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연인들의 무덤으로 가는 지리를, 리용에서 20년이나 살았을 정도로 잘 알고 있었는데, 문밖에서, 오른쪽으로 돌아, 포브르 드 베즈로 가는 길에 있었으며-내 약점을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고, 오랫동안 마음에 품고 있던 경의를 표하기 위해, 프랑수아즈는 먼저 배로 보냈습니다.-나는 기쁨에 넘쳐 그곳을 향해 걸어갔으며-무덤에 이르는 통로를 가로막고 있는 문을 보았을 때는, 가슴이 타올랐습니다.-
  -아름답고 정숙한 영혼들이여! 나는 아만두스와 아만다에게 소리쳤습니다.-그대의 무덤에 이 눈물 한 방울 흘리기 위해 얼마나 오랫동안-오랫동안 기다려서-여기까지 왔는데-왔는데-
  왔더니-그 눈물을 흘릴 무덤이 없구나.
  삼촌이 휘파람 부는 릴라불레로를 들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트리스트럼 샌디 2> 251쪽, 로렌스 스턴, 문학과지성사

  개인적으로는 영국식 유머를 무척 좋아한다. 유머 속에 언제나 뭔가 씁쓸한 한 가지가 들어가 있는 그 맛이 참 독특하기 때문이다. 현대 소설의 실험 정신을 18세기에 이미 잔뜩 담아둔 이 소설에서는 영국식 유머가 가득하다. 이 유머 감각은 나중에 더글러스 애덤스의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나 테리 프래쳇과 닐 게이먼의 <멋진 징조들>의 그 시니컬한 유머 감각으로 이어지는 듯 하다.
  이 부분을 다시 읽어보니, 있어야 할 게 없는 상황에서 주인공이 느끼는 허무함이 다시금 느껴지는 와중에, 문득 박지원의 글이 떠오른다. 그는 열하일기 속에서 황금대라는 유적을 다녀온 이야기를 쓰는데, 그 글은 연행기의 일부와 '황금대기'라는 별도의 글로 남아있다. 그러나 실제 황금대라는 유적은 그 진위도 불분명하고, 그 당시에도 있는지 없는지조차 알 수 없는 유적이었다. 글 속에서 노이점이라는 수행원이 황금대 가기를 열망했다가 황금대의 실상을 알고 실망해서 다시는 이야기를 꺼내지 않더라는 내용이 나온다. 두 글의 상황은 비슷한 듯 하나, 그 상황을 통해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는 다르다. 하지만 왜 나는 이 두 가지 이야기가 비슷한 느낌인 것처럼 생각되는 걸까? 세상에 존재한다고 생각하고 그 존재를 직접 마주 대하길 열망하던 이가 막상 실물을 접하고 난 뒤 가지는 실망이라는 것은 결국 비슷한 느낌이기 때문이라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