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다산의 말로 즐겨 인용되는 "차 마시는 민족은 흥하고, 술 마시는 민족은 망한다."는 음다흥국론 같은 것은 다산이 한 번도 한 적이 없는 말이다. 어디서 갑자기 튀어나왔는지도 모를 얘기가 오늘도 신화처럼 떠돈다. 초의가 백운동에 갔다가 거기서 백학령(白鶴翎)이란 신품종의 국화를 보고 쓴 시가 있다. 그런데 첫 번역에서 이 백학령이 국화 품종의 이름인 것을 모르고 백학이 난다고 해석했다. 그래서 다음에 실린 "그중의 한 그루를 나눠 화분에 심고"라는 시가 느닷없이 "차나무 한 그루를 화분에 심고"로 둔갑해버렸다. 나중에 이 시는 한국의 차시 속에 버젓이 포함되었다. 차나무를 화분에도 심는가? 여태껏 10여 종 『초의시집』의 번역이 나왔어도 이 오류는 전혀 고쳐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동다기』에 '구방지상마(九方之相馬)'란 말이 나온다. 중국 고대에 천리마를 잘 알아보던 구방고란 사람이 말을 관상 보듯이, 차의 맛을 잘 감별해낸다는 뜻으로 쓴 말이다. 정작 차 문화 강의 교재에는 "아홉 방향으로 서로 말을 타고"로 풀이되어 있다. 그 아래 해설을 보면 더 우습다. 이런 식의 오역과 오류의 답습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새로 쓰는 조선의 차 문화> 650~651쪽, 정민, 김영사
정작 그 사람이 하지도 않은 말이 진짜인 양 인용되고, 지식의 미비로 생긴 오류가 당당하게 근거로 쓰인다. 나중에 그 근거를 밝혀서 진실을 이야기해도 그것에는 귀도 기울이지 않는다. 오히려 그 근거를 제시한 사람이 '자기를 공격하기 위해 시비를 건 것'이라고 대응한다. 실제 그런 이유로 오류를 밝혀서 꼬집는 사람도 더러 있지만, 그래도 근거가 잘못된 것이라는 점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이게 낯선 일로 보이는가? 당장 주변만 둘러봐도 이런 일은 상당히 빈번하다. 한쪽에서는 사실 제시를 못 들은체 하고 자기 할 이야기만 하는 모습은 주변에 너무나 흔하다. 게다가 이러한 경우를 더더욱 부채질하는 것은, 다른 쪽에서 그걸 비웃음과 조롱의 소재로 사용한다는 점이다. 보다 보면 논쟁의 이유가 단지 싸우기 위해서 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만 한다.
이런 상황을 보면 구경꾼으로서는 도무지 어지럽기만 할 따름이다. 양쪽의 사람들에게 속된 말로 "그러라고 하는 논쟁이 아닐텐데."라고 말하려니, 이런 말을 하는 것 조차도 또다른 속된 말로 "훈장질 하는" 것으로 비춰질까 두렵다. 아! 나 하나 닦기도 제대로 못하는 판국인데, 어찌 남의 시시비비 다툼에 끼어들 여력이 있는가! 나의 오지랖 넓음은 병통인 듯 하니, 애써 경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