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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정한 유전 ㅣ 아르테 한국 소설선 작은책 시리즈
강화길 지음 / arte(아르테) / 2020년 10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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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울음소리도 비명도 아니었다. 이건 누군가의 '말'이었다. 모두가 한탄이나 흐느낌이라 생각하고 지나치던 순간에도 쉬지 않고 털어놓던 자신의 이야기. 스스로를 구할 자신의 무엇.
(중략)
이 다락을 벗어난다고 해도 나는 또 다른 다락에 갇힐 것이고, 그곳에서 또 다시 문을 찾아야만 할 것이다. 어쩌면 찾지 못할 수도 있고, 그래서 그 자리를 영원히 맴돌게 될지도 모른다. 아마 거의 그렇게 될 것이다.
그래, 그럴 것이다.
110-111쪽, 다정한 유전.
“나는 너무 오랫동안 ‘그런 적이 없어’라고 말해왔기 때문에, 긴 세월 동안 그 마음이 정말로 내 진심이라고 느끼며 살았다.”
144쪽, 다정한 유전.
‘다정한 유전’엔 다양한 여성들이 등장한다. 이 여성들은 이름이 드러나기도, 드러나지 않기도 한다(심지어 화자임에도). 각 편마다 등장인물이 달랐고, 그에 따라 이야기도 달라졌기 때문에 다소 혼란스러웠다. 책을 펴고있는 오른쪽 엄지 손가락이 맞닿아 갈 때 즈음, 같은 고통을 겪고 있는 여성들의 이야기임을 알 수 있었다.
그 고통이란 ‘다정한 유전’에서 비롯된다. 선조들로부터 삶의 터전과 재산을 물려받고, 생활 방식을 답습하는 작은 마을에서는 그 나름의 평화가 이어지는듯 하다. 하지만 마을을 떠난 한 명의 여성으로부터 숨겨져 있던 고통을 어렴풋이 가늠할 수 있게 된다. '평화로운’ 일가족의 생활 패턴을 살펴보면, 자신의 인생을 희생하여 순환에 기여하는 어머니라는 존재가 있다. 모든 사람들은 어머니라는 존재의 여성은 희생을 해야만 한다고 답습해왔기 때문에 이 희생을 당연시한다. 그렇기에 어머니는 자신의 삶에서 충족되지 못하는 부분을 직시하지 못하며 방황한다. 때로, 이러한 고리를 인지하지 못하는 타인을 원망의 대상으로 돌리며 그 원인 모를 원망을 유전하기도 한다.
유전의 굴레로부터 벗어나고자하는 여성들도 있다. 그러나 그들이 그 굴레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치열한 경쟁이 필수적이었다. 서로를 적으로 인식해야만 했던 그런 경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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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이켜보면 우리가 경험한 건, 어떤 믿음이었던 것 같다. 김지우 혼자의 문제라고 생각했지만 사실 우리 모두에게 조금씩 스며들어 있던 문제를, 어쩌면 그녀는 해결한 것 같다는 믿음.
18쪽, 다정한 유전.
이 방식으로 우리가, 몰랐던 마음들이 만난다면, 그것으로 나는 새로운 것을 알 수 있게 되겠지.
그리고 새로운 것을 읽을 수 있게 되겠지.
72쪽, 다정한 유전.
이것이 이제 새로운 유전이다.
147쪽, 다정한 유전.
서로에게 질시 어린 시선을 보내다가도, 결국 미워할 수는 없다. 확신할 수 없지만 희미한 교감이 그들을 미워할 수 없게 만든다. 저항할 수 없이 물려 받아야만 했던 역할의 굴레가 드러나며, 교감 또한 선명해져간다. 다정한 유전이 여성들의 역할과 삶, 불필요한 원망이었다면 새로운 유전은 그 반대인 삶에 대한 선택권과 서로를 위한 연대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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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쓰려면 내면을 끄집어내서 어떤 것을 구현해야 했는데, 그녀는 시간이 갈수록 그 일이 힘들다고 생각했다.
127쪽, 다정한 유전.
그러니까 ‘단숨에 쓰는 것’ 말이다. 내게 엄청난 재능이 있다는 착각을 불러일으켰던 그 체험. 이제는 안다. 그때는 몰랐다. 내가 어떤 이야기를 직조한 것이 아니라, 나도 모르는 새 내면에 쌓여 있던 이야기가 그저 폭발하듯 풀려나왔던 것이라는 사실을.
137쪽, 다정한 유전.
이전 작품인 화이트 호스에서도 작가로서의 고충을 간접적으로나마 느낄 수 있었는데, 이번 작품에서는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의 신념도 드러났다. 내면을 끄집어내어 글로 구현하는 것.
지난 여름, 술을 마시면서 친구 슬기에게 꽁꽁 싸매왔던 상처에 대해 얘기를 한 적이 있다. 슬기는 ‘지금 했던 말을 책에 써줘.’라고 했다. 몸을 가누기 힘들 정도였는데도, 그 말만은 또렷하게 기억이 났다.
단숨에 글을 쓰면, 내면을 드러내면, 새로운 유전을 이어나갈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