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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신자 치유 - 우리 안의 나쁜 유전자, 광신주의를 이기는 상상력의 힘
아모스 오즈 지음, 노만수 옮김 / 세종(세종서적) / 2017년 6월
평점 :
절판
광신자 치유 (Amos Oz, 세종서적, 20170815)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분쟁을 해결하고 평화를 정착하기 위한 방법론을 설명해 놓은 에세이집이다. 양자의 분쟁은 ‘선악의 이분법적 대결’이 아니라, ‘정의와 정의의 충돌’이라는 점을 인식하고, 평화를 정착하기 위해서는 ‘두 국가 해법’이 가장 현실적이면서 평화로운 길이지만 광신주의가 이를 막고 있기 때문에 이를 치유할 수 있는 방법론을 말하고 있다. 작가는 광신주의가 어느 나라, 종교, 정당, 이념, 가족 등에서도 존재할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광신주의에 대한 섬세한 진단과 처방을 담고 있는데 크게 두 파트로 나뉘어져 있다.
<정의와 정의의 충돌>에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분쟁은 선과 악의 싸움이 아니라 오히려 고대 문명의 비극 작품처럼 가장 엄밀한 의미에서의 비극이며 정치적 의도와 목표에 대한 무지보다는 양측이 갈등하는 배경과 양측 모두 희생자라는 깊은 트라우마를 전혀 모르는 무지가 있다고 한다. 즉 이 분쟁을 양측이 모두 자기 민족의 유일한 고향을 되찾고자 벌이는, 정의(right)와 정의(right)의 충돌이라고 본다. 또한 똑같은 압제자를 둔 희생자끼리의 싸움이자, 유럽과 아랍에서 쫓겨난 난민끼리의 싸움이다. 순진한 이상주의자들이 주장하듯 심도 깊은 대화를 나누고 서로 간의 오해를 푼다고 해서 오래된 갈등이 해결될 리 없다는 게 작가의 생각이다. 해결이 어려운 이유 중 하나는 이 둘의 싸움이 인종차별이나 인권 투쟁, 또는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영화처럼 손쉽게 선인과 악인을 가를 수 있는 충돌이 아니기 때문이며, 또한 종교전쟁이나 문화전쟁도 아니며, 서로 다른 두 전통의 불화도 아니라, ‘이 집은 누구의 것인가’라는 단순한 ‘부동산 쟁의’라고 생각하며 그래서 해결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영토 문제는 공정한 배분을 통해 해결할 수 있는데, 이것이 바로 ‘두 국가 해법’이다. 이는 대략 6일전쟁 이전의 국경선으로 되돌아가 양측이 독자적 국가를 세우고 평화롭게 공존하자는 방법이다. 서로 원하는 것이 명명백백한 싸움에서 ‘두 국가 해법’이 가장 현실적이면서 평화로운 길이라고 주장하면서 이를 ‘공정하고 적절한 이혼’에 비유한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공정하고 적절한 이혼’이 설령 그런대로 공정하게 이뤄졌다손 쳐도 이혼은 결코 행복한 일이 아니며, 여전히 괴롭고 아픔도 있기 마련이라는 것이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이혼은 ‘특이한 이혼’이기에 특히나 더더욱 그러할 것이다. 이혼한 쌍방이 어쩔 수 없이 같은 아파트에서 계속 함께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 아파트는 너무 비좁기 때문에 누가 어떤 침실을 쓰고, 거실은 어떻게 할까를 당연히 걱정해야 한다. 작가는 이 과정이 굉장히 고통스럽겠지만 지옥 같은 삶을 겪는 것보다는 낫다고 말한다. 또한 막 병원에서 깨어나 대수술이 불가피하다는 것을 깨달은 환자처럼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람들 모두 두 개의 국가로 분할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점점 인식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스라엘은 난민 문제 해결을 위한 역할의 일단을 담당해야 하고, 이 비극에 대한 책임의 일부는 자신들에게 있음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팔레스타인 난민 문제는 그들을 ‘팔레스타인 국가’에 재정착시킴으로써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혼에 앞서 선행되어야 할 것은 양측이 서로 역사적, 감정적 연결 고리를 가진 땅에 대해 똑같은 권리가 있음을 인정하는 것인데, 여기서 가장 걸림돌이 되는 것이 광신주의라는 것이다.
〈광신자를 어떻게 치유할까>에서 정의가 무엇을 의미하든 여하튼 정의는 생명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과, 한편으로는 생명이야말로 다른 많은 가치나 신조, 신념들보다 더 우선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사이의 싸움인 것이다. 그 어떤 국가나 정부보다 더 오래된 이 광신주의는 그 어떤 정체체제나 이데올로기, 신념보다 더 오래전부터 이 세상에 존재해왔고, 광신주의 씨앗은 언제나 결코 타협하지 않은 정당성에 기생한다는 것, 수세기 동안 인간에게 깃든 병이란 것이다. 광신자의 본성은 본질적으로 몹시 감상적인 동시에 상상력이 결여되어 있다. 동조주의와 획일주의, 소속되고 싶은 충동, 억지라도 어딘가에 귀속되고 싶다는 욕구, 모든 사람을 동료로 삼겠다는 욕망 ---. 이것이야말로 가장 위험한 광신주의라고 말하진 않겠지만 가장 널리 퍼져있는 광신주의의 형태일 수도 있다. 광신주의 본질은 타인을 왠지 억지로라도 변화시키고 싶다는 욕구에 있다. 타인을 존재하고 있는 그대로 내버려두고 싶지 않다는 게 광신주의의 일반적인 경향이다. 가장 사랑하는 가족을 위해 좋은 마음으로 그들을 변화시키겠다는 매우 보편적인 충동에서 광신주의는 가정에서 시작된다.
광신주의 해결책에 관한 것으로, 무엇과도 절대 타협하지 않는 독선자인 광신자들에게 작가는 상상력과 문학, 유머를 처방한다. 상상력은 타인의 입장에 서보는 공감 능력으로, 나와는 다른 입장이나 시각이 존재할 뿐 아니라 어쩌면 그것이 맞을지도 모른다고 여기는 생각을 불러일으킨다. 또한 셰익스피어, 고골, 카프카 등의 문학작품은 광신주의를 억제할 좋은 교재라고 말한다. 또 다른 광신주의 면역제로서 유머는 타자가 자신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를 아는 것이다. 제아무리 자신이 옳다고 생각해도 어떤 측면에서 인생은 조금은 우스꽝스럽다는 진실을 알고 있는 힘이다. 말다툼할 때나 불평할 때 서로를 상상한다면 우리 모두에게 잠재되어 있는 광신자 유전자와 맞서는 데 조금이나마 효능을 발휘할 수 있다고 말한다.
유머의 한 요소는 자기 자신을 비웃는 능력인데, 유머는 상대주의고, 남이 자신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 아는 힘이다. 유머는 비록 제아무리 자기 자신이 옳다손 치더라도, 혹은 그 얼마나 자기 자신이 틀렸다손 쳐도, 인생은 어떤 측면에서 조금은 우스꽝스럽기까지 하다는 걸 깨닫는 능력이다. 유머는 자기 자신이 옳으면 옳을수록 자신을 익살맞게 볼 수 있는 힘이다.
작가가 광신자 치유로 내놓은 처방전이 어쩌면 상상력 부족에서 오는 무지인지 모르지만 의외다. 하지만 책을 다 읽고 나서 생각하면 작가의 합리적이고 근원적인 대안이라는 생각이 든다. 타자에 대한 이해나 공감능력, 틀릴 수 있다는 자각, 자신이 무지하다는 자각이 인류가 진화, 발전해 올 수 있었고, 현재 그런대로 평화가 정착되는 토대이지 않나 생각되며 작가의 혜안이 경이롭다. 또한 작가의 20~30여년전의 인터뷰에서 이기적이고 쾌락주의적이고, 도구주의적인 특질을 가지고 있는 후기 자본주의에서 정치혐오주의 본질을 전반적인 문제의 일부로 다루고 있는데 사회적 연대감의 결여가 바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는 점에서 공유경제의 싹을 보지 않았나 생각해본다. 남북한이 대치하고 있는 한반도의 정치지형에서도 이 책에서 제시하는 많은 처방이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생각한다. 작가가 줄곧 주장하는 ‘두 국가 해법’이 한반도에서는 양자의 정치체제를 인정하면서 연방제 형식의 통일로 가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생각해보고, 남북한이 동일민족이고 같은 언어를 사용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미 퇴색해버린 이념문제로 아직도 서로를 인정하지 않고 전쟁의 공포 속에 사는 것은 도저히 상호 이해가 가지 않는 상황이다. 또한 한국 사회에 휘몰아지고 있는 정치, 종교, 사회 단체의 광신주의 광풍을 잠재울 수 있는 해법도 타자에 대한 인정, 상상력, 문학, 유머에서 찾아야 하지 않을까 고민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