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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재나 마르틴 베크 시리즈 1
마이 셰발.페르 발뢰 지음, 김명남 옮김 / 엘릭시르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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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당신을 돕고 싶어."

"어떻게요? 나를 돕는다고요? 어떻게 돕습니까? 이렇게 된 마당에?"

"당신이 기억을 되찾도록 돕고 싶어."

407쪽, 로재나.

마르틴 베크는 쉴 새 없이 그 남자를 생각했다. 교회에서 크리스마스 예배를 드릴 때도, 산타클로스 분장을 뒤집어쓰고 땀에 흠뻑 젖었을 때도.

349쪽, 로재나.

마르틴 베크는 목덜미에 땀이 났다.

남은 시간은 열 시간. 그녀는 정말 웃었을까?

245쪽, 로재나.

취조라면 지금껏 수천 번을 해봤는데도 어쩐지 속이 야릇하니 불쾌하고 왼쪽 가슴이 뻐근했다.

304쪽, 로재나.

100분의 1초가 될까 말까 한 시간이었지만 마르틴 베크의 뇌리에 그 광경이 속속들이 새겨져 영원히 기억되기에는 충분했다.

397쪽, 로재나.


 따스한 산들바람이 불던 여름의 어느 날, 호수 위로 여성의 사체가 발견 됐다. 이 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스톡홀름의 수사 전문가인 마르틴 베크가 파견됐다. 그는 자기만의 생각에 빠져들 정도로 집중력이 높거나 좀 더 기민한 경향이 있었다. 그렇다고 한들 그 경향이 그의 무던한 성격을 특별하게 만들어주진 않았다. 택시비를 아까워하거나 수사 도중 아이들의 크리스마스 선물을 사는 인간적인 면모도 돋보였다. 이런 담백함이 그를 더욱 돋보이게 만들었다. 일반적인 추리소설 속 탐정들은 수사기관에서 일하지 않을 뿐더러 어딘가 명석하거나 독특한, 우리 같은 사람들과는 아주 다른 유형의 인간이기 마련이다. 그러나 마르틴 베크는 인내심을 갖고 지난한 수사 과정을 겪어 나간다. 범인은 또 어떤가. 일반적인 추리소설이었다면 여러 명의 범인을 등장시켜 독자에게 추론할 기회를 제공했을 것이다. 그러나 로재나 속 범인은 증인의 입을 통해 지목된 단 한 명의 남성이 유력한 용의자였다. 그 용의자가 죄를 지었다는 사실을 입증할 수만 있다면 수사와 이야기는 모두 종결되는 것이다.







입가의 미소를 지우지도 못한 채 그녀는 천천히 집안으로 물러섰다. 폴케 벵트손이라는 이름의 남자가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면서 집으로 들어와 등뒤로 문을 잠그고 체인을 걸었다.

390쪽, 로재나.

남자는 노점 앞에 서서 핫도그를 사서 노점에 기댄 채 먹으면서 쉴 새 없이 그녀의 창문을 올려보았다.

371쪽, 로재나.

 폴케 벵트손을 범인으로 단정 짓기엔 너무도 평범해 보였다. 반듯한 그의 이면에는 치밀한 잔혹함이 숨어 있었다. 매일 밤 소냐의 창문을 바라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가 체인을 걸어 성큼성큼 집으로 들어왔을 때에는 독자들의 심장을 얼어붙게 만들기도 했다. 단조로워 보이는 이가 대담함을 발휘하는 순간이었기에 더욱 공포스러웠다. 로재나를 잔혹하게 살해했던 폴케가 소냐를 죽이려다 잡힌 순간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그는 신문 과정에서도 줄곧 흘러나오는 눈물을 참지 못했다. 누군가를 무참히 죽였음에도 자신의 범죄가 드러나자 한없이 나약해지기 시작한 것이다. 자신에겐 분명한 대의가 있었기에 억울함을 느낀 것인지도 모른다. 특정 대상에 대해서는 잔혹성을 띄지만 본인에게만큼은 여린 성격을 지닌 그의 생각을 더욱 파헤쳐 보고 싶었다. 카린이 그를 두려워하게 된 계기와 그의 유년기도 궁금했다. 하지만 로재나에서는 폴케라는 범인이 잡힌 이후 그를 필요 이상으로 분석하려고 하지 않는다.




이 사건에 관련된 모든 단서들이 그러듯이 새로운 실마리는 실타래처럼 엉킨 물음표들과 의심스러운 증언들 속으로 금세 종적을 감췄다.

255쪽, 로재나.

 1960년대에 범죄 증거를 수집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전 승객 명단을 파악하여 범인으로 보이는 사람들을 추려나가거나 로재나 맥그로와 인사를 나눈 터키 대학생을 찾기 위해 대사관을 통해 정보를 주고 받아야 했다. 마르틴 베크는 폴케의 이전 연애관을 파악하기 위해 그의 전 여자친구를 만나기도 한다. 기다림을 수반할 수밖에 없는 과정들로 인해 사건은 여름에 시작되어 겨울에 종결되었다. 사건을 추적하는 데에도 큰 어려움이 있었지만 이를 구체적으로 입증하기란 더욱 힘든 일이었다. 그의 죄를 입증하고자 수사팀은 함정 수사를 진행한다. 범인을 위한 미끼로 피해자와 닮은 여성을 투입하여 범죄에 노출시키고 함정수사의 결과로 이전 사건의 범죄 여부까지 판단한다는 점에서 함정 수사의 문제가 무엇인지 통감할 수 있었다.







페르와 나는 1960년대 초에 만났습니다. 한 출판사에서 내는 다른 잡지에서 각자 일하고 있었죠. 어느 날 식당에서 점심을 먹다가, 우리는 예전부터 품고 있었던 아이디어를 문득 꺼내어 이야기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날 우리는 사무실로 돌아가지 않았죠.

7쪽, 로재나.

 마르틴 베크 시리즈는 마이 셰발과 페르 발뢰의 경찰 수사 소설이다. 그 둘은 연인이었다. 한 장을 발뢰가 쓰면 그 다음 장은 셰발이 썼다. 다 쓴 장은 서로 교차하여 고쳐나가기도 했다. 이런 과정을 거쳤기에 주인공과 이야기가 모두 담백한 분위기가 우러나온 게 아닐까 싶다. 범죄 수사 기자로 활약했던 발뢰는 수사 과정을 상세히 묘사하였다. 특히, 신문 과정에서 실제 녹취록을 보는듯한 글이 생동감을 높였다. 한 사건의 수사 과정과 사이클을 경험할 수 있는 것도 마르틴 베크 시리즈의 재밌는 특징 중 하나다.






그들은 기자 생활에서 얻은 통찰력과 철두철미한 조사 능력을 집필에 쏟아부었다. 범죄 현장의 모습은 물론이고 작중 인물들이 이동하는 거리와 시간까지 일일이 조사했다. 작은 에피소드까지 하나하나 정하는 것은 물론이고 우연을 어떻게 연출할지까지 포함해 모든 것을 결정한 후에야 글을 쓰기 시작했다. 자료 조사를 하고 시놉시스를 쓰는 데에만 일 년의 절반 이상을 할애했으나 본격적으로 집필에 들어가서는 한 권의 책을 완성하는 데 한 달에서 세 달 정도밖에 걸리지 않았다. 한 사람이 한 장씩 번갈아 쓰는 식이었다. 발뢰가 1장을 쓸 때 셰발은 동시에 2장을 쓰고, 한 장을 완성하면 서로 원고를 바꾸어 다듬었다. 두 사람이 동시에 쓰기 때문에 누구의 문체도 아닌 공동의 문체를 만들었다. 또한 셰발은 이 소설이 누구나 읽을 수 있는 쉬운 작품이기를 바라며 썼다. ‘마르틴 베크’ 시리즈는 어렵거나 복잡한 서술보다는 일상적인 대화가 주를 이루고, 경찰들의 일상이 사건을 진행시킨다는 점에서 독특하다.

429쪽, 로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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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인 조르바
니코스 카잔자키스 지음, 박상은 옮김 / 문예춘추사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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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제야 나는 알아들었다. 조르바야말로 그동안 찾아 헤맸으나 만나지 못한 사람이었다. 생동하는 가슴, 격렬한 입담, 대자연과 어우러진 위대한 야생의 영혼.

22쪽, 그리스인 조르바.


 크레타인 ‘나’와 마케도니아 ‘조르바’가 만났다. 이 둘의 만남을 위해 사전에 정해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카페에 있던 주인공에게 조르바가 갑자기 들이닥쳐 본인을 크레타섬으로 데려가라고 한 것이 첫 만남이었다. ‘나’는 고지식한 삶을 살아온이지만 조르바는 그렇지 않았다. 그럼에도 이 둘은 서로를 아꼈다.





정말 중요한 건 내가 살아 있느냐 죽었느냐 하는 문제야.

209쪽, 그리스인 조르바.


'밤이건 낮이건 나는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며 전속력으로 질주하네. 그래서 충돌할 땐 그만큼 더 큰 충격을 받는 거지.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잃을 게 뭔가? 아무것도 없어. 천천히 간다고 뭐가 달라지나? 결국 다 똑같은 운명인걸! 그러니 무조건 달려야지!'

212-213쪽, 그리스인 조르바.


“정말이지, 보스,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다 부당해, 부당해, 부당하다고! 조금도 끼어들고 싶지 않네!“

354쪽, 그리스인 조르바.


"조국이 있는 한 인간은 짐승, 그것도 흉포한 야수가 될 수밖에 없을 걸세. 하지만 나는 조국으로부터 구원받았지. 하느님, 찬미 받으소서! 난 이제 해방되었어! 자네는 어떤가?"

327쪽, 그리스인 조르바.




“영감님은 무슨 음식을 제일 좋아하십니까?”

“다 좋지. 음식을 놓고 좋다, 싫다를 논하는 건 크나큰 죄라네.”

“왜요? 선택을 하면 안 됩니까?”

“당연히 안 되지.” 

“왜요?”

“굶주리는 사람들도 있으니까.”

나는 부끄러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내 마음은 단 한 번도 그토록 높은 고결함과 연민에 닿아본 적이 없었다. 

245쪽, 그리스인 조르바.


그리고 나는,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던 나는 갑자기 모든 것이 필요했다. 

171쪽, 그리스인 조르바.


하지만 모든 것을 잃은 바로 그 순간 나는 생각지도 않았던 구원의 순간을 맞이했다. 마치 복잡하고 어두침침한 필연의 미로 한구석에서 행복하게 놀고 있는 자유를 발견한 것 같았다. 그리고 나는 자유와 함께 놀았다. 

414쪽, 그리스인 조르바.


 '나'는 책을 가까이 해오던 탓에 샌님 혹은 책벌레라는 조롱을 들어왔다. 그럼에도  교회와 수도원에 방문하고 내면의 부처와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마녀사냥을 자행하는 군중들에게 그들의 잘못을 지적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진 사람이기도 하다. 이토록 숭고한 정신을 추구하는 '나'는 조르바에게 매력을 느끼고 심지어는 자신이 지금껏 배워온 모든 것을 부정하며 조르바를 통해 배워야 했다고 아쉬워하기도 했다. 그를 종교로 여길 정도였다. 하느님과 악마도 구분하지 못하겠다던 안하무인 조르바를. 고지식하다는 말을 숱하게 들어왔던 '나'는 하느님과 부처의 말씀과 같은 진리를 늘 갈망했다. 세상의 이치를 깨닫고자 한 것이다. 진리를 좇는 갈망엔 쾌락이 수반될 수는 없었다. 그러다 만난 쾌락의 결집체가 얼마나 신선했겠는가. 그는 조르바와 함께하며 깊은 애정과 존경심을 느꼈다. 그러나 자신보다 불행한 이들을 항시 염두에 두어 연민을 가졌던 영감을 보며 자기반성을 하고 조르바가 바보로 여길 만한 행위를 자처하는 그의 내면은 이미 고결한 정신으로 단단하게 잡혀있다는 생각이 든다. 케이블이 무너지고 나서야 모든 속박에서 벗어난 그는 독자에게도 진정한 자유의 짜릿함을 전달한다. 조르바가 아니었더라면 그가 세상의 이치를 다 깨우친 것처럼 혹은 고민할 필요도 없었던 것처럼 해방될 수 있었을까. 조르바를 떠난 후 다시 그의 모습으로 돌아온 것을 보면 말이다. 






"여행이 보이네."

그가 말했다.

”아주 긴 여행. 여행의 끝에는 문이 여럿 달린 커다란 집이 기다리네. 왕국의 수도 같기도 한데……. 아니면 전에 말한 대로, 내가 문지기로 일하며 물건을 몰래 들여보낼 수도원이거나.“

”잔 좀 채워주세요, 조르바, 예언은 됐습니다. 문이 여럿 달린 커다란 집이 뭔지 가르쳐드리지요. 지구와 묘지입니다, 조르바. 그게 바로 긴 여행의 끝이에요. 악당의 건강을 위하여!“

411쪽, 그리스인 조르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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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능 있는 리플리 리플리 5부작 1
퍼트리샤 하이스미스 지음, 김미정 옮김 / 을유문화사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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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위험이란 게 뭘까? 위험하기 때문에 상황이 흥미진진해졌다.

153쪽, 재능 있는 리플리.


 톰 리플리는 수가 빠른 사람이었다. 임기응변에 능했고 다른 사람을 모사하는 재간도 있었다. 돌이켜보면 이 능력들은 사람들을 속이는데 탁월한 재능이었다. 뉴욕에서 무직자로 살아가고 있지만 세무서, 광고회사 직원으로 자신을 위장했다. 속인 신분으로 신뢰를 쌓거나 돈을 편취하기도 했다. 거주지를 바꿔가며 남의 집에 얹혀사는 신세였음에도 그의 취향은 제법 고상하여 고상과는 거리가 멀었던 자신의 실제 삶과 주변 인물들을 증오했다. 특히 부모를 대신해 그를 돌보았던 도티이모를 가장 증오했다. 어린 시절 이모에게 폭력과 굴욕을 당했던 기억이 25살이 된 해에도 쓰라림을 안겨주곤 했다. 이는 톰의 불안정한 심리와 낮은 자존감, 그리고 잘못된 방향으로 결핍을 메우려는 그의 습성과 관련이 깊다. 




톰은 디키가 부러웠다. 심장이 터질 듯한 부러움과 자기 연민이 톰을 덮쳤다.

47쪽, 재능 있는 리플리. 

둘은 친구가 아니었다. 서로가 서로를 알지 못했다. 이런 깨달음이 끔찍한 사실이자 불변의 진리라는 듯이 톰의 머리를 때렸다. 과거에 만난 사람들도 그랬고, 앞으로 만날 사람들도 그럴 것이다. 앞으로 몇 번이 됐든 톰은 그들을 결코 알지 못하리라는 걸 깨달았다. 최악은 그가 번번이 착각한다는 것. 그들을 안다는 착각, 그들과 완벽하게 죽이 맞고 그들도 그와 비슷하다는 착각을 한동안 한다는 게 최악이었다.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충격적인 깨달음을 얻는 순간, 톰은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78쪽, 재능 있는 리플리.


 톰은 몽지벨로에서 유유자적하며 그림을 그리는 디키를 보며 자신의 삶과 비교했다. 톰에게 디키는 여러모로 완벽한 사람이었다. 부유한 환경에서 자유롭게 하고 싶은 것을 영위하는 삶. 톰은 점차 처음의 계획과는 다른 감정을 품게 된다. 자신의 신체와 디키의 닮은 점을 찾았고 닮지 않은 부분은 디키를 따라 고치려 했다. 디키가 마지와 단둘이 시간을 가질 때면 시기가 극에 달하기도 했다. 디키는 그런 톰이 마냥 편치만은 않았다. 어느 새벽 바닷가, 톰이 남성 곡예단을 보며 좋아하던 때였다. 디키는 남성 동성애자를 조롱하는 표현을 쓰며 톰을 무안하게 만들었다. 이는 디키를 소유하고 싶어했던 톰이 그를 죽이게 되는 촉매제가 된다. 늘상 떠돌이 강아지처럼 외롭게 살아가다 자신이 좋아하는 이의 환심을 사려 노력했고, 그 사람에게 모든 것을 바치며 여생을 함께 할 계획까지 구상한다. 톰에 비해 별달리 노력하지 않았던 마지가 디키를 차지하려는 것이 아니꼬웠을 수밖에. 반면 디키는 자신이 준 사랑에 모멸감을 선사할 뿐이었다. 이로써 디키는 미래가 아닌 과거로 강등되고 만다. 톰에게도 아버지 혹은 마지와 같은 존재만 있었어도 이토록 극단적으로 끝나지는 않았을 터다. 디키가 본인을 조금만 싫어하는 기색을 보여도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 같은 감정을 지녔던 톰이 몇 시간만에 사랑했던 디키를 죽이고 평온하게 식사를 하며 여행 계획을 짰다. 심지어는 몽지벨로에서 디키의 재산을 정리하여 새로운 삶을 사는 것에 흥분하기도 했다. 사실 그가 선망했던 것은 타인이 아닌 도회적인 신사로서의 자신이었음을 알 수 있다. 디키의 죽음 이후부터는 톰과 독자의 감정선에 점차 거리가 두어진다. 




톰은 쇼가 시작되기를, 막이 올라가기를 하염없이 기다리는 것만 같았다. 

183쪽, 재능 있는 리플리.


 톰은 안정적인 상황을 탈피하고 싶어하면서도 초조한 상황을 견디지 못한다. 어느덧 두명의 사람을 죽이게 된 톰은 동일한 경위에게 두번의 심문을 받는다. 로마에서는 디킨 그린리프로, 베네치아에서는 톰 리플리로. 두 심문에서 디키 그린리프의 반지를 끼거나 디키가 살해당한 것 아니냐는 질문을 던지는 등의 대범함을 보인다. 이러한 대범함이 외려 진실을 숨기는데 도움이 될 것임을 이용한 것이다. 타인을 속이며 희열을 느끼는 모습으로 미루어 보아, 긴장이 가져다 주는 자극에 중독된 것일수도 있다.




톰은 디키가 되었다. 모두에게 미소를 짓고 누구든 손을 내밀면 천 프랑을 건네는 성격 좋고 순수한 디키가 된 것이다. 

111쪽, 재능 있는 리플리.


🔖 적어도 난 그린리프 씨를 구슬려 돈을 더 타내려고 하진 않았잖아. 그랬더라면 돈을 더 받아 낼 수 있었을 텐데. 디키가 기분 좋을 때 얘기를 꺼냈더라면, 디키가 거들었다면, 돈을 더 뜯어낼 수 있었을 텐데. 다들 그랬을 거야. 누구라도 그랬겠지만, 난 그러지 않았어. 그게 가장 중요해. 톰은 뿌듯했다. 

81쪽, 재능 있는 리플리.


 사람을 죽이는 일에 대해서도 죄책감을 갖지 않더라도 다른 이들 앞에서는 좋은 사람이 되고자 애쓰는 것 또한 톰의 모순 중 하나다. 누군가 구걸하면 그에게 호쾌하게 적선을 하는 것, 싫어하는 사람이 이야기를 하더라도 끊지않고 들어주는 것. 그가 생각하는 멋진 신사가 되는 방법인 듯 했다. 톰이 지극히 모순적이며 극단적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왜 그와 거리감이 느껴지지 않는지, 그가 위험해 처해있을 때 그보다 그를 더 걱정하게 되는지 모르겠다. 그럼에도 “일 멜리오 알베르고(최고급 호텔로 갑시다).”라며 호쾌하게 마무리를 장식하는 그의 말에 마냥 마음이 편치만은 않은 것은 피할 수 없나보다.
















본 게시물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 받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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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소해서 물어보지 못했지만 궁금했던 이야기 2 - 일상에서 발견하는 호기심 과학 사물궁이 2
사물궁이 잡학지식 지음 / arte(아르테)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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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해 전, 금요일 밤마다 한 TV 프로그램을 보기 위해 기대에 들떠 TV 앞에서 앉아있던 기억이 떠오른다. TV를 즐겨보는 편이 아니었음에도 유독 그 프로그램엔 열성이었다. 그토록 즐겨보았던 ‘알쓸신잡’은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출연하여 자신의 지식과 견해를 나누는 프로그램이었다. 처음엔 인문학에 관심을 갖고 보다가 차츰 다른 분야에도 주의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과학은 평소 관심을 갖던 분야는 아니었지만, 이야기와 어우러진 과학엔 눈길이 갔다. 엉뚱해 보일까 싶어 억눌러두었거나 미처 자각하지 못했던 질문이 표출되었을 때 묵혀둔 감정이 드디어 분출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를 풀어나가는 과정에서는 일말의 해소를 느끼기도 했다. ‘사소해서 물어보지 못했지만 궁금했던 이야기’는 과학을 대화하듯 풀어낸다. 독자가 궁금해할 만한 사항들을 먼저 끌어내어 이를 차근차근 설명해나간다.





‘밝게 비춘다’는 뜻의 ‘통촉’은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어떤 문제에 대한 상세한 고찰을 요청할 때 쓰던 말입니다. 실록에서 그 용법을 찾아보면 주로 “임금께서 통촉하셔서” 또는 “임금께서 이미 통촉하셨는데” 등으로 쓰였습니다. 이는 왕이 그 문제를 이미 알고 있거나 처리했다는 뜻이므로, 신하들이 갑작스럽게 입을 모아 통촉해 달라며 반박할 이유가 없습니다.


238쪽, 사소해서 물어보지 못했지만 궁금했던 이야기2.

또한 1962년에 개봉한 <폭군 연산>에서도 연산군이 신하들에게 퇴정 명령을 내리는 장면이나 중종이 새로 왕에 등극해 명령을 내리는 장면에서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또는 “성은이 망극하옵니다.”라는 대사가 들어갈 만한데도, 신하들은 그냥 “네.”라고 대답하는 것이 전부입니다. 241쪽, 사소해서 물어보지 못했지만 궁금했던 이야기2.



책은 뇌, 실험, 생활 궁금증, 몸, 잡학 상식이라는 다섯 가지 주제로 챕터를 분류했다. 가장 관심을 끌었던 챕터는 뇌 과학과 잡학 상식이었다. 마지막 챕터인 잡학 상식은 인문학적인 궁금증을 해소해나가는 재미가 있었는데, 그중에서도 한 질문이 유독 눈에 띄었다. ‘왕조 시대 때 신하들은 어떻게 타이밍을 맞춰서 합창했을까?’. 질문에 대해 고민해본 적도 없거니와, 어떻게 동시에 합창할 수 있었을까 하는 궁금증이 일었다. 회의에 대한 격식 중 하나로 답변에 대한 타이밍을 맞추는 예행연습이 있지 않았을까 싶었다. 허무하게도 신하들은 왕의 발언에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고 한다. 그저 꾸벅거리거나 ‘네.’하고 답변하는 것이 전부였다고. 극화된 조선시대 형상에 익숙해져 버린 나머지 외려 사실이 어색하게 느껴졌다. 단순히 엉뚱하다고 생각했던 질문 하나가 또 다른 상식으로 메워졌다.



그리고 해마 주변에 있는 비피질 영역은 해마와 함께 기억 형성을 담당하며, 특히 기억과의 연관성을 검증하는 역할을 합니다. 그런데 만약 해마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비피질 영역만 일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기억에 없어도 있는 것 같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일부 과학자는 기억 처리 과정에서 신경세포의 정보 전달에 혼선이 생겨서 데자뷔 현상이 발생한다고 주장합니다. 


20쪽, 사소해서 물어보지 못했지만 궁금했던 이야기.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측두두정 접합부에 전기 자극을 가했을 때 유체 이탈이 일어나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고 합니다.


60쪽, 사소해서 물어보지 못했지만 궁금했던 이야기.


 분명 처음 경험하는 일인데도 일전에 경험했던 것만 같은 기시감이 밀려오곤 한다. 왜 그런 감정을 느꼈을까 하고 잠시 생각해보지만 그러한 호기심은 금방 사그라들기 일쑤였다. 책은 이러한 호기심을 쉬이 날려 보내지 않는다. 데자뷰 현상이 발생하는 원인을 다양한 이론을 동원하여 파헤친다. 신경세포의 정보 전달 혼선, 복합적 기억에 의한 착란, 방어 심리 등을 데자뷰 발생 원인으로 꼽았다. 소위 말하는 초자연 현상 중 하나인 유체 이탈도 같은 맥락에서 분석한다. 전체 인구의 5~10%가 경험해보았다는 유체 이탈은 외부 환경과 몸에 대한 정보가 결합되는 측두두정 접합부에 문제가 생기는 경우 발생할 수 있다고 한다. 정신적 외상이나 감각 이용에 결함이 생기는 경우에도 발생할 수 있다. 사실 뇌과학 분야는 가능성에 기반을 두었을 뿐 아직 명료하지 못한 부분이 많다. 단 하나의 정설이 미처 드러나지 않았더라도, 하나의 현상에 다양한 이론을 접목하는 과정에서 또 다른 발견과 재미를 느낄 수 있다. 혹은 너무도 뻔한 나머지 미처 자각하지 못했던 일상 속 호기심과 공상이 발현되는 것에서 흥미를 느낄지도.


 


 


 


 


 


 


 


 


 







 


*이 글은 아르테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작성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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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정한 유전 아르테 한국 소설선 작은책 시리즈
강화길 지음 / arte(아르테)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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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울음소리도 비명도 아니었다. 이건 누군가의 ''이었다. 모두가 한탄이나 흐느낌이라 생각하고 지나치던 순간에도 쉬지 않고 털어놓던 자신의 이야기. 스스로를 구할 자신의 무엇.

(중략)

다락을 벗어난다고 해도 나는 다른 다락에 갇힐 것이고, 그곳에서 다시 문을 찾아야만 것이다. 어쩌면 찾지 못할 수도 있고, 그래서 자리를 영원히 맴돌게 될지도 모른다. 아마 거의 그렇게 것이다.

그래, 그럴 것이다.

110-111, 다정한 유전.


“나는 너무 오랫동안그런 적이 없어라고 말해왔기 때문에, 세월 동안 마음이 정말로 진심이라고 느끼며 살았다.”

144, 다정한 유전.



 ‘다정한 유전 다양한 여성들이 등장한다. 여성들은 이름이 드러나기도, 드러나지 않기도 한다(심지어 화자임에도). 편마다 등장인물이 달랐고, 그에 따라 이야기도 달라졌기 때문에 다소 혼란스러웠다. 책을 펴고있는 오른쪽 엄지 손가락이 맞닿아 즈음, 같은 고통을 겪고 있는 여성들의 이야기임을 있었다.


 그 고통이란 다정한 유전에서 비롯된다. 선조들로부터 삶의 터전과 재산을 물려받고, 생활 방식을 답습하는 작은 마을에서는 나름의 평화가 이어지는듯 하다. 하지만 마을을 떠난 명의 여성으로부터 숨겨져 있던 고통을 어렴풋이 가늠할 있게 된다. '평화로운일가족의 생활 패턴을 살펴보면, 자신의 인생을 희생하여 순환에 기여하는 어머니라는 존재가 있다. 모든 사람들은 어머니라는 존재의 여성은 희생을 해야만 한다고 답습해왔기 때문에 희생을 당연시한다. 그렇기에 어머니는 자신의 삶에서 충족되지 못하는 부분을 직시하지 못하며 방황한다. 때로, 이러한 고리를 인지하지 못하는 타인을 원망의 대상으로 돌리며 원인 모를 원망을 유전하기도 한다.

유전의 굴레로부터 벗어나고자하는 여성들도 있다. 그러나 그들이 굴레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치열한 경쟁이 필수적이었다. 서로를 적으로 인식해야만 했던 그런 경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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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이켜보면 우리가 경험한 , 어떤 믿음이었던 같다. 김지우 혼자의 문제라고 생각했지만 사실 우리 모두에게 조금씩 스며들어 있던 문제를, 어쩌면 그녀는 해결한 같다는 믿음.

18, 다정한 유전.


방식으로 우리가, 몰랐던 마음들이 만난다면, 그것으로 나는 새로운 것을 있게 되겠지.

그리고 새로운 것을 읽을 있게 되겠지.

72, 다정한 유전.


이것이 이제 새로운 유전이다.

147, 다정한 유전.



 서로에게 질시 어린 시선을 보내다가도, 결국 미워할 수는 없다. 확신할 없지만 희미한 교감이 그들을 미워할 없게 만든다. 저항할 없이 물려 받아야만 했던 역할의 굴레가 드러나며, 교감 또한 선명해져간다. 다정한 유전이 여성들의 역할과 , 불필요한 원망이었다면 새로운 유전은 반대인 삶에 대한 선택권과 서로를 위한 연대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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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쓰려면 내면을 끄집어내서 어떤 것을 구현해야 했는데, 그녀는 시간이 갈수록 일이 힘들다고 생각했다.

127, 다정한 유전.


그러니까단숨에 쓰는 말이다. 내게 엄청난 재능이 있다는 착각을 불러일으켰던 체험. 이제는 안다. 그때는 몰랐다. 내가 어떤 이야기를 직조한 것이 아니라, 나도 모르는 내면에 쌓여 있던 이야기가 그저 폭발하듯 풀려나왔던 것이라는 사실을.

137, 다정한 유전.



이전 작품인 화이트 호스에서도 작가로서의 고충을 간접적으로나마 느낄 있었는데, 이번 작품에서는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의 신념도 드러났다. 내면을 끄집어내어 글로 구현하는 .

지난 여름, 술을 마시면서 친구 슬기에게 꽁꽁 싸매왔던 상처에 대해 얘기를 적이 있다. 슬기는 지금 했던 말을 책에 써줘.’라고 했다. 몸을 가누기 힘들 정도였는데도, 말만은 또렷하게 기억이 났다.


단숨에 글을 쓰면, 내면을 드러내면, 새로운 유전을 이어나갈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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