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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아내리기 일보 직전 ㅣ 문학동네청소년 ex 소설 1
달리 외 지음, 송수연 엮음 / 문학동네 / 2024년 6월
평점 :
‘녹아내리기 일보 직전’이 가장 떨리는 것 같아.
달리, 듀나, 박애진, 최영희, 『녹아내리기 일보 직전』(문학동네)
『녹아내리기 일보 직전』은 표준과 정성에서 벗어나 청소년의 개별성과 주체성을 확인하는 네 편의 단편소설로 이루어져 있다. 네 편 모두 개성을 가득 담고 있어서 읽는데, 마음을 톡톡- 건드는 매력이 상당하다.
최영희 작가 특유의 B급 유머가 돋보이는 「지퍼가 내려갔어」는 여중생 채이가 오빠 채윤에게 닭다리를 빼앗긴 설움을 풀기 위해 ‘청소년 감시단’에 들어가면서 벌어지는 일을 유쾌하게 풀어냈다. 불량 청소년 감시가 임무인 줄 알았는데 파충류 외계인 렙틸리언을 색출하라는 믿기 힘든 임무가 내려지고, 아이돌 같은 전학생 도챈스를 렙틸리언으로 의심하면서 맞닥뜨리게 되는 상황을 유머러스하게 보여준다. 여중생 채이는 여중생의 통통 튀는 매력과 당찬 모습은 물론, 낯선 존재에 대한 거부감이 아닌 익숙함, 익숙한 존재에 대한 낯섦에 대한 덤덤한 모습을 통해 나의 여중생 시절을 떠올리게 했다.
박애진 작가의 「알 카이 로한」은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해 서러워하는 정윤의 마음을 대변하는 작품이다. 속상해 하는 정윤을 위로해주는 건 “넌 알 카이 로한의 후손이야.”라는 할머니의 말이었고, 정윤은 매달 삼백만 원이 입금된 할머니의 통장과 의문의 남자가 찍힌 흑백 사진을 발견하면서 정말 자신이 외계인의 후손일지도 모른다는 특별함에 이끌린다. 정윤의 상황과 마음이 내 상황이고 마음이던 때가 있었다. 친구들과 어울리는 게 힘들었다. 잘해보려고 하면 꼭 어긋나는 게 처음부터 친구와 어울릴 수 없는 운명을 타고 난 거라고 생각했다. 적극적이지 못하고 남들이 따르는 성격이 아닌 나를 원망하면서 친구를 무조건 가져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기도 했다. 그럴수록 나를 잃어가는 것은 물론, 친구들과 친해지는 건 밤하늘의 별 따기보다 더 힘들어졌다. 어느 순간 친구 만드는 걸 포기했다(지쳤으니까). 포기하고 나니까 친구가 생기기 시작했다. 내가 그렇게 애써도 되지 않았던 것이 내가 포기한 순간 되는 상황에서 억울함과 안심의 한숨이 모순되게 함께 일어났다. 정윤은 할머니의 말로 위로를 받았지만 나는 위로받기 전부터 도망갔다. 위로는 내게 전혀 들어먹지 않았다. 위로의 말들이 아무것도 없으면서 입만 나불대는 기괴하게 생긴 탈을 쓰고 나를 놀리는 인형 같았다. 서로의 비밀을 공유하고 모르는 것보다 아는 것이 많은 친구가 되어 가는 과정은 신비로운 일이지만 과정이 순탄치만은 않다. 그 순탄치 않은 과정을 넘기고 나면 진짜 친구가 된다. 진짜 친구가 되어도 언제든 다툼이 일어날 수 있고, 서로 시간을 가지며 이어나갈 수 있는 관계다. 정윤이 부디 영화와 세진과 진짜 친구로 오랫동안 우정을 잘 이어나갔으면 좋겠다. 셋이서 나눈 이야기가 가볍게 여겨지지 않길 바란다.
듀나 작가의 「자코메티」는 외계 로봇의 침략으로 기계 도시가 된 안양시를 그린다. 아비규환이 된 세계에서 도망자로 살아가는 찬미와 성격부터, 위기에 대처하는 방법 모든 게 다른 민정이 함께 지내면서 마주하는 상황을 보여준다. 맞는 게 하나도 없는 두 사람은 낯선 생명체를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보는 공통점을 지니고 더 넓은 세계로 발걸음을 옮긴다. 개인적으로 「자코메티」의 엔딩이 좋았다.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함께 선택받았다며 가자고 손 내미는 누군가가 있다는 건 정말 다행이면서 아름다운 일이라고 생각했다. 외계인이 등장하면 항상 외계인이 공격하고 정복하면서 인간이 살 곳을 찾아 떠나가거나, 인간과 외계인의 전쟁으로 인해 승리와 패배가 완벽하게 나뉘는 엔딩뿐이었다. 하지만 이 작품은 경계와 공격적인 시선으로만 외계인을 바라봤던 시선과 달랐다. 낯선 생명체를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보며, 자칫 갇힐 수 있는 SF장르의 엔딩을 확장시켰다. 찬미와 민정이 도착한 그곳에서는 어떤 생명체를 만날지 모르고,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 하나도 알 수 없지만 확실한 건 외계(인)를 더 이상 경계와 공격적인 태도로 대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찬미와 민정이 첫 걸음을 뗐고, 괜찮다는 것을 보여줄 것이다.
달리 작가의 「기억의 기적」은 누구나 원하는 과거로 시간 여행을 할 수 있는 미래 사회를 그린다. 수우는 갑작스레 자신을 떠난 민하와의 깨진 우정을 마주하기 위해 시간 여행사의 도움을 받고, 과거의 자신을 객관적으로 들여다보며 진실을 찾아 헤맨다. 그런 수우 앞에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지면서 이 소설은 깊이 있게 독자를 끌어들인다. 네 편 중, 마음이 갔던 작품이다. 기억의 기적, 이라는 제목부터 뭔가 기적이 일어날 것만 같았다. 수우와 민하의 우정, 과거로의 시간 여행, 시간 여행 속에서 만난 친구, 시간 여행 속에서 마주한 진실. 이 소설은 ‘우정과 시간, 타인과 나’라는 키워드로 설명된다. 깨진 우정을 마주하기 위해서는 그만큼 용기가 필요하다. 수우와 민하는 각자의 기억으로 깨진 우정을 마주하고, 과거에는 하지 못했던 마음을 전한다. 서로 갖고 있는 기억이 달랐지만, 그것마저도 진실이라던 민하의 모습에서 둘의 우정은 한 번도 깨진 적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깨진 것이 아니라 서로를 잘 알고 있다는 마음이 우정을 앞서 나갔던 것이다. 시간 여행 속에서 서로의 기억으로 과거와 깨진 우정을 마주하고, 전과 다름없이 어디서든 어떤 모습이든 평생 친구 하자는 둘의 약속은 꼭 지켜질 것이다. 서로 같은 마음이니까.
SF장르를 늘 낯선 무언가의 등장, 이라고만 가볍게 생각했다. 내가 쉽게 생각했다. SF는 ‘지금 이곳의 당연함을 가장 낯설고 새롭게 보여주는 공간’(212쪽)으로 변방의 장르라고 불렸던 게 무색할 만큼 가시적이다. 『녹아내리기 일보 직전』을 통해 가장 익숙했던 것들을 낯설고 새롭게 만날 수 있었다. 이 SF 소설집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달라서 계속 눈이 가고 마음이 가는 청소년들에게 특별한 시간을 선물해 줄 것 같다. 네 편의 작품에서 만나는 낯선 존재들이 사실은 아주 익숙한 존재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 놀라운 일이 벌어질 것이다. 우리의 기대에 부응해 줄 낯선 존재가 사실은 익숙한 존재이고, 그 존재가 ‘나 자신’으로 아름다울 수 있다는 사실을 틈틈이 알려주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나면, 정확하게 뭐라고 정의할 수 없는 나를 감싸 안는 모든 것들로부터 ‘나 자신’을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을 것이다. SF와의 특별한 만남을 선물해 준 네 명의 작가님과 문학동네 편집부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 이 책은 서평단 활동을 위해 ‘문학동네’로부터 받았습니다: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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