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경은 부산포 사람이다. 그는 성정이 거칠지 않고 선을 찾고 행하려 애쓰기를 즐겨하였으나, 게으르고 놀기를 좋아하며 굼뜸이 있었다. 무경이 이를 고치기 위해 백 일 기한을 두고 책을 읽고 글을 쓰기로 하였다. 꾸물거리며 미적거리면서도 결국 무경은 백 일을 채웠다.
  무경이 마지막 글을 쓴 뒤 붓을 놓고 한동안 멍하니 있는데, 그 모습이 마치 몸뚱이만 남겨두고 정신이 어딘가 나가버린 듯했다. 무경이 깊이 숨을 들이쉬더니 문득 말했다.
  "장자는 그의 글에서 구만 리 높은 하늘을 날아가는 붕새의 이야기를 했다. 구만 리라는 거리는 현대 서양의 킬로미터 단위로 환산하면 약 35345.43킬로미터라고 한다. 대기권의 가장 상부인 열권의 높이가 약 100킬로미터이다. 대기권의 300배가 넘는 높이를 날아가는 새가 있을까? 그래서 어떤 이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지어냈기에 장자와 옛 사람의 비합리적인 이야기를 비웃는다. 하지만 물질적인 한계는 있을지 모르나 생각의 한계란 있을 수 없다."
  마침 옆에 있던 손님이 물었다.
  "백 일 동안 열심히 글을 쓴 뒤, 갑자기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란 말인가? 이 자가 글을 쓰다가 정신의 갈피를 잃고 만 것인가?"
  무경이 껄껄 웃으며 말했다.
  "나는 백 일의 기한을 두고 글을 써 왔다. 처음에는 자기 살 길을 찾아서 글을 썼으니, 이는 마치 몸을 낫게 하려고 약을 달여 마시는 것과 같았다. 그리고 조금이 지나서는 조금 더 괜찮은 글을 써 보려고 했으니, 이는 자신의 몸을 튼튼히 하기 위해 운동을 하고 근육을 가꾸는 것과 같았다. 그 와중에 방황도 하고 오류도 많이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백 일이 되었다.
  백 일 동안 나는 무엇을 하였는가? 생각해 보면 '책'이라고 하는 물질에 묶여서 하지 못한 것들이 많았다. 이는 이 방법의 한계인 동시에 나의 한계이다. 그러나 백 일이라는 시간 동안 쓴 글 속에서 계속해서 생각하고 마음가짐을 닦아 나가고 끝없이 질문을 던져왔으니, 이는 생각의 안개를 조금은 걷어낸 것이라 할 수 있다.
  백 일의 날개짓은 붕새가 날아가기 위해 날개죽지 아래 바람을 담기에는 턱없이 부족할 것이다. 그러나 날개짓을 통해 어떻게 날아가야 할지 방법과 방향을 조금은 보게 된 기분이 든다. 물질적인 한계는 그 모습을 볼 수 있으나 생각의 한계는 존재하지 않기에 가야할 방향과 방법을 모르는 경우가 많다. 백 일 동안의 글쓰기가 그 무지함을 깨우치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구만리 장천을 날아가는 방법을 보게 되었으니 내 어찌 기쁘지 아니하겠는가?"
  그리고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손발을 휘휘 저으며 춤을 추었는데, 그 춤의 행색이 심히 괴이하여 황색의 신이 추는 춤과 다를바 없었다. 내가 이 광경을 옆에서 지켜보다 배를 잡고 웃었는데, 곧 정신을 차리고 우스운 행색을 여기에 기록했다.
  아! 이제 무경은 백 일 동안의 글을 다 썼다. 백 일은 길기도 하고 짧기도 한 시간이다. 이는 우리들의 식견으로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무경은 백 일 동안의 기록을 남겼다. 이 기록으로 그는 백 일이라는 시간을 측정할 수 있게 되었다. 꾸준한 행동이 가지는 무서움이 여기에 있는 것이다. 어찌 참고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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