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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인 조르바
니코스 카잔자키스 지음, 박상은 옮김 / 문예춘추사 / 2024년 1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제야 나는 알아들었다. 조르바야말로 그동안 찾아 헤맸으나 만나지 못한 사람이었다. 생동하는 가슴, 격렬한 입담, 대자연과 어우러진 위대한 야생의 영혼.
22쪽, 그리스인 조르바.
크레타인 ‘나’와 마케도니아 ‘조르바’가 만났다. 이 둘의 만남을 위해 사전에 정해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카페에 있던 주인공에게 조르바가 갑자기 들이닥쳐 본인을 크레타섬으로 데려가라고 한 것이 첫 만남이었다. ‘나’는 고지식한 삶을 살아온이지만 조르바는 그렇지 않았다. 그럼에도 이 둘은 서로를 아꼈다.

정말 중요한 건 내가 살아 있느냐 죽었느냐 하는 문제야.
209쪽, 그리스인 조르바.
'밤이건 낮이건 나는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며 전속력으로 질주하네. 그래서 충돌할 땐 그만큼 더 큰 충격을 받는 거지.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잃을 게 뭔가? 아무것도 없어. 천천히 간다고 뭐가 달라지나? 결국 다 똑같은 운명인걸! 그러니 무조건 달려야지!'
212-213쪽, 그리스인 조르바.
“정말이지, 보스,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다 부당해, 부당해, 부당하다고! 조금도 끼어들고 싶지 않네!“
354쪽, 그리스인 조르바.
"조국이 있는 한 인간은 짐승, 그것도 흉포한 야수가 될 수밖에 없을 걸세. 하지만 나는 조국으로부터 구원받았지. 하느님, 찬미 받으소서! 난 이제 해방되었어! 자네는 어떤가?"
327쪽, 그리스인 조르바.

“영감님은 무슨 음식을 제일 좋아하십니까?”
“다 좋지. 음식을 놓고 좋다, 싫다를 논하는 건 크나큰 죄라네.”
“왜요? 선택을 하면 안 됩니까?”
“당연히 안 되지.”
“왜요?”
“굶주리는 사람들도 있으니까.”
나는 부끄러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내 마음은 단 한 번도 그토록 높은 고결함과 연민에 닿아본 적이 없었다.
245쪽, 그리스인 조르바.
그리고 나는,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던 나는 갑자기 모든 것이 필요했다.
171쪽, 그리스인 조르바.
하지만 모든 것을 잃은 바로 그 순간 나는 생각지도 않았던 구원의 순간을 맞이했다. 마치 복잡하고 어두침침한 필연의 미로 한구석에서 행복하게 놀고 있는 자유를 발견한 것 같았다. 그리고 나는 자유와 함께 놀았다.
414쪽, 그리스인 조르바.
'나'는 책을 가까이 해오던 탓에 샌님 혹은 책벌레라는 조롱을 들어왔다. 그럼에도 교회와 수도원에 방문하고 내면의 부처와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마녀사냥을 자행하는 군중들에게 그들의 잘못을 지적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진 사람이기도 하다. 이토록 숭고한 정신을 추구하는 '나'는 조르바에게 매력을 느끼고 심지어는 자신이 지금껏 배워온 모든 것을 부정하며 조르바를 통해 배워야 했다고 아쉬워하기도 했다. 그를 종교로 여길 정도였다. 하느님과 악마도 구분하지 못하겠다던 안하무인 조르바를. 고지식하다는 말을 숱하게 들어왔던 '나'는 하느님과 부처의 말씀과 같은 진리를 늘 갈망했다. 세상의 이치를 깨닫고자 한 것이다. 진리를 좇는 갈망엔 쾌락이 수반될 수는 없었다. 그러다 만난 쾌락의 결집체가 얼마나 신선했겠는가. 그는 조르바와 함께하며 깊은 애정과 존경심을 느꼈다. 그러나 자신보다 불행한 이들을 항시 염두에 두어 연민을 가졌던 영감을 보며 자기반성을 하고 조르바가 바보로 여길 만한 행위를 자처하는 그의 내면은 이미 고결한 정신으로 단단하게 잡혀있다는 생각이 든다. 케이블이 무너지고 나서야 모든 속박에서 벗어난 그는 독자에게도 진정한 자유의 짜릿함을 전달한다. 조르바가 아니었더라면 그가 세상의 이치를 다 깨우친 것처럼 혹은 고민할 필요도 없었던 것처럼 해방될 수 있었을까. 조르바를 떠난 후 다시 그의 모습으로 돌아온 것을 보면 말이다.
"여행이 보이네."
그가 말했다.
”아주 긴 여행. 여행의 끝에는 문이 여럿 달린 커다란 집이 기다리네. 왕국의 수도 같기도 한데……. 아니면 전에 말한 대로, 내가 문지기로 일하며 물건을 몰래 들여보낼 수도원이거나.“
”잔 좀 채워주세요, 조르바, 예언은 됐습니다. 문이 여럿 달린 커다란 집이 뭔지 가르쳐드리지요. 지구와 묘지입니다, 조르바. 그게 바로 긴 여행의 끝이에요. 악당의 건강을 위하여!“
411쪽, 그리스인 조르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