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편 그는 현재 우리의 모습이기도 하다. 1884년 갑신정변. 1894년 갑오개혁, 1898년 독립협회운동 등 부조리에 대한 분노와 체제 변화를 향한 열정이 사라진 이후 현실의 삶이 갑자기 무겁게 다가왔을 때, 대다수의 사람들은 분노와 열정의 피로감을 덜기 위해 안정을 원했다. 개화와 개혁보다는 근면하고 성실한 노력과 노동, 그리고 그것이 보장해주리라 기대되는 미래를 위해 현실을 감내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민주화 이후 개혁의 피로감이 실용주의에 인도되어 경제적 안정을 희구하는 분위기로 나아간 것처럼, 이완용의 동양 문명화론은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를 잡아끄는 자장의 하나였다.
  이완용은 현실에 분노하기보다는 현실을 조망하려고 했다. 그에게는 분노해야 할 현실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을사조약과 한일병합조약을 주도할 수 있었고, 그 과정에서 평소 자신의 소신이었던 왕와 왕실에 대한 의리를 지켰다. 그리고 기존 체제가 혼란스러워지는 것을 원치 않았던 이들에게 일시적이고 허구적인 '안정'을 주었다. 분노해야 할 현실이 없었던 이완용은 현실의 부조리를 극복하고자 하는 그 어떤 사회적 가치의 부름에도 호응할 수 없는 인물이었다. 이러한 측면에서 그는 분노할 현실이 없거나 또는 그것을 외면하려 하는 지금 우리의 모습이기도 하다.


<이완용 평전> 14쪽, 김윤희, 한겨레출판

  이 책 자체는 이완용의 일대기를 알기 위해서는 좋을지 모르나, 이완용을 평가한 부분은 그리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래도 위 대목은 시의적인 면모가 있어서 굳이 인용한다.
  아완용에 대한 개인적인 평은, '유능하게 일하고 유능하게 처세하여 그 결과 나라를 팔아먹은 인물'이다. 능력이 있는 자가 자신의 능력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지에 대한 주관이 없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보여주는 경우일 것이다. 이 점에서 나는 '공문십철'로 꼽히기도 했으나, 나중에는 공자에게 성토당한 염유가 생각난다. 그는 유능한 행정 관료의 자질을 갖춰 공자와 당대 권력자에게 칭찬받았지만 그 능력을 계씨 정권의 수탈을 위해서 사용했다. 유능함과 바른 인격은 동의어가 아니다.
  우리의 현실은 바른 인격보다는 유능함을 추구하고 있는 듯 하다. 바른 인격이 보이는 세상에 대한 정의 추구보다는, 유능함이 보이는 현실의 부와 합리성과 실용성 추구가 더욱 두드러지는 모습이니 말이다. 하지만 이 유능함만의 추구는 결국 우리가 미처 생각하지도 못하는 와중에 우리의 모습을 우리가 욕하던 자의 것과 같게 만드는 지름길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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