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랑이성의 마법사
루이스 새커 지음, 김영선 옮김 / 창비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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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험과 사랑, 역풍을 맞았지만
: 루이스 새커, 『호랑이성의 마법사』 (창비)

고전 동화를 읽은 느낌이라면 이런 걸까. 형용할 수 없는 감정들을 느꼈다. 모든 작품에서 부정하다가 결국 인정하고야 마는 사랑을 만나버린 것 같다.
1523년 르네상스, 에스콰베타 왕국은 몰락의 위기에 처해서 툴리아 공주를 옥사타니아 왕국의 나이 많은 달림플 왕자와 정략 결혼을 시키려고 한다. 이 둘의 정략 결혼은 어렸을 때부터 정해졌다. 순탄하게 결혼까지 이어지면 굳이 이 책이 세상 밖으로 나올 필요가 없다. 툴리아 공주가 견습생 필경사 피토와 사랑에 빠지고 나서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이 이야기는 호랑이성의 마법사 ‘아나톨‘에 의해 더 빠르고 몰입감 있게 전개된다. 툴리아 공주와 피토의 관계를 알게 된 왕은 툴리아가 달림플 왕자와 무사히 결혼을 할 수 있도록 하는 물약을 만들도록 아나톨에게 지시하고, 피토를 감옥에 가두고, 달림플 왕자의 요구대로 피토를 처형할 것을 명령한다. 툴리아가 어렸을 때부터 지켜보고 알고 지내왔던 아나톨은 공주를 배신할 수 없다. 그래서 툴리아와 피토에게 서로에 대한 기억을 지우는 물약을 만들어 마시게 만든다. 물약을 만들고 마시게 하는 과정에서 아나톨은 피토와 대화를 나누면서 피토가 죽게 내버려둘 수 없는 존재가 되어버린다. 아나톨은 둘에게서 서로의 기억을 지우는 동안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해내고 만다. 그러나 상황은 아나톨과 툴리아, 피토가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예상하지 못했던 사건들이 일어나면서 셋은 정치적 음모와 언제까지 쫓길지 알 수 없는 불안을 피해 탈출을 감행한다. 탈출에 완벽하게 성공했다고 볼 수 없는 건 그들이 언제 어디서 궁 사람들에게 발각될 위기에 처해 있기 때문이다. 어찌저찌 수도원에서 당분간 지내게 된 셋을 보면 언제 들킬지 모르는 불안감이 없지 않아 있지만-봄이 오면 끊겼던 발걸음이 이어지니까- 로브 속에 머리부터 발끝까지 감춘 그들이 가장 안전하게 느껴진다. 로브 밖에서는 여러 죄목에 뒤엉켜 고통스러운 소리를 내며 죽게 되는 운명이니까. 왕을 속이고 정략 결혼을 파토내고, 탈출을 감행했으니.
셋의 위험하면서도 서로가 있어서 다행인 관계가 참 잔인하다고 생각했다. 누구 하나 놓을 수 없는 관계만큼 무겁고 잔인한 관계가 있을까. 툴리아와 피토는 서로에게 어울리지 않는다. 둘이 살고 있는 시대에서는 말이다. 공주와 필경사라니. 가장 처절하고 애달픈 사랑은 계급이 다른 이들의 사랑인 것 같다. 계급을 떼고 나면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 이들. 왕의 명령은 잔인하다. 감정은 가장 투명하고 변덕이 심한 것인데, 그것을 지우라니. 그 명령을 따라야만 하는 아나톨은 당황스럽고 슬펐을 것이다. 자신도 툴리아와 피토처럼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으니까. 아나톨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둘을 지켜냈다.(적어도) 위대한 마법사 아나톨이 만든 물약을 만든다고 해도, 그 물약으로 서로를 품었던 기억이 지워졌다고 해도 감정만큼은 완벽하게 지워지지 않았을 것이다. 아나톨의 물약을 피해 숨은 감정이 두 사람 깊은 어딘가에 살아 숨쉬고 있다가 기회를 엿보고 폭발할 수 있을 것이다. 내 바람이기도 하고, 아나톨이 이뤄졌으면 하는 반전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아나톨은 진짜 위대한 마법사다. 먼 미래까지 내다보고 계산하여 둘의 사랑을 진심으로 응원한 그 시대의 사랑꾼이었을지도 모르고.
삶과 사랑의 역풍을 맞은 공주 툴리아와 필사경 피토의 모험과 사랑 이야기를 아나톨의 시점으로 들을 수 있어서 더 와닿았다. 아나톨의 삶이 참 매력적이게 느껴진다. 아나톨이 들려준 이야기는 오랫동안 세계 곳곳에서 많은 독자에게 기억되고, 입에서 입으로 전해질 것이다. 전해지는 과정에서 아나톨은 가장 위대한 마법사와 유머를 놓치지 않는 마법사라는 수식을 제대로 갖게 될 것이다. 툴리아와 피토가 아나톨과 헤어지고 나서 어떻게 되었는지 전혀 알 수 없지만 잘 지냈기를, 쫓김에서 자유로워져 서로의 감정을 온전히 받아들이진 못해도 그 감정을 속이지 않았기를 바랄 뿐이다. 전 세계에서 꾸준히 사랑받고 있는 청소년 작품의 작가인 루이스 새커를 <호랑이성의 마법사>를 통해 알게 되어 반갑다. 그가 낸 작품을 손꼽아 기다리며, 나는 알지 못한 그의 세계에 천천히 발을 들일 것이다. 설레고도 긴장되는 순간이 내게 찾아온 것이다. 세계에서 사랑받는 이유를 그의 세계에서 찾아내어 사랑 하나 더해도 좋을 것 같다. 툴리아와 피토의 사랑만큼은 아니지만.

★ 이 책은 서평단 활동을 위해 창비에서 받았습니다: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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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능력자 - 제12회 교보문고 스토리대상 우수상 수상작 책깃노블
함설기 지음 / 책깃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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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설기 장편소설, 『이상능력자』 (가제본 서평단 / 창비)

‘이상능력자‘라는 표현 자체가 불편하게 느껴졌다. 초능력자의 깊은 이야기를 알고 나서는.
초능력자를 격리해야 한다고, 초능력자를 극도로 싫어하고 혐오하는 수안이 초능력자가 되었다. 생각지 못 한 상황에 놓인 수안은 당황스러움을 느끼기도 전에 자신의 능력을 쓰는 상황에 여러 번 놓이게 되고, 엄마 죽음의 진실에 다가간다. 수안이가 초능력자를 멀리하고 격리해야 한다고 외치며, 극도로 싫어하는 이유는 잘 알겠다. 초능력자의 폭발로 엄마가 죽었다면, 나라도 초능력자를 세상에서 격리해야 한다고 앞장서서 외치고 다녔을 것이다. 초능력자의 인권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고, 무고한 시민들의 목숨을 앗아갈 수 있는 이들의 인권이 있는 것 자체를 비웃을 것이다. 초능력자가 된 수안은 피해자면서도 동시에 잠재적인 가해자가 된다. 초능력자가 될 거라고 상상이나 했겠나. 초능력자는 계속해서 늘어나는데, 어떻게 초능력자가 되는지 초능력자가 되기 전에 보이는 조짐은 무엇인지 등등 초능력자에 대한 정보는 많이 부족해 보인다. 초능력자를 극혐하고, 거리를 두는 시민들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나 초능력자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불안감과 자신으로 인해 누군가 죽을 수 있다는 두려움을 안고 살아가야 하는 데, 그 삶이 참 안타깝다. 국가에서 초능력자와 시민들이 공존할 수 있는 방법을 찾기 보다 초능력자의 격리를 제시했고, 격리로 인해 서로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겼고 격리가 방법이 되지 않자, 초능력자를 다시 사회로 보냈다. 보냈기보다는 나 몰라라한 것이다. 휴양림 참사에서 많은 초능력자와 그들을 위해 일하는 사람들이 죽었다. 격리로 폭발을 막을 수 없다고 판단한 후, 정부에 초능력자임을 등록하지 않으면 처벌을 받을 수 있는 강요적인 등록제를 실시한다. 휴양림 참사로 초능력자가 전원 사망했다고 밝혔지만 능력으로 참사가 일어나기 전에 그곳을 빠져나온 초능력자들이 적지 않다. 그 초능력자들은 자신의 존재를 들키지 않기 위해 숨어 지내다가 정부가 전원 사망이라고 낸 소식 이후 진짜 정체를 숨기고, 사회 속으로 숨어 들어 지내기 시작했다. 휴양림 참사로 많은 초능력자가 죽었지만 초능력자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이 바뀐 것은 아니다. 여전히 초능력자는 따가운 시선과 날 선 말들을 들어야 했고, 가장 괴로운 건 가해자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어쩌다 초능력자가 되었는지 알지 못한 채 하루 아침에 가해자, 살인자로 불리며 살아가야 할 운명을 당사자들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본인이 그 입장이 되어 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것들을 수안은 자신이 초능력자가 되고 나서 아주 짧은 시간에 많은 것을 알게 된다. 초능력자를 증오했지만 이젠 본인이 초능력자로서 삶을 살아야 한다니, 수안은 막막하고 억울하기까지 할 것이다. 어쩌면 수안은 초능력자로 살 운명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초능력자로 살기 시작한 수안의 처음은 위태롭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초능력자로 살아가야 하는 수안은 초능력자의 편에 서서 수안을 편 들어준 염정우와 수안처럼 초능력자인 텔레포트 남예리(남민하 팀장 동생)와 함께 여러 사건을 겪고, 숨겨져 있던 진실에 다가간다. 그 진실이 수안에게 무엇을 가져다 줄지 알 수 없지만, 이제와서 진실을 파헤치길 멈추는 건 불가능하다. 너무 깊이 들어왔고, 수안의 엄마가 말한 ‘공존’을 이끌어 내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공존을 위한 희생이었다고 보기 어렵지만, 공존이 이루어진다면 폭발로 인한 죽음과 자살로 인한 죽음이 아주 조금은 위로가 되지 않을까 감히 바란다. 죽음 앞에서는 그 어떤 것도 위로가 되지 못할 걸 알지만, 뭐라도 해야 하는 것은 남겨진 사람들의 책임이고 몫이다. 수안이가 초능력자로 살아가게 된 삶도.
넘겨야 할 페이지를 얼마 남지 않았을 때 생각했다. 수안이가 생각했던 것보다 자신이 초능력자라는 사실을 금방 받아들였다고. 짧게 느껴질 만큼 수안에게 순식간에 많은 일이 벌어지긴 했다. 수안이 콘크리트보다 더 단단한 초능력자 격리와 혐오에 대한 생각에 변화를 일으킨 일들은 앞으로 수안이 초능력자로 살면서 수없이 겪을 일이면서 동시에 초능력자들이 겪고 싶지 않은 일이기도 하다.
엄마가 죽었던 장소에 가게 된 수안. 진실에 다가설수록 위험이 따랐다.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긴장의 끈을 놓을 수가 없었다. ‘헐, 설마? 진심? 아니야.‘라는 말이 나도 모르게 입밖으로 튀어나와 허공에 잠깐 떴다가 금방 사라졌다. 발 묶여 있을 시간이 없었다. 이어질 이야기가 궁금하고, 상황이 이렇게까지 된 이유를 사건의 숨겨진 진실을 더 알고 싶었기 때문이다. 형사를 사칭해서 숨겼던, 앞으로도 숨기고 싶은 진실을 숨기기 위해 수안 엄마를 죽인 진범이 수안까지 죽이려고 한 장면에서 ‘그럼 그렇지.‘라는 말이 나도 모르게 튀어나왔다. 수안은 다른 방법이 있을 거라고 했지만 또다시 자신의 비밀을 지키기 위해 과거에 저지른 일과 같은 일을 또 저질러 버린 진범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진범은 42를 지키기 위해 저질렀던 일, 자신을 지키기 위해 저질렀던 일, 그리고 수안을 죽이려고 한 일까지 너무 많은 죄를 저질렀다. 진범이 할 수 있는 최선이 타인의 죽음뿐이었을까? 자신이 휴양림 참사에서 살아남은 초능력자라는 사실이 밝혀지면 또다시 끌려가 어딘가에 갇힌 채 지내야 하는 등 자유롭지 않고 괴로운 생활을 할 거라는 두려움이 저지르지 말아야 할 일을 저지르게 만든 걸 안다. 하지만 과거나 지금이나 진범은 합리화한 것뿐이다. 누군가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위해 결국 누군가의 죽음을 최선이었다고 핑계대는 것이다. 수안 말대로 방법은 있다. 방법을 찾기까지 오래 걸리고 변수가 발생하고, 최악으로 희생이 뒤따를 수도 있다. 더 최악인 것은 어렵게 찾거나 만든 방법이 역할을 해내지 못 할 수도 있다. 그런데 직접 마주하지 않고는 어떻게 될지 모르는 것이 세상일이다. 진범에게 최선이지만, 오히려 초능력자에 대한 격리와 혐오만 늘어났다. 수안 엄마와 남민하 팀장처럼 초능력자를 생각하고 위하는 사람들이 분명 방법을 찾아냈을 것이다. 진범이 감정적으로 어리석은 행동을 하지 않았다면 가족을 잃어 초능력자를 혐오하며 긴 시간을 보내고 초능력자가 되어서야 그들의 삶을 살면서 느낀 것들에 지난날의 자신을 한심해 하는 수안도, 자신의 정체를 밝히고 그동안 짊어졌던 죄책감을 조금 덜어보고자 용기를 냈지만 결국 죽었고 누군가의 깊고 무거운 원망을 오랫동안 들어야 했을 42번도 없었을 것이다. 진범이 할 수 있는 최선이었고, 그렇게까지 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은 알지만 나는 그를 탓한다. 언젠간 밝혀질 일이 두려워서 저지른 일들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할 때가 왔다. 본인이 수안을 먼저 불러낸 것이 실수였다고 생각할 것이다. 수안이 자신처럼 능력을 가진 초능력자라는 것을 모르고 불러내 일을 저지른 진범이 맞이할 최후는 그동안 부단히 노력해서 지켜온 자신의 비밀이 까발려지고, 누군가의 가슴에 평생 고통스러운 상처일 것이다. 진범을 용서할 수 없지만, ‘그때 격리가 아니라 다른 방법이 있었다면? 초능력자 격리와 혐오를 줄일 수 있는 방법이 진짜 없었을까?‘와 같은 지난날을 원망하는 마음이 불쑥불쑥- 고개든다. 초능력자들이 짊어지고 살아야 하는 것들은 상상한다고 이해되는 것도 아니어서 감히 상상하길 멈췄다. 초능력자들이 자신의 능력을 누군가를 해치기 위함이 아니라 누군가를 구하기 위해 쓰일 수 있을 텐데. 이 부분은 초능력자가 아닌 이들의 두려움과 분노, 원망 등으로 만들어져 굳어진 시선과 마음, 그리고 시민과 초능력자의 공존이 아닌 시민들의 불안과 공포에 휩쓸려 오히려 불안과 공포를 키운 정부의 형편없는 대응을 꼬집어야 한다. 늦었지만 바로 잡아야 한다. 초능력자가 줄어드는 게 아니라 늘어나고, 완벽하게 시민과 초능력자를 분리할 수 있는 게 아니라면 ‘공존’의 방법을 찾아내야만 한다. 공존만이 함께 살 길이다. 초능력자에 대한 시민들의 인식 변화가 우선이다. 초능력자의 능력이 위험한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깨달을 필요가 있다. 시민의 위험 부담이 더 큰 건 사실이나, 초능력자가 악의로 해치기 위한 것은 아니라는 걸 알아야 한다. 공존에 닿기까지 실수와 문제 등이 발생하겠지만 시민과 초능력자가 서로를 적으로 두지 않고 함께 안고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은 직접 부딪치는 수 밖에 없다. 이 과정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공존을 위한 희생이었다고 말하고 싶지 않지만, 적절한 표현을 찾지 못해서 희생이라고 하겠다. 희생으로 서로를 향한 반감이 더 날설 확률이 높지만 현재나 미래를 위해 꼭 해야 할 일이다.
수안이가 초능력을 갖게 된 이유는 분명히 있다. 이유를 찾고, 능력을 어떻게 쓸지 선택하는 건 수안 본인 몫이다. 수안이 폭발하고 모든 세상이 달라졌다. 초능력자의 폭발로 인해 엄마를 잃게 되어 그들을 격리해야 한다고 외치고 혐오한 수안이는 초능력자가 되어 자신이 그들에게 했던 언행을 그대로 돌려받게 되었다. 시민과 초능력자의 삶을 모두 살아본 수안은 자신이 갖고 있는 능력을 통해 무엇을 하고 싶을까? 엄마를 잃고 이모의 보살핌 아래 지내고 있는 수안은 자신의 투정을 받아줄 품 넉넉한 어른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새벽 일찍 나가 밤 늦게 일하고 들어오는 이모한테 미안함을 가지고 있다. 우정과 예리를 만나기 전에는 이대로 있다가 죽어버려도 좋겠다고 생각할 만큼 자포자기한 상태였다. 그러나 우정과 예리를 만나면서, 초능력자가 되어 짧은 시간 많은 일을 겪으면서 수안에게 변화가 생긴다. 내 마음을 울렸던 건 진범의 밀침에 수안이 밖으로 떨어질 때, 우정과 예리를 떠올리고 살고 싶은 마음을 드러내는 장면이다. 수안이 폭발로 초능력을 갖지 않았다면 오랜 시간 걸렸을 깨달음이다. 그토록 혐오했던 초능력이 수안을 살린 것이다. 수안에게 초능력과 초능력자는 지독한 애증의 대상이다. 앞으로 초능력자로 어떤 삶을 살지 수안이 스스로 선택할 것이다. 위험 부담이 큰 능력을 어떻게 쓸지도.
초능력을 소재로 스토리를 구상한 작품은 아주 많아서 특별하지 않았다. 초능력이라는 소재는 오래전부터 신성함을 잃었다. 신선함을 끌어올리기 위해서는 반드시 시선을 사로잡는 히든카드가 있어야 한다. <이상능력자>에서 히든카드를 ‘수안‘이라고 생각했다. 시민과 초능력자로 모두 살아본 사람만이 보여줄 수 있는 현실. 그녀가 보여주고 들려주고 말할 수 있는 거짓없는 현실. 다른 작품에서도 이런 설정은 쉽게 찾아볼 수 있어서 신선함을 끌어올리는데 맞지 않을 수 있지만, 진실을 향해 포기하지 않고 다가가는 수안처럼 함설기 작가가 수안의 설정을 통해 자칫 진부하고 유치한 스토리로 전락할 수 있는 <이상능력자>를 나누고 생각하할 거리가 많은 스토리로 만들었다. <이상능력자>를 읽고 난 후,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읽었는지, 어떤 부분에 초점을 맞췄는지’ 등 생각을 나누고 싶다고 생각했다, 아주 오랜만에.
만약 내가 폭발한다면? 만약 누군가의 폭발로 가족을 잃게 되면? 등등. 수많은 물음표 앞에서 내가 망설임 없이 대답할 수 있는 건 하나도 없었다. 시민의 삶, 초능력자의 삶 그 어떤 삶에 대해서도.

★ 이 가제본은 서평단 활동을 위해 창비에서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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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수의 칼날은 차갑게 1
조 애버크롬비 지음, 배지혜 옮김 / 황금가지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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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수는 절대 끝나지 않는다. (완벽한 복수, 복수의 끝은 존재하지 않는다.)
: 조 애버크롬비 장편소설, <복수의 칼날은 차갑게1> (황금가지)

차가운 복수와 그 피로 물든 시대의 이야기를 읽는 동안 ‘복수‘가 도대체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했다. 몬즈카로 ’몬자‘ 머카토, ‘카프릴의 도살자‘라 불리운 냉혹한 용병대장이다. 하지만 그녀는 가장 믿었던 이들(오르소 공작, 공작의 아들, 간마크 등) 의 배신으로 모든 것을 잃고 산산조각이 난 채 죽음의 벼랑 끝에 버려졌다. 냉혹한 용병대장이라는 수식이 한몫 한 걸까 온몸이 부서졌지만 목숨은 끊기지 않았다. 잃을 게 없는 이의 복수가 가장 무섭다고 했던가, 모든 것을 잃고 파괴된 몬자는 이제 ’복수‘, 단 하나의 불꽃으로 살아난다. 권력에 대한 끝없는 욕망, 돈을 향한 맹목적인 탐욕, 그리고 씁쓸한 후회로 뒤덮인 인물들이 얽히고설키며 피바람을 일으키는 복수극이 시작된다. 몬자의 복수의 칼날은 오롯이 복수의 불꽃을 일으킨 이들에게만 향할지, 계획한 대로 복수가 이루어질지, 복수의 끝에 몬자는 어떨지, 모든 것을 잃어버린 그녀의 복수는 얼마나 차갑고 잔인할지 기대되는 ’다크 판타지 대가’ 조 애버크롬비의 인기작이 드디어 국내 첫 출간되었다. 이 책을 통해 다크 판타지 장르에 대한 이해와 관심을 높일 수 있으면 좋겠다. 판타지를 단일 장르라고 생각했는데, <복수의 칼날은 차갑게1>을 통해 ’다크 판타지’를 만날 수 있어서 판타지 장르를 좋아하는 나는 여러모로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
몬자라는 여성 캐릭터가 매력적이다. 냉혹한 용병대장이라는 수식이 참 매력적이다. 그녀가 걸어온 삶을 전면적으로 보여준다. 몬자가 그동안 오르소 공작을 위해 뛴 전투나 거마쥔 승리는 내가 이뤄낸 것도 아닌데 같은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벅차고 어깨가 들썩거릴 만큼 힘이 들어간다. 몬자의 칼날에서 자유로운 목숨은 없다는 것이 섬뜩하면서도 몬자의 존재를 굳건히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섬뜩하게 느껴지는 것만도 아니다. 몬자는 오르소 공작을 위해 승리를 거머쥐고, 몬자의 삶이 파괴된 이날도 여느 날과 다르지 않게 기쁜 소식을 들고 오르소에게 향했다. 그날은 어째서 몬자가 불길함을 느끼지 못한 건지, 늘 하던 승리이고 이어지는 과정이라서 방심한 건지 몬자는 온몸이 부서지고, 삶을 완전히 파괴한 배신을 경험한다. 바로 믿었던 이들의 배신이다. 그들은 동생 베나를 그녀가 보는 앞에서 잔인하게 죽이고, 몬자를 무참히 짓밟고 찔러 짐짝 버리듯 창밖으로 버렸다. 죽음의 벼랑 끝에서 살아남은 몬자가 할 일은 단 하나다. 복수. 몬자는 동생을 잃음과 동시에 카프릴의 도살자라고 불리는 용병대장에 맞는 날렵한 몸이 완전히 부서졌다. 더이상 잃을 게 없는 그녀가 해야 하는 복수가 그녀가 당한 만큼 잔인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복수는 또다른 복수를 불러오지만 동생을 잃고 배신 당한 그녀는, 차라리 죽는 게 나을 만큼 몸이 망가진 그녀를 살리는 건 복수다. 그녀의 복수에 감정이 단 한 방울이라도 보이지 않았으면 좋겠지만, 불가능하다. 동생이 죽는 것을 두눈으로 본 순간부터 몬자에게 이성으로 움직이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자신을 배신한 그들을 속이고 완전한 복수를 하기 위해서는 이성적으로 움직여야 하며 실수가 있어서는 안 되고, 언제든 위험에 빠질 수 있기 때문에 경계와 의심을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 몬자의 복수를 베나는 바라는지, 지금 몬자를 보고 베나는 무슨 말을 할지 궁금하다. 확실한 건 몬자의 곁에는 아무도 없다는 것이다.
베나가 죽임을 당하고 몬자가 믿었던 이들에게 배신 당하는 모습은 내 몸이 일그러진 것처럼 몸 곳곳에 통증이 느껴지는 듯 했다. 그만큼 잔혹했다. 전투 장면은 두말 할 것도 없이 생생하고 강렬했으며, 잔혹하고 속도감 넘친다. 빠르게 이어지는 전투 장면에서는 숨을 참고, 전투 장면 이후 숨을 몰아쉬어야 할 정도였다. 생생함과 속도감이 맞물리니까 두통이 일었다. 조 애버크롬비가 보여주는 ’차가운 복수와 피로 물든 시대‘의 무대는 잔혹하면서도 어두운 유머 곳곳에서 피어나 시선을 뗄 수 없게 만든다.
망가진 몸으로 혼자 복수를 할 수 없던 몬자는 복수를 위해 사람을 모으기 시작한다. 모은 사람들도 하나같이 각자 사정이 있다. 사정보다는 세상에 소외된 사람들이라는 표현이 맞겠다. 마치 몬자의 삐걱거리는 몸처럼 그들은 세상에 속해서 어울리지 못하고 겉돌다가 끝내 소외되었다. 몬자는 복수를 위해 그들을 고용했고, 돈 혹은 다른 이유로 그 복수에 함께 하기로 한 이들의 기묘한 동행은 멀리서 보면 그럴 듯 해보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이런 비극도 없다. 이 복수의 끝에서 괜찮은 결말을 맞을 사람은 거의 없다. 인생 자체가 전투였던 이들은 몬자의 복수 끝에는 죽음 혹은 도망, 은신 등 뿐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응한 것 같다. 처음에는 돈이지만 복수의 칼날이 목표를 향해 겨눠지고, 목표를 냉혹하게 처리할 때마다 피로 물든 자신의 몸과 칼을 볼 때마다 원래 목표(돈)는 잊히고 어느새 복수의 일원이 되는 것이다. 피로 물든 복수는 또다른 복수를 불러오는데 복수를 시작한 이상 멈출 수 없다. 멈추는 순간 복수를 시작한 이들이 죽게 되니까. 복수에 발을 들인 이상 그 누구도 괜찮은 결말을 맞을 수 없다. 복수를 당할 뻔 했다는 걸 알고 가만히 살려둘 이가 누가 있겠는가, 자신의 자리를 위협할까봐 두려워서 끝까지 아군으로 뒀어야 할 몬자와 베나를 배신한 오르소와 그의 사람들처럼. 죽일 거면 제대로 죽여야 했다, 몬자가 어떤 사람인지 알면서 그녀의 죽음을 너무 하찮게 여긴 오르소와 그의 사람들은 방심했다. 권력에 먼 눈을 가진 이들의 두려움이 아군을 배신했고, 그 배신으로 복수라는 불꽃을 피워낸 몬자가 겨눈 칼날에서 자유롭지 않을 것이다. 몬자를 완벽하게 죽였다고 생각한 그들은 자신들의 목숨을 계획적으로 서서히, 노리는 칼날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다. 권력을 손아귀에 넣고 싶어 하는 것치고는 너무 느린 그들의 결말이 벌써부터 그려진다, 고통스럽게 일그러지면서 살려 달라고 울부짖는 모습 아니면 보잘 것 없이 허무하게 죽는 모습. 문득 든 생각이다, 배신은 살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차버리는 것이라고. 몬자의 칼날은 정확히 배신한 이들의 심장을 겨누고 있고, 그 칼날에서 자유로울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상기한다.
카도티의 별장(시파니, 안개와 속삭임의 도시)에서 오르소 공작의 아들들인 아리오 왕자와 포스카 왕자를 죽일 계획이지만 어떤 변수가 생길지 알 수 없어서 경계와 신중을 놓아서는 안 된다. 그들을 죽이고 나면 오르소 공작은 몬자가 죽지 않고 살아 있다는 것을 알 것이다. 아니면 그 사이에 몬자의 복수를 오르소에게 전달한 이가 생길 수도 있다. 처참히 배신 당한 몬자가 온몸에 피를 두른 채 오르소 자신의 꿈에 나오지 않았을 때 한 번이라도 의심해야 했다. 자신이 그녀의 목숨을 하찮게 여긴 것이 아들들을 죽이고 자신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것이라고 후회해도 이미 늦었다. 후회보다 앞선 건 분노겠지만. 몬자의 시체를 찾아 직접 두눈으로 확인하고 완벽하게 처리했어야 했다는 것을 깨닫고 고통 속에서 후회하고 원망하다가 볼 품 없는 결말을 맺을 것이다. 그에게 어울리는 끝일까? 몬자는 그에게 어떤 결말을 선물해줄까? 그를 죽이는 것만으로도 완벽한 복수라고 볼 수 있을까? 베나의 죽음, 자신과 베나를 배신한 것에 대한 복수가 그들의 죽음으로 된 걸까? 도대체 진정한 복수는 무엇일까? 피는 피로 되갚는 것이 복수인지 문득 의문이 들었다. 베나를 위해 복수한다고 하지만, 베나는 이미 죽었고 그들을 죽인다고 해서 베나가 살아서 돌아오는 것을 아니다. 결국 시버스가 말한 것처럼 이 복수는 ‘몬자 자신‘을 위한 것이다. 물론 베나를 위한 것도 있지만 일부이다.
복수의 칼날은 뜨겁기 마련인데 어째서 차가운 건지 생각했다. 처음에는 뜨거웠다. 하지만 복수의 칼날이 배신자를 하나씩 베고, 남은 배신자들에게 다가갈수록 칼에 묻은 피는 식어서 굳고, 칼날은 카프릴의 도살자라고 불리는 냉혹한 몬자만큼 차가워졌다. 감정적으로 시작한 복수가 점점 이성을 찾기 시작했다. 불필요한 피는 보지 않고 목표만 겨냥한다. 그래도 불필요한 죽음을 피할 수는 없다. 복수와 전쟁은 언제나 그렇다. 괜찮은 엔딩을 맞을 이들이 몇 이나 될지 알 수 없지만 없지는 않을 것이다. 몬자의 칼날은 망설이는 법이 없고, 실수 따위는 하지 않으니까. 복수의 끝을 향해 달려가는 몬자를 보니 베나가 자꾸 생각난다. 베나가 곁에 있었다면 어땠을까 싶어서. 베나가 있었다면 차가운 피로 물든 복수도 없겠지만.
복수가 진행되어 가고 있는데 전혀 뭔가 채워지거나 만족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복수를 계획한 몬자부터 그녀의 복수를 위해 모인 이들이 모두 절망이 가득하다. 몬자는 복수의 끝을 향해 달려가면서 잃어버린 것, 가질 수 없는 것으로 인해 빈 자신이 채워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걸까? 그녀의 진심을, 그녀의 생각을 전혀 모르겠다. 복수를 하려는 것말고는 아무것도 그녀에 대해 아는 게 없다. 복수의 끝을 향해 달려가는 그녀가 불안하고 공허해보일 뿐이다. 그녀가 할 수 있는 복수 뿐이라는 사실이 안타깝다. 복수의 끝에서 그녀는 어떤 모습일까? 머리부터 발끝까지 지워지거나 가려지지 않는 피가 묻어 있을 거고, 잔인한 피 비린내가 아주 진득히 베어 있을 것이다. 복수의 끝이 몬자의 허탈함 뿐일까봐 겁난다. 냉정하고 겁 없는 그녀가 모든 걸 잃은 순간 한 번 무너졌고, 복수 이후에 무너진다면 쉽게 일어설 수 없을 것 같다. 복수는 그렇다. 복수는 성공과 실패, 이분법적으로 나눌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그녀의 복수 과정을 통해 알게 되었다. 복수가 복수를 낳고, 복수를 하는 과정이 너무 힘들다. 힘든 과정에서 얻는 건 완벽한 복수를 한 것이 아니라 허무함과 충격, 그리고 자신이 잃는다는 게 많다는 것뿐이다. 그녀 복수의 끝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 허무하고 역한 냄새가 진동할 것 같다. 그녀가 복수를 한 것이 잘못이라고 생각하지 않지만 그녀의 삶이 안타까울 뿐이다, 피로 물든 삶이. 안타까운 그녀의 삶에서 그녀를 지킨 것이 칼과 배신, 분노, 복수라는 사실은 한동안 몬자를 떠올리는 나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 것이다. 그럼에도 그녀의 복수가 그녀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고, 그녀를 죽음에서 끌어올린 힘이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몬자가 복수 끝에는 행복했으면 좋겠는데, 그건 나의 말도 안 되는 바람일까. 아마 머카토 몬자는 누구보다도 자신의 끝을 잘 알고 있어서 나의 바람을 속으로 품는 것조차 미안하다.

˚₊· 🩸 ˚₊· 🗡️ ˚₊· 🌬️ ˚₊· 🏰

★ 이 책은 서평단 활동을 위해 ‘황금가지’에서 받았습니다:)

📚 황금가지 : 도서를 받은지 오래되었는데 이제야 서평을 남겼습니다. 기한을 지키지 못 한 점 진심으로 죄송합니다. 장편소설인데, 영화 한 편을 본 기분이었습니다. 영화로 나와도 많은 사랑을 받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복수’가 사람을 무섭고 잔인하게 만들 수 있음을 봤습니다. 몬자가 겪은 배신, 망가진 몸, 그리고 배신에 맞는 복수를 하기 위한 위험한 이들과의 동행. 모든 장면이 인상 깊었습니다. 계속 복수가 무엇인지 생각하고 또 생각했지만, 복수에 대한 저만의 정의조차 내리지 못했습니다. 아마 복수를 하게 될 일이 생긴다면(그러지 않아야겠지만), 몬자의 복수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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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도 그럴 거야 - 제1회 길벗어린이 민들레그림책상 대상 인생그림책 48
나현정 지음 / 길벗어린이 / 202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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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도 그럴 거야, 충분히
: 나현정 그림책, 『내일도 그럴 거야』 🦆 🦫 🐌 (길벗어린이)
: 제1회 길벗어린이 민들레그림책상 대상

반가웠다. 이런 그림책은 오랜만이라서. 오리와 두더지, 달팽이가 함께 하루를 보내면서 나누는 대화인데 다정하고 따뜻했다. 평소에 이런 말들을 나누고 듣고 싶었던 건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서로를 위하는 마음이 참 예뻤다.
자기만의 감자가 있다는 것은 참 특별한 일 같다. 당연히 사람은 각자 다르니 자기만의 무언가를 가지고 있겠지만, 그걸 알고 누군가 알아주고 함께 나눌 수 있다는 건 행복하고 특별하고 감사한 일이다. 이 일이 오리와 두더지, 달팽이에게는 일어난 것이다. 서로가 있기에 셋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하루를 보낼 수 있었다. 셋을 보면 서로를 위하는 마음을 표현하는 것을 어색해하거나 피하지 않는다. 낯간지러운 말이기도 하는 말들을 낯간지럽지 않게 서로 주고받는 모습이 내내 인상적이었다. 어딜 가나 휴대폰에 고개를 박고만 있는 사람들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세상이 살기 편해졌지만, 편해진 만큼 잊히고 잃는 것들이 너무 많다. 잊히고 잃은 것들이 너무 많다는 사실마저 알지 못하는 우리가 안타깝다고 생각했다. 오리와 두더지, 달팽이는 차를 끓여 마시고 자신감 없어 하는 친구에게 위로의 말과 힘이 되는 말을 건네고, 일이 있어 집에 바쁘게 가는 친구를 따라 같이 달려주고 본인 속도 때문에 산책을 같이 갈지 말지 고민하는 친구를 기다려주고, 산책을 함께 하고 산책을 하다 만난 뱀과 인사를 나눌 수 있게 해주는 등 살기 편한 세상에 비해 잃고 있는 따뜻함들을 온전히 누리고 있다. 따뜻함과 다정함이 세상을 밝히고 살린다고 늘 생각하고 있는 나조차도 잊고 있던 것들을 오리와 두더지, 달팽이의 하루를 통해 깨달았다. 어쩐지 삶이 탁하고 재미없다고 느껴졌다. 다 이유가 있었구나 싶다. 오리와 두더지, 달팽이 같은 친구들이 없기에, 대화를 나누고 서로를 위해 나눌 마음이 없어서 내게 주어진 하루하루를 사는 게 아니라 억지로 버티듯 지내고 있었던 것이다. 셋의 하루와 비교하는 것조차 어울리지 않을 만큼 나의 하루는 색이 무채색이다. 셋의 하루는 색이 알록달록하다. 그들의 마음처럼.
늘 같은 나라고 생각했지만 단 한 번도 같은 나는 없었다는 것을 오리가 알려줬다. 나는 나일 뿐이지만, 매일 같은 나는 아니었다. 매일 똑같은 하루를 살고, 똑같은 고민을 한다고 똑같은 나는 아니다. 똑같게 느껴질 뿐 같은 날, 같은 고민, 같은 내가 아니다. 단 한 번도 같은 나인 적 없었기 때문에 내가 보낸 날들이 눈부시게 알록달록했던 것이다. 남들 눈에 보이는 것이 내 눈에 보이지 않을 때를 처음으로 생각했다. 남들이 아는 나를 내가 모른다는 것이 이상하지만 당연한 일이었다. 내가 나를 미워하니까, 내가 나를 미워하는 게 익숙하니까. 내가 나를 미워하는 것만큼 아프고 잔인한 일도 없다. 어째서 나는 매일 아프고 잔인한 일을 내게 저지른 것일까? 나를 미워하고 탓하는 것이 가장 쉬웠고, 효과가 빨랐다. 혼자 상처주고 상처받고 나면 받아들이는 게 쉬워졌고, 그렇게 세상에서 가장 내 편이 되어줘야 할 내가 세상에서 가장 못난 사람이 내게 된다. 그동안 내가 아팠던 건, 지금도 여전히 아픈 건 내가 내 편이 되어주지 못 한 탓이다. 지금까지 아니라고 해도 남탓을 했던 것이다. 남들이 나를 미워한다고. 그런데 남들이 나를 미워하는 것보다 내가 나를 더 미워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동안 못 본 척, 못 들은 척 했는데 오리와 두더지, 달팽이의 이야기에 더 이상 못 본 척도 못 들은 척도 할 수 없다. 이제야 인정해버린 마음은 너덜너덜해진 상태다. 인정하고 나니 너덜너덜거려 약한 바람에도 흔들리던 마음이 덜 흔들리는 것 같다. 착각이겠지만, 마음은 그 누구도 아닌 스스로의 인정이 필요했던 것 같다. 너덜너덜해진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꾸역꾸역 버텨낸 내게 고맙다고, 이제야 인정해서 미안하다고 말해주고 싶은 오늘이다. 이 고마움과 미안함이 언제까지 갈지 알 수 없고, 몇 시간 후에 또 나를 미워하게 될 수도 있지만 지금 이 순간 만큼은 고마움과 미안함을 전한다.
이 그림책의 그림과 모든 문장이 내게 위로였다. 듣고 싶은 말이었다. 남에게는 망설임 없이 해주던 다정한 말들이 내게는 가장 어렵고 어울리지 않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나를 미워하는 날들이 늘어날수록 이 세상에 어울리지 않는 존재이니 사라져도 좋겠다고 생각하는 요즘이다. 마음이 쉽게 흔들리고 부서지는데, 더 흔들리고 부서질 마음이 있는지 마음은 매일 흔들리고 부서졌다. 이런 마음으로 사는 게 아깝기도 하고, 내가 아닌 것들에게 미안했다. 세상에 단 하나뿐인 내 삶을 이렇게밖에 살지 못 하는 내가 한심할수록 마음에는 순식간에 물이 차오르거나 순식간에 메말라버렸다. 물과 가뭄이 반복될수록 내 마음이 내 것이 아닌 것처럼 느껴지고, 차라리 로봇이라면 삶이 조금은 덜 버거울 것 같다고 생각했다. 로봇으로 살면 미안함을 느끼지 않아도 되니 죄책감마저 덜 수 있을 거라고. 그렇게 요즘 살고 있던 중 만난 이 그림책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지나고 있는 시간이 아름답다고, 눈부시다고, 어제 오늘처럼 내일도 눈부시게 빛나는 거라고 말해준다. 외로움을 느끼지 않는 나라고 생각했지만 외로움을 느끼지 않는 사람은 없다. 외로움이 외로움인지 모를 뿐이지. 이 그림책에서 오리와 두더지, 달팽이를 만나 그들의 하루를 함께 하고 이야기를 들으면서 외롭지 않았다. 함께일 때 더 외롭고 힘든 내게 함께일 때 따뜻하고 다정하고, 외롭지 않다는 것을 알려줬다. 오랜만에 서로를 속이거나 눈치보지 않고 편안한 대화를 나눴다. 내 이야기를 솔직하고 덤덤하게 꺼냈던 것 같다. 때로는 울고 때로는 웃으면서 그동안 빛을 잃어 보이지 않아 찾지 못했던 내가 간절히 바랐던 대화를 나눴다. 하루가 힘들 땐 오리와 두더지, 달팽이를 찾을 것이다. 오늘처럼 그들에게 위로를 받고, 힘을 내어 하루를 살아갈 것이다. 내 마음이, 내 하루가 편안해진다면 향기 좋은 차를 준비해서 그들을 찾아가 그동안 내 이야기를 들어주느라 못 했던 그들의 이야기를 몇날 며칠 밤을 새더라도 들어줄 것이다. 그 다정하고 따뜻한 이야기를.
이 그림책이 나처럼 위로가 필요한 이들에게, 오늘도 눈부신 하루를 보내고 있을 모두에게 닿길 진심으로 바란다.

💛오랜만에 이렇게 따수운 그림책을 만나서 너무 행복했다. 있는 그대로 나를 좋아하고 사랑하는 일이 먼저라고, 그래야만 한다고, 그래도 될 만큼 나는 눈부신 존재라고 말해주는 그림책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다: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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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의 길 - 2026 볼로냐 라가치상 어메이징 북쉘프 선정 2026 볼로냐 라가치상 수상작
김철순 지음, 김세현 그림 / 문학동네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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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의 길을 따라가다 보면, 🍎
: 김철순 시, 김세현 그림 『사과의 길』 (문학동네)(★뭉끄 6기 2월 그림책)

엄마가 사과의 껍질을 깎자, 동그란 길이 생긴다. 그 길에 아이는 얼른 올라탄다. 동그란 길은 계속 이어지고, 아이는 그 길 위를 계속 걷는다.
사과의 껍질로 만들어진 길에서 만난 사과꽃. 꽃을 시작으로 걸으면서 만나는 진짜 사과가 되어가는 과정. 따스한 햇빛과 젖을 물리듯 내리는 비, 매서운 바람. 진짜 사과가 되기 위해 겪어야만 하는 순간들 사이에 아이가 함께 하는 모습이 사랑스러우면서도 속이 꽉 찬 알맹이가 되기 위해 힘든 시간을 견디는 사과에게 큰힘이 되겠다고 생각했다. 매서운 바람에 새파랗게 질린 사과의 모습은 퍽, 인상 깊었다. 꼭 생각지 못 한 상황이나 감정을 느낄 때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진 내 모습이 생각나서 말이다. 새파랗게 질린 사과는 어느새 붉은 옷을 입고 속이 알찬 맛난 사과가 되어 접시에 놓아진다. 아이는 그 사과를 맛있게 먹으면서 이야기는 끝난다. 아주 간단한 달달한 사과가 되기까지의 성장을 보여주는 것이지만, 생각을 좀 더 하면 간단한 그림책으로 보이지 않는다. 사과의 일생에서 사람의 일생으로 이어진다. 사과의 껍질을 따라 갔던 것뿐인데 일생을 경험했다. 태어나서 살다 죽는 것이 자연의 섭리이고, 그 섭리에서 자유롭고 예외인 존재는 절대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탄생과 죽음이 아닌 탄생과 살아가는 과정을 보여준 이 그림책은 아이들에게나 어른들에게나 삶의 아름다움을 보여주기에 충분하다. 삶이 마냥 좋은 시절만 있는 것이 아니고, 그래서 더 아름답고 더 열심히 살아보고 싶어진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는 그림책이다. 사과와 그의 껍질로부터 시작된 이야기에서 삶의 아름다움을, 삶이 날이 갈수록 단단해지는 이유를 아이의 발걸음 따라 걸으며 느끼게 해줄 수 있는 그림책이라서 오래 오래 기억에 남을 것이다. 앞으로 우연히 지나친 과일 가게 앞에서 붉은빛을 뽐내며 자신을 보여주는 사과를 만나면 아주 잠깐이라도 사과와 눈을 맞추고 웃을 것 같다. 진짜 사과가 되어 그 자리에 있기까지 사과가 겪어온 시간들을 알았으니까. 그 시간들이 얼마나 눈부시고 아름다운지, 발견하지 못 한 삶의 아름다움을 사과를 통해 찾았으니까.
오늘 내가 보내고 있는 시간은 따스한 햇빛에 안기거나 비를 맞거나 매서운 바람에 흔들리는 시간인지 알 수 없으나, 사과의 껍질과 같은 길이 될 것임이 분명하고, 어제보다 단단한 내가 되어가는 과정 중에 있음은 확실하다. 사과의 껍질의 동그란 길이 아닌 나만의 길을 만들고 걷는 중이다. 세상 곳곳에서 저만의 사과를 키워내고 있을 모두가 힘냈으면 좋겠다. 속이 꽉찬 사과들을 맺기를, 그 사과들이 만든 껍질의 길은 거짓없이 저마다 걸어온 길을 품고 있기에 눈이 멀 만큼 눈부실 것이다. 오늘도 각자의 사과를 맺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있을 모두에게 ‘사과의 길‘을 받친다.

˚₊· 🍎 ˚₊· 🕰️ ˚₊· ☁️

★ 이 책은 뭉끄 6기 2월 활동을 위해 문학동네에서 받았습니다: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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