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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와 강적들 - 나도 너만큼 알아
톰 니콜스 지음, 정혜윤 옮김 / 오르마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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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전문가와 강적들 (Tom Nichols, 오르마, 20171031)
현대에 와서 인터넷으로 인한 정보의 범람, 학점과 학위를 남발하는 대학교육, 센세이셔널리즘에 젖은 저널리즘 등을 원인으로 사람들이 전문가와 전문지식을 인정하지 않는 현상을 분석하고, 이러한 현상으로 민주주의 체제는 포퓰리즘이나 기술관료주의에 빠지게 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이에 대한 경고와 이를 극복하기 위한 처방을 다루고 있다. 인류 역사상 지금처럼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이 처럼 많은 지식을 접할 수 있었던 적도 없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이토록 전문가로부터의 배움에 저항했던 적도 없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지적 업적을 폄하하고 있음은 물론, 전문가들의 충고를 거부하는 현상마저 벌어지고 있다. 기초적인 지식마저 부족한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증거주의라는 지식의 기본 규칙을 거부함은 물론, 논리적으로 주장을 전개하는 방법도 배우지 않으려고 한다. 그 결과, 지금까지 수세기에 걸쳐 쌓아 온 많은 지식들이 가뿐히 내동이쳐지고 있고, 새로운 지식을 발전시켜 나가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해야 할 규칙과 실천 방식이 제대로 이어지지 못할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전문 지식의 죽음은 단순히 현재의 검증된 지식만을 거부하는 현상이 아니다. 어쩌면 현대 문명의 초석을 이루고 있는 과학과 냉철한 합리성을 근본적인 차원에서 거부하는 현상일지도 모른다. 진짜 문제는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무지를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심지어 전문가들의 충고를 거부하는 행위가 자율성을 주장하는 행위로 둔갑되는 경우까지 생기고 있다. 사람들은 이제 정보들마저도 증명할 필요가 없는 사실이라고 받아들인다. 또 세상에는 모호하거나 인식하기 어려운 주제란 건 없으며, 모든 주제에 어떤 의견이건 다 타당하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예전처럼 원칙과 객관적인 정보에 기초한 주장들을 더 이상 만나 보기 힘들어졌다는 사실 때문이다. 전문 지식의 새로운 거부 현상에 사람들의 독선주의와 분노가 스며들어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전문가의 몰락을 가져온 주된 원인으로 첫째가 인터넷을 꼽고 있다. 인터넷은 일종의 방대한 지식 저장소라 할 수 있지만, 동시에 급속하게 퍼져나가는 잘못된 정보의 발원지이자 저력자이기도 하다. 포털 사이트 검색 몇 번 해 봤다고 본인이 전문가가 됐다고 믿고 있다. 하지만 “모든 글의 90%는 쓰레기“라는 스타전의 법칙처럼 인터넷에는 나쁜 정보와 설익은 생각들이 넘쳐나고 있다. 또한 우리는 ‘확증편향(우리가 이미 믿고 있는 사실을 확인해 주는 증거만을 받아들이고 싶어 하는 자연스런 경향을 말한다)’에 의해 우리가 믿기로 한 것을 확인해 주는 정보만을 찾기 쉽다. 민주주의의 평등 강조는 모든 의견을 동일하게 존중해야 하는 것으로 오해를 불러일으키고 있으며, “나도 너만큼 똑똑해”라고 여기는 자기도취적 나르시시즘이 확산되면서 전문가들은 유례없는 위기를 맞고 있다. 전문가의 자리를 어설픈 지식으로 무장한 채 떠들어대는 사람들이나 유명인들이 대체하고 있다.
둘째는 대학 교육에서 원인을 찾는다. 학생을 고객으로 보는 무늬만 종합대학에 늘어나 학위와 학점이 남발되고 있다. 아울러 만연한 학점 인플레이션 현상은 학생들의 지적 나르시시즘을 부추긴다. 심지어 하버드 대학마저도 가장 많이 줬던 학점이 A였다. 이로 인해 비판적 사고를 기를 수 있는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하여, ‘오만의 환상’을 사회에 나가서도 깨기 힘들어졌다. 너무 많아진 대학들이 돈벌이를 목적으로 학점과 학위를 남발하고 있고, 비판적인 지식인을 기르기보다 고객인 학생들의 근거 없는 자존심을 부추기는 데에 급급하고 있다.
세 번째 원인으로 新저널리즘인데 너무 많은 언론과 매체들이 시청자, 구독자 유치를 위해 치열하게 경쟁한다. 자극적이고 편향적인 뉴스와 정보를 수많은 채널을 통해서 끊임없이 쏟아내고 있다. 정치 토론, 건강 프로, 증권 프로 등에서 어설픈 전문가들이 가짜 정보를 무차별적으로 쏟아 내며, 그러한 상황에 대중들은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어 있다. 언론은 독자들에게 필요한 정보를 제공하는 대신 팔릴 만한 뉴스, 즉 독자들이 관심을 가질 만한 뉴스에 치중하고 있다. 케이블 방송들은 24시간 오락으로 바뀌어 가는 토론과 난잡한 정보 제공 프로들을 내보내면서 이 상황을 악화시키고 있다.
그런데 사람들은 지금 전문가와 전문 직업인들의 노력을 방해하기 위해서 세 가지로 중무장을 하고 있는 상황이다. 그 무엇도 오만함, 나르시시즘, 냉소주의의 해로운 융합을 극복하기는 힘들기 때문에 작가는 서구의 전통적 자유주의가 무지한 대중에 맞서 일어날 때라고 드러내 놓고 말한다. 엘리트주의라는 무서운 비난을 감당할 준비를 해야 하고, 이 엘리트주의라는 딱지는 유럽을 비롯한 좀 더 계층화된 문화를 가진 지역보다, 평등주의가 더 강한 미국에 언제나 더 큰 영향을 미쳐왔다는 것이다. 서구와 미국에서 지식과 과학을 소중히 여기는 문화가 융성할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민주주의와 세속적 관용 덕분이었다. 그런 장점이 없었다면 지식과 진보는 이데올로기와 종교와 포퓰리즘의 공격으로부터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 유혹에 자리를 내준 나라들은 어김없이 끔찍한 운명을 겪었다. 대대적인 탄압, 문화적, 정치적 빈곤, 그리고 전쟁에서의 패배를 포함해서 말이다. 민주주의에서 엘리트는 여전히 중요하다. 특히 엄청난 부의 불평등과 엘리트의 실패가 만연한 지금 그런 주장을 한다는 게 말이다. 하지만 바로 이 소중한 민주주의 체제를, 그것을 불안정하게 만들고 있는 과잉 현상들로부터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우리에게는 엘리트들이 필요하다. 민주주의는 정부 시스템을 뜻하는 말이지 실제 평등 상태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다. 민주주의 체제에서 한 사람의 투표는 다른 사람들의 투표와 동일한 효력을 갖지만, 모든 의견이 그렇지는 않다. 교육을 많이 받은 엘리트와 그들이 봉사해야 하는 사회 간의 생산적인 결합을 위해서, 새로운 기본 규칙을 다시 세워나가는 것이 절실하다.
전문가와 전문지식을 믿지 않게 된 것은 겨우 반세기 전이었다. 마침내 인종, 계급, 성이라는 낡은 장벽이 무너진 것이다. 또한 평범한 사람들 사이의 장벽만이 아니라,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한 일반 시민과 엘리트 전문가 사이의 장벽까지 무너지게 되었다. 우리 스스로가 지닌 지식의 한계를 기꺼이 인정하고 타인들의 전문가적 능력을 신뢰하지 않는다면, 이 사회가 제대로 굴러갈 수 없음은 자명한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간혹 우리는 이런 뻔한 결론에 반감을 드러낸다. 전문가들에게 의지해야 한다는 사실로 인해 우리 스스로가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인간이라는 자부심에 손상을 입는다는 생각 때문이다. 자신의 무지를 인정하는 것으로 서구의 합리주의와 과학 발전이 이루어졌다는 점을 고려하면 작가의 주장이 틀리지는 않지만 전문가를 존중하는 사회를 만들기 위한 처방에서는 다소 고개를 갸우뚱거리게 만든다. 엘리트주의가 엘리트 지상주의로 흘러 우생학에 입각한 불평등 구조의 심화로 흐르지 않을까 우려되며, 우매한 대중의 우민정치가 그래도 엘리트 지상주의에 의한 폭정보다는 낫지 않을까 생각하며, 아리스토렐레스나 공자가 이상적으로 꿈꾸는 哲人政治는 달성하기 어렵지 않을까 생각된다. 며칠 전 예방접종이나 약물치료를 하지 않고 자연 치유로 면역력을 높여야 한다는‘약 안쓰고 아이 키우기’카페(회원 약6만명)의 운영자인 한의사를 지난 11월 1일 기소되었다는 뉴스를 보면서 현대에 극단적으로 흐르는 전문가 무시의 한 단면을 보는 것 같아서 씁쓸하였다. 작가의 좀 더 실질적인 처방과 민주주의에 대한 진정한 이해가 다소 아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