능합니다. 역설적이게도 대체로 유력자들이 실질적인 결정을 내렸습니다. 끝내 군부의 독주로 치닫고 마는 쇼와 시대 전기의 정치적 혼란은 이러한 블랙박스 구조와 관련되어 있었습니다. ‘이것이 천황의 뜻’이라고 꾸며서 기정사실인 것처럼 날조합니다. 그래도 천황은 승인할 수밖에 없습니다. 블랙박스 자체는 텅 빈 그릇과 같기 때문에 아무거나 밀어 넣을 수 있습니다. 보필이나 익찬이라는 이름 아래 신하가 제멋대로 할 수 있는 구조였지요.


 그렇다면 전후에는 어떠했을까요. 천황이 차지하고 있던 자리에 워싱턴이 들어갑니다. 워싱턴의 마음을 보필하고 익찬하는 일이 일본 통치 기구가 해야 할 첫 번째 임무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미국의 뜻이 뭔지 잘 알 수가 없습니다. 미국인도 잘 모릅니다. 미국에도 다양한 정치 세력이 있어서 서로 충돌하기도 하고 경쟁하기도 하면서 최종적으로 국가의 의사를 내놓습니다. 이런저런 우연성도 끼어들기 마련이지요. 그런데 일본에서는 비즈니스, 엔터테인먼트, 정치, 학술 그 어떤 세계에서든 “미국에서는 이런 것이 유행하고 있습니다. 이제부터 미국은 이렇게 될 것입니다. 미국은 지금 이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등등의 언설이 각각의 권력과 결부됩니다. 검증할 수 없기 때문에 “아, 그렇습니까”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전후 일본의 보필 방식입니다. 


 그런 방식일망정 전후 몇십 년 동안은 별 탈 없이 통용되었지요. 냉전 구조 아래에서 미국과 일본은 이해관계의 방향성이 기본적으로 일치했기 때문에 파괴적 모순은 발생하지 않았고, 추측은 대체로 맞아떨어졌습니다. 그런데 냉전이 끝나면서 미국의 생각과 일본의 추측이 어긋나기 시작합니다. 그것을 가장 선명하게 보여주는 예가 오바마 대통령과 아베 총리의 인간관계일 겁니다. 전후 역사에서 이렇게 노골적으로 미국의 국가원수가 일본의 국가원수에게 혐오감과 경멸감을 드러낸 일은 이례적입니다. 문제의 핵심은 역시 역사 해석이지요. 아베 입장에서는 우리가 바라는 이 정도의 역사 해석은 너그러이 봐주리라고 생각했을 터입니다. 그러나 미국 쪽에서는 아시아를 팽팽한 군사적 긴장 상태로 몰고 갈 수도 있는 역사 해석은 절대로 용납하지 않겠다는 자세를 확실하게 보여줬습니다.


p152-155


우치다 그들이 무의식 속에서 갈망하고 있는 시나리오는 조금 전에도 얘기했습니다만 센카쿠에서 충돌이 일어나 일본인 모두가 들고 일어서는 경우라고 봅니다. “자, 중국하고 한판 붙자!”는 말이 나오면서 국민은 미친 듯한 흥분 상태에 빠지겠죠. 물론 일본 국민은 당연히 미일 안전보장조약 제5조에 따라 미군이 출동하여 자위대와 함께 중국 인민해방군과 싸워주리라 기대할테죠. 하지만 미군은 출동하지 않습니다. 뭐가 아쉬워서 그렇게 하겠습니까. 암초 하나 때문에 미국의 병사가 죽음을 무릅써야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으니까요. 그러나 일본인은 분노합니다. “센카쿠는 안보조약의 적용 범위라고 하지 않았느냐!”며 미국의 식언(食言)을 비난하면서 말이죠. 한편, 미국은 애당초 진심으로 안보조약을 적용할 마음이 없었습니다. 다만 그런 식으로 말해두면 중국이 군사적 진출을 삼갈 것이라고 생각하고 큰소리쳤을 뿐이지요. 그래서 “약속대로 안보조약을 발동할 생각은 충분히 있지만 중국과 전쟁을 하려면 의회의 의결이 필요하다. 중국 시장에 의존하는 기업이나 중국에 생산 거점을 둔 기업에도 ‘여러분 회사의 수익이 격감하고 해외자산도 줄어들 텐데 그래도 괜찮겠습니까?’라고 물어보아야만 한다. 국내 여론을 ‘전쟁을 해도 좋다’는 방향으로 이끌기 위해서는 상당히 많은 시간이 걸린다”고 핑계를 대면서 출병을 차일피일 미룹니다. 그러면 일본인은 화를 내며 “미국은 왜 군대를 보내지 않느냐? 70년 동안이나 기지를 제공하고 ‘배려 예산’을 들여가며 실컷 놀고먹게 해놨더니 결국 이렇게 나온단 말이냐!”고 하겠죠.


 미국이 가장 두려워하는 시나리오입니다. 미군은 일본과 중국 사이에 군사적 마찰이 발생한다 하더라도 출동하지 않습니다. 미국은 중국과 싸워서 얻을 수 있는 이익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만약 미국이 중국에 선전포고를 하지 않는다면 일본 국내 여론은 하룻방 사이에 ‘반미’로 돌아서 버리고 말 겁니다. 전후 70년간 ‘대미 종속을 통한 대미 자립’노선을 아무 생각없이 걸어온 일이 얼마나 무의미한지를 전 국민이 알아채는 거죠. 바로 그때 오랫동안 억압되고 은폐되어 온 일본인의 반미 감정이 한꺼번에 분출합니다. ‘안보조약 즉시폐기, 주일 미군 기지 즉시 철거, 자주적 핵무장’과 같은 위세 좋은 슬로건을 마구 흔들어대는 사람들이 등장하고요. 미일 안보란 공염불에 지나지 않았다는 사실이 밝혀진다면 그러한 슬로건에 반대하지도 않을 겁니다. 그렇다면 “세계가 모두 적이다. 중국이든, 한국이든, 북한이나 미국 모두 덤벼라! 똘똘 뭉쳐 전쟁에 나가자!”처럼 상식을 벗어난 말에 국민이 열광하기 시작하겠죠. 뭐 그렇게 기이하고 기발한 얘기도 아닙니다. 바로 옆에 북한이라는 모델이 있지 않습니까. 일본을 북한식으로 끌고 가면 됩니다. 북한보다 돈이 있고, 기술이 있고, 병력도 부족하지 않기 때문에 북한보다 훨씬 더 ‘남들이 두려워하는’ 나라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게 당연할 테죠.


 “여러분, 일본을 북한과 같은 나라로 만드는 게 어떻겠습니까? 핵무장을 하고 징병제를 실시하면 주변 아시아 국가들을 다시 짓밟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한다면 그 누구로부터도 두 번 다시 모욕당할 일은 없을 겁니다.” 이런 망언을 들으면 마음이 흔들려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들이 나오기 마련입니다. 


 “그래, 그렇게 하는 것이 좋겠다. 오늘의 일본보다 훨씬 낫다. 과연 ‘전후 체제로부터의 탈각’이란 일본의 ‘북한화’를 뜻하는 바였어. 바로 이것이 ‘아름다운 나라’의 실상이었다”며 기뻐할 국민이 나옵니다. 반드시 나올 겁니다. 


 이런 시나리오는 확실히 일리가 있습니다. 북한보다 훨씬 경제력이 좋고 인구도 많을 뿐만 아니라 기술력도 뛰어난 나라가 ‘북한 같은 나라’가 되어 고슴도치처럼 주변을 향해 날카로운 털을 곤두세우면 지금까지 일본을 ‘겁낼 필요 없다’며 업신여겼던 나라들도 움찔할 것입니다. ‘일본인을 지나치게 몰아붙이면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모른다’는 식의 평가를 얻을 수도 있습니다. 아베가 꿈꾸는 미래가 바로 ‘남들이 두려워하는’ 일본 아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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