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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의 시대 - 일, 사람, 언어의 기록
김민섭 지음 / 와이즈베리 / 2018년 12월
평점 :
≪훈의 시대≫는 그 언어의 기록이다
책의 제목을 듣고 어떤 내용을 담은 책인지 감이 잘 오지 않는다. 다만 문자와 관련된 책일까라는 은연한 느낌은 풍긴다. 그렇다면 과연 훈이라는 개념은 무엇이고 도대체 책에서는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아리송한 책 제목과 달리 ≪대리 사회≫에서부터 지금의 책 ≪훈의 시대≫까지 김민섭 작가가 담고자 하는 이야기는 명확했다.
p.9
‘훈’이라는 개념은 본문에서 자세히 서술하겠지만 요약하자면 ‘규정된 언어’다. 변화를 원하는 한 개인을 가로막는 것은 그를 공고하게 둘러싼 언어들이다. 어린 시절부터 외우고 노래해 온 익숙한 훈들, 그러니까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든가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든가, 하는 수사들은 개인을 시대에 영속시키는 동시에 끊임없이 지워내 왔다.
일제 강점기 때 우리 말을 사용을 금지시키려는 강압적인 일본의 정책이 있었다. 창씨개명까지 하면서 우리말과 정신을 말살하려고 했고 자신들의 사상을 주입시키려 했다. 그만큼 언어는 단순히 읽고 쓰고 말하는 것을 떠나 그 나라의 문화이자, 얼이자 정신이었다. 이 책에서 주목한 것은 우리 주변에 가지는 언어의 기록들이었다.
훈계, 훈시, 훈육, 훈화, 훈련, 가훈, 교훈 등 가정과 학교, 사회에서 우리는 ‘훈’으로 시작하는 것들을 많이 접하고 자랐다. 책에서는 그런 ‘훈’을 다음과 같은 의미로 정의했다. 집단에 소속된 개인을 가르치기 위한 교육의 언어, 지배 계급이 생산, 해석, 유통하는 권력의 언어, 한 시대의 욕망이 집약된 욕망의 언어로 보았다. 하나의 단어, 하나의 문장으로 집단의 목적을 정의했고 그것을 통해 개개인에게 영향을 미쳤다.
p.37
예컨대 국가의 경우는 ‘한국인’, 기업의 경우는 ‘○○맨’, 학교의 경우는 ‘○○’인 하는 방식으로 개인이 스스로를 규정하게 만든다. (중략) 조회 시간에 전교생 앞에서 상을 받거나 전국 규모의 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거둔 학생은 자랑스러운 ‘○○인’인 동시에 다시 그 가치를 가진 개인으로 환원된다. 그러나 모든 개인이 그런 영광의 순간을 통해 조직화될 수 있는 것은 아니기에, 조직은 그 현장의 언어를 개인이 온몸으로 받아들일 것을 요청한다. 그것이 가장 쉽고 명확하게 한 조직 안에 개인을 귀속시키기 때문이다.
바른 것을 강조했지만 그 안에는 숨겨진 바람이 담겨 있었다. 특히 남고, 여고의 교가를 형태소 분석을 통해 관찰하는 것은 무척 흥미롭다. 여고의 교가 경우 공부하는 학생의 본질보다는 어진 어머니, 바른 여자가 되자는 의미가 많이 담겨있었다. 교가 말고도 단체, 회사에서 ‘훈’이 포함된 것에서 무심코 넘어갔던,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였던 것들에서 우린 나의 본질보다 사회가 바라는 표본상이 되어가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p.244
한 개인이 가진 사유하는 힘은 그 누구도 검열하고 통제할 수 없다. 어느 공간에서 타인의 몸으로 존재하며 제한된 말을 하게 되더라도 자신의 사유를 지켜낸다면 그 공간에서 대리인간이 아닌 자기 자신으로서 살아갈 수 있다. 우리는 끊임없이 의심하고 불편해하고 물음표를 가져야 한다.
시작하는 시대가 흐르면서 한 쪽으로 치우쳐진 것들을 바로 잡기 위한 노력은 계속되고 있다. 그리고 그 시작은 자신을 사유하는 힘으로 온전히 자신을 그려나갈 수 있을 때라는 것이다. 누구의 대리인도 아니고 어떤 목적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닌 우리는 우리 자신이라는 것이다.
내 주변을 둘러싼 훈들은 어떤 것이 있는지 그것을 지배하고자 했던 언어에 대해 다시 생각해볼 시점이다. 언어의 힘과 다양성, 작가의 면밀한 관찰력이 잘 담긴 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