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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 - 손솔지 소설
손솔지 지음 / 새움 / 2017년 3월
평점 :
휘 (손솔지, 새움, 20170503)
아무도, 아무 것도 아니었던, 어떤 사람들인 소외받고 삶에 붙잡혀 놓쳐버린 현대인의 삶을 다룬 단편소설집이다. 젊은 여성 작가의 사회에 대한 문제의식을 철저하게 여과시켜 다양한 시각으로 조망해 나가는데 소재의 의외성에도 불구하고 이야기 전개나 구성에 있어서 모두 탄탄한 단편 소설집이다. ‘휘, 종, 홈, 개, 못, 톡, 잠, 초’ 한 글자 제목의 소설 여덟 편이 독자로 하여금 분노하기도 하고 울기도 하게 만든다.
표제작인 「휘」는 이름에서 휘파람 소리가 나는 소년이 자신을 두고 떠난 부모를 찾아 나선다. 어머니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 너무 당연한 건지도 모르는 것이 “어머니는 집 안의 냉장고이거나 선풍기이거나 식칼이거나 양파망처럼 그 자체로 고유명사”니까. 아버지 이름에는 늘 즐겁게 살기를 바라던 조부의 뜻에 따라 악(樂) 자가 들어 있었는데 정말 즐거웠을까. 적어도 어머니만은, 아버지의 그 이름에 깊이 찔려 치명상을 입은 채로 겨우 삶을 연명했다는 기억이 주인공을 아프게 한다.
「종」은 우리들의 상처받고 짓밟히는 누이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누구든 누이를 쳤다. 뒤에서 혹은 앞에서 그녀를 칠 때마다 내 방 벽에 짓눌린 누이의 입술에서는 깨질 것 같은 울림이 흘러나왔다.” 집안의 유일한 계집이자 모두의 종이 된 누이를 그려낸다. 누구든 누이를 종처럼 치고 특히나 아버지는 “계집은 요물”이라며 매일 밤 누이를 침실로 끌고 간다. 누이의 삶은 그녀가 새로운 언어를 배우는 순간 달라지는데, 그녀는 ‘자신만의 방’을 만들려 고 하면서 모든 억압과 짓밟힘에서 벗어나려고 하는데 가슴 아픈 소설이고 종종 언론 보도에서 숱하게 봄 직한 이야기다.
「홈」은 대학입시 교육에 짓눌린 학생들이 시체 냄새가 나는 학교에서 자살로 결론 내려지는 ‘11등’과 ‘10등’의 죽음에 타자화할 수 없는 입장과 점점 커지는 11등 책상의 까만 홈 속으로 사라져버리고 싶은 마음을 담고 있다.
「개」는 털이 온통 검지만 이름이 백구라는 개의 시선으로 본 세상 사람들의 삶을 관조하고 있다.
「못」은 중국에서 의사 생활을 하는 한국인 유부남과 비밀 연애를 하는 한국 여자 그리고 일본인 여인 사이에서 뭐가 현실이고 환상인지 모를 정도로 몽환적인 소설이다.
「톡」은 소녀의 물방울 놀이는 어머니가 네 번 결혼하면서 4명의 아버지를 하나의 덩어리처럼 기억될 정도로 소녀의 상처가 깊지만 어머니의 상처도 깊게 되고 결국 치매로 이어지면서 겪게 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잠」은 불면증을 앓고 있는 두 남녀의 몽환적이고 비밀같은 이야기를 담고 있다.
「초」는 읽는 내내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들, 인간의 기본적인 소양조차도 없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진 사회에 대해서 아픔과 분노를 품고 있다. 침몰하는 세월호에 남아 있던 304명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서 아무것도 하지 않은 무기력과 무능력 그리고 사건의 진상을 은폐하려고 조작과 선동을 그리고 세상에다 위계를 서슴지 않는 그들을 그리고 있다. 더 이상 뉴스에서 기대하는 소식을 듣지 못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을 때, 사람들은 불처럼 번지는 마음속 분노와 설움을 잊기 위해서 불에 탄 부분을 싹둑 잘라냈다. 평소처럼 하루하루를 견디며 살기 위해서는 더 이상 연명하는 데에 쓸데가 없고 타기 쉬운 말랑한 부분부터 잘라내야 했다. 그중 하나가 희망이었다.(238p) 소설처럼 세상에서 희망이나 정의를 기대할 수 없을 것이라는 체념이 오래 묵은 홧병처럼 번지는 것 같다.
소설 전체적으로는 사회나 가족에서 늘 약자로만 살아왔던 여성인 어머니, 누이의 희생과 소외 그리고 학대를 받았던 이야기를 담고 있는 것이 페미니스트 작가라는 호칭이 어색하지는 않다. 더구나 열정만 앞섰지 현실감은 떨어지고 모든 것이 얼치기였고 겉 서두르기만 했지 내실은 텅 비어 있었던 젊은 날의 나와 비교했을 때 작가는 참으로 속 깊고 세상의 아픔을 보듬을 줄 알고 함께 울어줄 수 있는 따뜻함이 묻어 있는 것 같다. 앞으로 무한하게 성장할 수 있는 가능성이 큰 작가를 만난 것 같아 기쁘고 다음 작품이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