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어 잘 하는 법 이와나미 시리즈(이와나미문고) 4
지노 에이이치 지음, 김수희 옮김 / AK(에이케이)커뮤니케이션즈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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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본문 중 더글러스 러미스의 『이데올로기로서의 영어회화』 중 일부분이 인용되어 있는데 깊이 공감이 가 옮겨본다.


마지막으로 영어회화가 얼마나 커뮤니케이션의 장벽이 되고 있는가에 대해 언급하겠다. 물론 영어회화를 공부한 사람들은 역으로 가는 방향을 묻거나 사고자 하는 물건의 가격을 묻는 것에는 능숙하지만 그것은 내가 다루고자 하는 커뮤니케이션의 종류가 아니다. 도대체 어찌해서 영어회화가 장벽으로서 작용하는지를 이야기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지만 그것은 특정 내용을 이해하기 이전에 뭔가를 느낄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라고 해도 좋을지 모르겠다. 하나의 일화를 들어보겠다.
5년 전, 한해를 마감하는 어느 마지막 밤이었다. 한밤중에 나는 가나자와(金澤)에 있는 어떤 절의 경내에서 커다란 종이 울리는 것을 들으며 서 있었다. 그 해 겨울 첫눈은 몇 시간 동안 계속해서 내리고 있었고, 신년은 마치 신세계처럼 새하얗고 환상적으로 그 자태를 드러내고 있었다. 내가 거대한 종의 장엄한 울림에 귀를 기울이고 있자 한 남자가 다가와 물었다.
"죄송합니다만 영어로 당신에게 말을 걸어도 괜찮을까요?"
순간 복잡한 생각이 내 마음을 가득 채웠지만 "물론입니다"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그는 틀에 박힌 질문 리스트를 나에게 쏟아 부었다.
"어디에서 왔나요?"
"일본에 얼마만큼 있었지요?"
"가나자와에서 관광을 하고 있는 건가요?"
"이 의식이 뭔지 아나요?"
그의 질문은 의식 무드에 흠뻑 잠겨 있던 나를 흔들어 깨우고, 종소리와 차가운 공기 내음으로부터 나를 밀어제치고, '쇄국'이라는 침투 불가능한 벽 저쪽으로 몰아넣었다.
그의 말은 "I have a book"과 마찬가지로 상황에 어울리지 못했다. 그가 했던 말은 모두 진정으로 나에게 하고 싶었던 말이 아니었다. 그가 나의 대답에 진정 흥미를 가지고 있던 것도 아니었다. 그는 나에게 말을 걸었던 것이 아니라 나란 존재가 마침 그에게 생각나게 했던 '외국인'이라는, 그의 마음속의 뻔한 대상을 향해 말을 걸었을 뿐이다. 나에게 말을 걸고 있었던 것은 그 자신도 아니었다. 그가 암기했던 문장은 틀에 박힌 문구였으며 그 문장과 그 자신의 성격, 생각이나 느낌과의 사이에 뭔가의 관련이 있다고 믿기는 어려웠다. 그것은 그저 두 개의 음성자료 사이에 행해진 회화였다.
마침내 그가 사라지고 내가 불쾌해하고 있는 것을 멀리서 지켜보고 있던 한 남자가 다가와 다정하게 미소를 지으며 일본어로 나에게 말해주었다. "저런 식으로 영어를 말하는 일본인은 일본에 대해서 잘 모르니까 듣지 않는 편이 나아요." 나는 엄청난 감사의 마음이 밀려와 웃기 시작했다. 쇄국의 벽은 다시금 허물어졌다.(148-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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