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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란 프라이 자판기를 찾아서
설재인 지음 / 시공사 / 2024년 7월
평점 :
(없는) 계란프라이 자판기를 찾아 떠나는 여정이 쉬웠겠냐고.
설재인 장편소설, 『계란프라이 자판기를 찾아서』(시공사)
설재인 작가의 책은 세 번째 만남이다. 첫 번째, 두 번째 만남이 너무 좋았던 터라 신작 나온다는 소식이 당연히 반가웠다. 제목이 『계란프라이 자판기를 찾아서』라니. 얼마나 독특하고 호기심을 끄는가. 돈을 넣고 버튼만 누르면 턱- 하고 나오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 ‘계란프라이’ 자판기라니. 책에서 고소한 냄새가 나긴 처음이다. 어쩌면 이 책을 계기로 설재인 작가의 작품을 더 애정할 수 있겠다는 확신이, 책에 미친(?) 독자가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상상을 했다.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뭔가 같은 자리를 맴도는 기분을 느꼈다. 뭔가 같은 문장을 계속 읽고 있는 느낌이랄까. 나는 생각했다. 솔직히 어른이 된 지 그렇게 오래되지도 않았으면서 아이였던 때를 잊고 어른의 눈으로 아이들을 바라보고, 세상을 바라보며 시야를 좁히고 있는 나를. 계란프라이 자판기를 찾아 떠나는 여정이 생각보다 지루했고, 그 과정 안에서 만난 어른들은 나와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을.
지나와 지택, 은청, 휴의 이야기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발 디딜 곳 없는 축제 거리를 걷는 기분이다. 정신없고 숨이 턱, 막히고 벗어나고 싶은 그런. 간단한 문장으로 표현하기에는 복잡한 감정과 상황들. 계란프라이 자판기를 찾아 떠나는 여정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었다. 정말 있지도 않은, 솔직히 계란프라이를 먹기 위해 누가 돈을 들고 슬리퍼를 찍찍, 끌고 거리를 나오겠냐는 말이다. 집에서 2분이면 금방 해먹는 간단한 계란프라이를. 계란프라이 자판기가 있다는 말은 애초에 믿지 않았다. 계란프라이 자판기를 봤고 사용한 적 있다는 말로 우쭐함과 관심을 얻을 거라는 내 생각과 지나의 생각은 같았다. 타인의 관심이 고픈 지나의 모습에서 나의 학창 시절의 짧은 순간을 봤다. 지나의 그런 모습이 싫고 의미 없다는 것을 어른이 된 나는 알지만, 지나의 나이와 같은 그때의 나는 그 모습마저 꽤나 멋있게 느꼈을지도 모른다(지나에게서 내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는데, 보고 나니 지나와 거리를 두고 싶어졌다). 지나와 지택, 은청이 함께 계란프라이 자판기를 찾아 떠나고 여정을 카메라에 담고, 훗날 지나는 최연소 천재 영화감독이라는 아주 잠깐이지만 달콤한 시간을 맛보고.
지택은 정말 계란프라이 자판기를 찾으러 떠난 것일까? 카메라를 빌려 그 여정을 남기고 싶을 만큼 간절했을까? 책장을 덮고 나서도 지택의 마음을 읽을 수 없었다. 이미 세상을 떠난 지택의 영정사진 앞에서 텅 빈 눈으로 건조하게 지택 아니면 답하지 못할, 어쩌면 지택도 모를 답을 원하는 질문을 던지고 있는 기분이다. 지택은 자신을 가두는 것들로부터 벗어나고자 했던 걸까. 아니면 계란프라이 자판기의 존재를 확인하면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고 싶었던 걸까. 무엇이 지택을, 지택의 엄마를 사람들 속에 조용히 섞이게 했는지 벼랑 끝으로 내몰았는지 너무 잘 알아서 지택의 마지막이 안타깝고 화가 난다. 국적과 나이를 향해 겨눈 날카롭고 잔인한 총구가 한 사람의 삶을 파괴했다. 총구를 겨눈 그들은 죄책감조차 가지지 않았으며 자신의 행동을 잘못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더 잔인하다. 국적 없는 곳에서 지내는 이들의 감정, 상황 등 그 무엇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없는 나는 그저 그들을 향하는 모든 것이 잔인하고 냉정하고, 거칠다는 말밖에 할 수 없었다. 괜찮다고, 살 만 한 세상이라고 말해줘야 했을 어른들은 지택에게 없었다. 어디로 숨어버린 걸까,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던 어른들이었을까? 좁은 방 안에서 책을 쌓아 놓고, 한 권 읽는 시간이 오래 걸리는 어른이 된 나는 지택이 기억하는 어른들과 별반 다르지 않은 어른일까봐 두렵다. 스티커를 몽땅 훔쳐간 어른, 학교 다닐 나이에 안전선 밖으로 내몰았던 교장과 학부모, 자판기 근처에서 여자와 아저씨를 강압적으로 끌고 갔던 경찰 등. 그들을 떠올라는 것만으로도 속이 울렁거리고, 묵직하고 뜨거운 불쾌함이 내 안에 자리 잡는다. 나는 절대로 그런 어른이 되지 않을 거야, 했지만 그들과 다르지 않은 어른이 될까봐 두려운 마음이 나를 좀 먹고 있다.
열두 살이라고 해서 철없는 생각을 하며 자신에게 주어진 하루를 가볍게 보내는 것이 아니다. 열두 살은 어른들이 하지 못하는 생각을 하고, 어쩌면 어른들보다 더 깊은 생각을 하느라 바쁠지도 모른다. 어째서 어른들은 열두 살의 무게를 가볍게 보는 걸까, 당신들도 그 나이를 지나왔으면서 말이다. 하지만 어른이 된 나는 길 가다가 보는 학생들을 보고 여러 번 혀를 찼던 적이 있다. 그때의 나는 저런 말과 행동을 하지 않았는데, 하고. 그때의 나는 나보다 타인의 시선이 매우 중요해서 내가 아닌 타인이 만든 나로 살았기 때문에 나와 다른 아이들을 보면 한숨부터 나온다. 그 한숨에는 그때의 나를 지키지 못한 스스로에 대한 미안함도 분명 담겨 있다.
작가는 열두 살 애들이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냐는 말과 싸우고자 함이 소설을 쓰게 하는 힘일 수도 있다고 했다. 그 말에 동의한다. 학창 시절, 더 이상 일기가 숙제가 아닐 때도 나는 일기를 꾸준히 썼다. 나를 좇는 부정적인 감정들과 상황에 대해 앞뒤 맥락 없이 쏟아냈다. 쏟아내고 나면 모든 게 제자리를 찾아가길 바라는 마음으로, 때로는 반항심을 가득 담아서. 쓰고 나면 마음이 괜찮아졌다. 아주 잠깐이지만 그 잠깐은 숨을 천천히, 들이마시고 내쉬길 반복했다. 작가가 나의 학창 시절을 떠올리게 한 건 감사한 일이지만 반가운 일은 아니었다. 떠올리고 싶을 만큼 행복하지는 않았으니까. 누군가 때문에 아팠던 적도 있지만 대부분 나 혼자 아팠으니까. 나에게 지나간 아픔을 떠올리는 건 피딱지를 떼고 남은 흉을 조심스럽게 문지르는 게 아니라, 그 순간으로 나를 다시 데려다 놓는 거라서 지나, 지택, 은청, 휴의에게서 나의 모습을 많이 발견할까봐 무서웠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지나, 지택 말고는 나의 지난날을 품고 있는 인물이 없었다. 책장을 덮고 나서 후련함보다 마음이 불편했다. 지나와 지택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지만 쉽게 나오지 않았다. 겨우 입을 열어 할 수 있었던 말은 고작 ‘미안해.’였다. 미안해. 지나와 지택은 미안하다는 말을 듣고 싶었을까. 아니면 다른 말을 듣고 싶었을까. 미안하다는 말 뒤로 소리 없이 문장을 덧붙인다. ‘계란프라이 자판기를 찾으러 간 너희들은 틀리지 않았어. 달랐던 거지. 같을 수 없어서 다른 거야. 다른 게 문제가 될 수 없어. 다른 게 문제라고 누군가 말한다면 어딘가 있을 수도 있는 계란프라이 자판기 앞에서 만나자, 꼭.’
◎ 이 책은 서평단 활동을 위해 ‘시공사’에서 받았습니다:D
● 세상 모든 지나, 지택, 은청, 휴의에게 이 책을 선물하고 싶다. 이 책을 읽고 나면 내가 이 책을 선물해주고 싶은 이유를 알 테니까. 이 이야기를 통해 기억의 조각을 찾아낸다면 계란프라이 자판기의 존재를 믿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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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해서 싸우길, 싸움 끝에 달라진 게 있다면 그 싸움은 나쁘지 않았던 거니까.
학창 시절을 지나, 지택, 은청처럼 보내지 못한 게 후회된다.
'계란프라이 자판기'가 있든 없든 그건 중요하지 않다.
그렇게라도 '다름'을 보여주고 싶었다면.
한 번도 틀리지 않았다, 같지 않고 달랐을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