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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십세 - 창비소설집
이남희 / 창비 / 199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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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일에 미혹되지 않는 마흔 살의 나이, 불혹. 홀리지 않아야 할 나이에 바라보는 마흔의 뒷모습은 어떤 모습일까. 이남희의 『사십세』는 일종의 후일담이다. 그러나 그녀의 후일담은 이전에 보아 왔던 단순한 후일담이 아니며, 또 변명과 엄살로 시대를 팔아 시류를 탔던 공지영류의 경우와는 질적으로 구분이 되는 조금은 새로운 모색의 시도로 읽혀지기를 원한다. 특히 이제는 모두가 80년대를 털어 내고 새로운 세기를 맞이려는 수선을 떠는 자리에서 읽는 「세상 끝의 골목들」은 제목처럼 간절하기까지 하다.

그러나 후일담 문학이 과거에 뿌리를 두고 있는 태생적 한계에서 비롯되듯이 그녀의 소설 역시 과거에서 대해서 그닥 자유롭지 못하며, 과거의 단단한 끝을 놓지 못한 채, 억눌린 현실 속에서 마땅한 출구를 찾지는 못하고 언저리만을 더듬거리며 방황하고 애써 스스로를 위안할 뿐이다. 단지 시대의 유효성에서 조금 더 벗어나 있다는 시간적 간극이, 그녀의 후일담이 새로운 각도에서 읽혀질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놓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이러한 가능성은 시대와 사회를 이끌고 나가야 하는 역사적 사명의 위치에 접어든 사십세의 벼랑 끝에서 시작된다. 나가야 할 길은 막막하고 지쳤다고 되돌아보기엔 해 놓은 것이 너무나 없는 초라한 마흔 살. 이러한 상황은 그녀의 문체를 통해 더욱 효과적으로 드러난다. 그녀의 문장은 마치 손잡이 없는 단도와 같이 간결하면서도 벼릴 대로 벼려 있어서 현재 속에서 삶에 대한 물음을 던지는 자기 고백적 글쓰기를 더욱 또렷이 해준다. 간결하면서도 건조하고 삶의 논리를 확인하려는 투명스런 문장들은 불혹의 나이에 어울리는 문장이다.

'어제의 날들과는 다른 나날이 앞으로 찾아오리라는 확신, 열정'을 쉽게 버리지 못하고, '창백하고 여윈 겨울햇살'같은 희망을 저버리지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들. 이 시대의 그늘같은 그들이 마지막 악다구니처럼 움켜쥐고 있는 희망은 이미 희망이 아니다. 그것은 이미 자기 위안과 희망의 수준을 넘어선 '뻔한 사기'이다. 화자는 그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 허튼 희망을 부정하지도 인정하지 못한다.

세 살 연하의 운동권 남자와 결혼한 희연이는 전교조 활동으로 해직된 후 남편으로부터 이혼까지 요구 당하는 벼랑 끝에서 결국 아파트에서 뛰어내렸고, '아무리 그래도 갈수록 세상은 좋아지고 있는거야'라고 위로해주던 김남주 역시 단지 드러내고 불평을 하지 않았을 뿐 세상 돌아가는 게 못마땅하다고 자꾸만 죽고 싶다고 입버릇처럼 말하다 암으로 세상을 떠난다.

그러나 희망을 놓치지 않으려고 애쓰는 청년에게서 상심과 눈물만을 얻고서 화자는 그것이 사람 사이의 작은 사랑이라고 한다. 그녀는 청년을 만나 이런 이야기를 한다. '그 안에 있는 것도 힘들겠지만 바깥에서 사는 것도 마음 편하지는 않아요. 엉망진창이라고 느낄 때도 많은걸. 어떨 땐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겠다 싶어요. 부끄러울 때도 많고...' 바깥과 안은 공간적 개념을 넘어서서 시공간적 개념으로 전이 확장된다.

80년대 혹은 80년대의 연장선상에서 바라보는 90년대. 그리고 후기 자본주의의 자장 안에서 시작되는 21세기의 머리맡인 또다른 90년대. 마치 위험한 외줄타기를 하듯 시대와 실존의 균형을 맞춰가며 살아야 하는 화자의 마음은 늘 조마조마하고 불안하다.

이제 불혹의 그녀는 더 이상 허튼 희망을 꿈꿀 수는 없다. 그러기엔 세상을 너무 잘 안다. 그래서 이 글의 시작과 마무리에서는 사그라드 파일리아 성당이 상징적 의미로 장치되어 있다. 그리고 '어디서 길을 멈추든 그 끝에서 항상 사그라드 파일리아 성당의 미완성인 모습과 마주치게' 되고, '아무튼 계속 지어지고 있으니까 그것으로 됐다는'식의 위안으로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그러나 막막한 희망은 오히려 절망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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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앞에서
이동하 지음 / 세계사 / 199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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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이동하의 글에서 우리는 아버지 세대의 글쓰기의 한 모범을 읽을 수 있다. 꼼꼼하고 정확한 문장과 좀처럼 들뜨지 않는 차분한 호흡. 어눌하고 답답해 보이는 촘촘한 문장들의 행간에서 눅눅한 세월을 담아 내는 그의 어투들. 이를테면 '차말로 구신 낮밥 묵는 소리 하네' '세월에 바래듯이 이제는 흡사 곶감 꼭지처럼 오그라든 채 찌들고 메마르고 오종종한 꼴로 거기 남아 있었다' 등은 그의 문장이 맛깔스러우면서도 얼만큼이나 능란한지를 보여주는 단편적인 예이기도 하다.

이렇게 우리가 잠시 잊고 제자리를 찾아 주지 못했던 우리말들을 건강하게 살려내고 있는 그의 문장은 그의 글이 지니는 커다란 하나의 힘에 속할 것이다. 하지만 그의 작품을 단지 문체나 플롯 측면에서 접근해 간다면 그것은 '장님 코끼리 만지기'와 다를 바가 없다. 그의 글 속에서 생생하게 살아 숨쉬는 인물들은 작가의 분신과 다름없고, 그 작가와 좀처럼 구별이 가지 않는 그의 분신들이 만들어 내는 감동은 잔잔하면서도 깊이가 있어, 그간의 편협한 글읽기에 치중했던 필자에게는 당황스러움과 동시에 뿌듯함을 안겨 주었다.

IMF라는 험난한 경제적 상황과 가정의 달 5월의 시간적 배경 속에서 읽은 「문 앞에서」는 읽는 이의 시선을 흐려 놓기에 충분했다. 인생에 있어서 가장 빛나는 한 때가 틀림없었을 30·40대를 산업화와 민주화의 회오리 속에서 제대로 펼쳐 보지도 못하고 흘려 버려야 했던 우리 아버지 세대. 역사의 한가운데에 서지는 않았다하더래도 어느 자리에서였건, 어떤 방식이었건 그 시대를 견디어 낸 그들이 어느새 지천명의 나이를 넘어서고도 닫힌 제 집을 들어가지 못하고 '문 앞에서' 서성이고 있다는 사실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그늘진 아버지의 또 다른 모습이다.

이동하의 <문 앞에서>가 가슴 깊은 감동을 전해 주는 까닭의 하나는 이처럼 잃어버렸거나 잊어버렸거나 아니면 너무 소홀했던 우리의 아버지를 섬세하게 그려내고 있다는 점이다. 비록 예전과 많이 달라졌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유효한 가부장적 사회에서 언제나 가정의 중심인 아버지가 사실은, 아버지의 '아버지 집을 떠나온 이래 지금 이 후줄근한 나이에 이르도록' '늘 잠긴 문 밖에서 서성거리고 있었다는 느낌'을 지우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었다는 사실이 우리의 가슴을 저미게 한다.

나이 먹은 부자간이지만 별로 나눌 만한 얘기도 없어 서로 떨어져 살아가고 있다는 삭막한 의미만을 장거리 전화를 통해 확인하던 이들이 닫힌 문 앞에서 새롭게 만나는 모습은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정말로 소중히 여겨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 가르쳐 준다. 기름때가 끈적끈적한 아버지의 안경을 공들여 닦아 제 것을 벗고 대신 써보고, 목욕탕에서 나이 많은 노인을 등뒤에서 두 팔로 싸안고 가만히 들어올려보는 나이 많은 아들의 모습은 책장을 덮고도 잊혀지지 않는 명장면들이었다

그리고 진정한 감동은 섣불리 표현할 수 없이 막막해져 오는 느낌이라는 걸 깨닫게 해주는 부분이었다. 입 바른 소리로 들린다면 무척 서운할 소리지만 이런 글을 쓰시는 분을 선생님으로 모시고 있다는 사실이 새삼 자랑스러워졌다. 이것이 나의 감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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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에 관한 명상
송기원 지음 / 문학동네 / 199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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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위선이 내면의 악을 숨기는 행위이고 위악이 오히려 그 악을 공격적으로 드러냄으로써 달성되어지는 것이라면, 송기원의 <여자에 관한 명상>은 이러한 위악을 지향하는 형식을 빌려 소설의 본질인 '꾸미기'를 달성해내가는 작품이라 할 수 있겠다. 다시 말해 문학이, 주체의 내밀한 근원에서 비롯된 상처를 치유하는 과정이라는 유명한 명제를 송기원은 새롭고 어긋난 형식으로 정면 돌파를 시도하고 있으며, 작가의 삶과 분리되지 않은 소설 쓰기의 무거움을 통해 스스로 세계와의 불화를 꿈꾸며 상처입기를 시도했던 중견작가의 오만하면서도 순수했던 고집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지금의 나를 여자들과의 상관관계를 통해 귀납하고 구성해내는 송기원은 일방적인 전달형식을 통해 소설에 드러나는 상처를 자신의 혼자만의 상처 차원에서 '성장'과 '예술'차원으로 끌어올리는 투박한 세련됨을 구사하고 있다. 하지만 이 작품에서 우리가 무심하게 지나쳐버릴 수 있는 부분은 선명하게 드러난 주인공 '김윤호 '의 내면세계와 맞닿아 있는 여자들의 내면 세계이다. 물론 이 작품이 일인칭의 시점에서 고백적으로 쓰여져있기는 하지만 소설의 논리적 개연성 결여된 채로 전개되는 여자들의 일련의 행위들은 단지 하나의 배경(背景)으로 충실한 역할을 해 내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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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사람 속의 검은항아리
김소진 지음 / 강 / 199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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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속의 검은 항아리」를 겉으로 들여다보면 그것에는, 어린 시절에 각인된 심리적 외상이 세월의 간극을 건너 해소되는 여정이 차분하게 그려져 있다. 그리고 황폐했던 삶의 기억에서 벗어나는 일이 해방과 치유의 기쁨보다 무엇인가를 잃어버린 적요로 다가오는 모습도 읽어낼 수 있다. 이런 류의 이야기거리가 그리 낯선 것은 아니지만 주목해 볼만 한 것은 김소진이 이러한 모습을 그려내는 매개로 똥을 이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과거 자신이 살았던 산동네를 찾아가는 것으로 시작되는 <눈 속의 검은 항아리>의 '나'에게 똥 혹은 변소는 현재 자신이 서 있는 실존을 확인하는 곳이며, 다시 돌아가고자 꿈꾸는 곳인 것이다. 그에게 변소는 잃어버린 것을 상기시켜 주는 슬픔의 여운을 가지고 있는 곳이며, 삶이란 이 변소를 이해하는 과정과 일치한다.

일종의 성장 소설로도 무리없는 「눈 속의 검은 항아리」는 아홉 가구가 함께 쓰던 변소를 세상 밖으로 나오기 위해서는 꼭 통과를 해야 하는 일종의 제단으로 상정하고 있다. 밤이면 새로 얻어온 젊은 마누라와 앓는 소리를 내고 변소가 떠나갈 듯 소피를 보고 나오던 현정이 아버지와 한밤중에 오줌을 누고 오다가 김치 단지에 금을 낸 사건은, 주인공으로 하여금 처음으로 가난과 성과 죄의식에 눈을 뜨게 만드는 경험을 제공해 준다. 이것은 사건의 마지막 부분부터 더듬어 보면 좀더 선명히 알 수가 있는데, 변소통 쪽에 세워 놓은 눈사람이 결국 그의 안에서 자라기 시작한 더러움과 죄의식의 상징인 것이다.

어머니는 자신이 시집올 때 가지고 온 난초 무늬 사기 요강에 대한 엄청난 터부 의식을 가지고 있으며 이를 화자에게 강요한다. 즉 어머니는 요강이 깨지거나 금이 가면 동티가 난다고 해서 설부터 정월 대보름까지는 아예 요강을 쓰지 못하도록 한다. 나박김치 국물을 먹어댄 탓에 오줌이 지린 <나>는 한밤중에 변소를 가야만 했고, 변소에서 오줌을 누고 나오다가 그만 욕쟁이 할머니의 김치 단지에 금을 가게 만든다. 생각 끝에 <나>는, 깨진 항아리 주변에 눈을 쌓아 눈사람을 만들어서 그것을 감춘다.

여기에서 드러나는 것은, 먹으면 배설을 해야 하는 지극히 단순한 욕망의 순리와 그 욕망에 따르는 절제와 금기의 문제이다. 모든 욕망에는 그에 대응하는 절제와 금기가 따르게 마련인데 절제와 금기에 대한 인식은 성장의 한 과정이기도 하다. 사기 요강을 사용할 수 있는 것에도, 오줌을 눌 수 있는 때와 장소도 절제와 금기는 따르고, 결국 단지에 난 금은 이러한 절제되지 않은 욕망이 만들어 낸 균열인 셈이다.

어린 시절을 보낸 미아리 산동네를 찾아가는 길은 그 눈사람 안에 가리어 있던 깨진 항아리를 찾아가는 길이며, 그 옆에 있던 변소를 새롭게 발견하러 가는 길이다. 그리하여 폐허가 된 집에서 한 무더기의 똥을 누고 나오는 행위, 구린내가 진동하는 깨진 항아리 속에서의 똥누기는, 포크레인에 의해 깎여 사라질 지난 시절을 기억하며 마지막으로 치르는 축복의 의례와도 같은 것이다.

그곳에는 가난과 욕망과 그로인한 상처가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생하게 꿈틀거리건 생명의 움직임이 있다. 그는 똥을 남기고 또다른 과거의 상징인 아버지의 영정을 남겨 두고 돌아온다. 결국 똥누러 간 셈이 되어버린 그의 방문길은 과거로 되돌아갔다가 다시 과거로부터 벗어나는 길이 되어버린 것이다. 작가 김소진에게 있어 똥은 비루한 현실과 자아를 확인시켜 주는 동시에 삶의 원천적인 생명력을 확인시켜 주는 매체가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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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증의 애인을 위하여
정해종 지음 / 고려원(고려원미디어) / 199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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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이 삶의 반영이라는 명제는 더이상 가치명제로서 그 실효성을 유지하기 힘들어졌으며 우리 시대의 서정시는 더 이상 이 시대의 성감대를 자극할 수 없어 보인다. 세상의 변화 속도는 가히 파시스트적이라할만큼 가속적이고, 팽창하는 자본주의의 욕망은 끝없는 자기증식을 되풀이하는 현실 속에서 정해종의 시는 삶의 한복판으로 뛰어들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당당한 일탈을 감행하지도 못하는 전형적인 룸펜의 모습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무기력을 솔직하게 토로하고 있다. '음주운전이었다 / 객기 반 취기 반으로 무작정 달려온 길'이었다고 고백한다. 그러면서 '사는 게 다 기적이'라며 '떠밀려 나온 세상의, 곡예처럼 아슬아슬한' 일상과의 거리를 유지하려고 애쓴다. 그가 원하는 거리는 세상과의 진정한 화해나 타협의 지점이 아니라 자기 방기의 무기력한 도피적 거리이다.

'빈 구루마 같은 생이 눈물겹도록 텅 빈 한 순간 / 세상을 베고 잠시 잠이 들었을 뿐'인 시인이 유지하고자하는 간격은 심미적 거리가 아니며 냉정하게 말할 때 관찰자적 거리도 아니며 단지 무기력한 도태의 거리이다. 그래서 그에게는 세상의 모든 것들이 자신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이미 결정되어버리진 것들이며,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어찌해볼 수 없는 것들이며 그것은 심지어 연애의 밑그림으로 그려져 있기도 하다.

'不通은 不和이고 不在이다, 처음부터 不通이었으므로'라고. 이렇게 시인에게 삶은 우울하고 애증으로 얼룩져 보이는데 그렇다고 해서 그가 삶을 비극적으로 바라보는 것도 아니다. 이미 결정되어 있었으므로. 그의 시는 심미적 거리를 담보로 자신의 책임을 방기하는 모습들을 시편 곳곳에서 들키고 있다.

그의 시에서 참신한 시적 개성이라든가 발랄한 의욕을 느끼기는 힘들었다. 그리고 대부분의 작품들이 담고 있는 내용의 깊이는 90년대의 문학적 감수성을 지닌 젊은 시인이 자신의 삶과 세계를 파악하는 방법 그리고 자신의 체험을 표현하는 방법의 새로움에 대해 무지하고 둔감하다는 점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시의 진정한 의미가 고도로 전문화된 지식에 포착되지 않는 삶의 미세한 틈새와 결들을 일깨워주고 관습과 편견과 이데올로기에 의해서 감추어지고 억압된 진실을 드러내며 사람과 사람 사이의 소통 가능성을 확장시키는데 있다고 본다면 그의 시는 독자들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 자발적인 공감을 이끌어내지 못하고 있다고 여겨진다. 삶에 대한 끊임없는 성찰 대신 변명 같은 몇가지의 낡은 담론에 기댄 시들은 모두 삶의 변두리에서 서성거릴 뿐이다.

스스로에게 치열하지 못함에 대한 변명이다. 그의 시에서 오히려 설익은 치기나 벼랑 끝으로 몰린 절망을 읽을 수 있었다면 그 울림의 폭은 더욱 컸을 것이다. 그러나 모순적이긴 하지만 정해종 시의 미덕은 이러한 면에서 드러난다. 그가 유지하고 깊은 그 거리에서만 체득될 수 있는 미학. '살겠다는 것이 아니라, 다만 죽지 않겠다는 것이다 / 삶을 포기한 지 오래지만, 삶을 포기했다는 것도 / 그러니까 포기한 삶을 살겠다는 것이다'. 그는 죽지 않고 꿋꿋하게 살아 남아서 계속 시를 쓸 것이다. 그게 그의 힘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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