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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의 신사
에이모 토울스 지음, 서창렬 옮김 / 현대문학 / 2018년 6월
평점 :
《모스크바의 신사》는 러시아 혁명(1917년)기를 산 한 귀족의 일대기이다. 주인공인 알렉산드르 일리치 로스토프 백작의 삶을 1922년부터 무려 32년을 그리고 있다. 그는 귀족이란 이유로 벌을 받았고, 호텔 스위트룸에서 다락방으로 쫓겨나 갇힌다.
로스토프 백작은 혁명에 나름 공헌한 시를 썼다. 그 시를 이용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 부당한 처사에도 백작은 한마디 말도 없이 순순히 시대에 순응한다. 그런 그를 보며 자발적이란 느낌이 들었다. 백작이 연금된 메트로폴 호텔도 혁명의 여파 -경기 하락, 흉작, 무역 중단 -로 식재료가 고갈되고, 직원들이 백작을 (300페이지서부터) 동무라 부르는 등 서서히 달라진다.

《모스크바의 신사》는 러시아의 격변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혁명을 이끈 주체들을 내세우진 않는다. 반대편에 있는 피해자가 된 소수, 백작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이유는 무엇일까. 소설 초반엔 나 또한 귀족이란 편견에 사로잡혀 반성하거나, 교훈을 얻고, 깨달아 가는 것에 초점을 맞춰 읽었다. 니나라는 어린 소녀를 통해 호텔을 알아가며 변해가긴 했지만, 세상이 수박 쪼개듯 이분법으로 딱 맞춰 나눠지던가. 백작은 가해자의 편에 서 있긴 했지만 가해자는 아니었고, 혁명당원으로 한자리 꿰찰 수도(다시 귀족적 신분이 될 수도) 있었지만 그도 포기한 채 피해자가 되었다. 왜일까? 왕족, 귀족 제도에 대한 반감을 이런 식으로 표출하는 게 과연 정당한 걸까? 그가 한 선택이 옳은 것일까? 무엇이 옳은 선택인 걸까?
"황제가 계단 아래로 끌려 내려와 거리에 던져질 때 화려함은 얼마나 겸손하게 머릴 숙이는가. 그러고 나서 화려함은 조용히 알맞은 때를 기다리며 새로 임명된 지도자의 복장에 과해 조언해 준다. ... 한두 개의 훈장을 착용하는 게 좋겠다고. ... 일반 병사들은 구체제의 깃발을 승리의 장작더미에 던져버리겠지만, 그러나 곧 트럼펫이 울려 퍼지고 화려함이 옥좌 옆에서 다시 역사와 왕들에 대한 자신의 지배력을 확보하게 될 것이다."
아이러니하다. 혁명의 기준은 무엇인가? 기존의 체제나 사상을 모두 뒤엎어야만 혁명인가? 한 명도 남김없이 해치우는 게 과연 옳은 일인가? 남길 것은 없는가? 무엇을 남겨야 하는가? 겨우 치고 올라갔지만 결국 같은 자리에 앉아 같은 일을 하는 민중은 정말 민중의 대표인가? 민중이 되고 싶었던 건 결국 그들이었던 걸까? 왜 결정권자가 되면 결국엔 똑같아지는가? 그리고 무지가 가져오는 더 큰 혼란은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가?
"와인 목록이 존재하는 것은 혁명의 이상에 어긋난다고 주장하며 식품부 인민위원 테오도로프 동무에게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이 있었답니다. 그것은 귀족의 특권과 인텔리겐치아(지식층)의 나약함과 투기꾼의 약탈적 가격 책정을 보여주는 표지 같은 것이라는 거죠."
"말도 안 돼요."
"그래서 그들은 회의를 열고, 투표를 실시하고, 명령을 하달했습니다. 이제 앞으로 보야르스키는 모든 와인을 레드 와인, 화이트 와인으로만 구분하여 단일한 가격으로 판매할 겁니다."
와인의 라벨을 떼어내 모든 와인을 통일시킨 이 해프닝(혹은 테러)은 평등을 향한 갈망이 극단적으로 표출된 단적인 예이다. 무지와 성급함에서 비롯된 사고이기도 하다. 그들의 실수는 절대 용납할 수 없고, 우리의 실수는 과정으로 보는 모순은 또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가.
"우리 인간은 결국에는 철학을 선택해야 한다."
그래서 백작은 사람에게 흔들리지 않고, 시대에 유연했던걸까. 소설의 엔딩처럼 이 책이 던지는 수많은 질문에 확실한 답은 없다. 답이 없는 질문이지만 생각해볼 가치는 분명 컸다.
사실, 나는 질문이 끝도 없이 쏟아졌지만 백작은 로빈슨 크루소처럼 주어진 환경에 묵묵하고 차분하게 적응하고 매 상황에 현명하게 대처한다. 치열함은 1도 없다. 그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이 9살, 5살 소녀인 만큼 작품은 어둡지도 무겁지도 않다. 행동에서 엿볼 수 있는 바른 성품, 잘 정제된 열린 사고가 돋보이는 단정한 작품은 백작과도 닮았다.
토론으로 꼭 다시 만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