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범죄사회 - 안전한 삶을 위해 알아야 할 범죄의 모든 것
정재민 지음 / 창비 / 2024년 2월
평점 :
#범죄사회#정재민#알쓸범잡#창비
20대 초반, 세계에서 가장 살기 좋은 도시 순위에 빠지지 않는 캐나다 밴쿠버에서 몇 달을 살 기회가 있었다. 평화롭고 아름다운 도시에 살면서 좀처럼 이해되지 않았던 점 하나는 저녁에 어둠이 깔리고 난 후에 사람들이 거리에 잘 나가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밤에 여성이 혼자 길을 걸어가는 것은 금기시 된다고도 했다. 캐나다에 오래 산 친구에게 이유를 물어보니 답은 단순했다. '위험하니까'. 세계에서 가장 살기 좋은 도시의 밤거리가 위험하다고? 지역에 따라 편차는 있지만 한밤중은 물론 새벽까지 거리에 불이 환하고, 사람들의 왕래가 자유로운 한국의 밤거리 문화에 익숙한 나에게 밴쿠버의 밤은 매우 낯설게 느껴졌다.
한국은 치안의 측면에서 매우 안전하다는 것이 최근까지 나의 생각이었다. 그런데 최근에 이따라 벌어진 묻지마 범죄, 성 범죄, 마약 범죄를 접하며 범죄로 인한 불안감이라는 것이 어린 자녀를 둔 나에게도 싹트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판사, 법무심의관을 거쳐 대중들에게 범죄에 대한 모든 것을 알기 쉽게 전달하는 커뮤니케이터의 역할에 이르기까지 다방면에서 활약하는 정재민 작가의 '범죄사회'를 읽게 되었다.
책은 범죄의 원인에 대해 독자가 깊고 진지하게 성찰할 수 있는 기회를 우선적으로 제공한다. 그리고 우리 사회가 범죄를 예방하기 위해 어떤 수단을 갖추어 가고 있는지, 범죄에 대응하는 시스템을 어떻게 구축하고 있는지를 설명한다. 그리고 책은 자신의 이야기만 일방적으로 전달하지 않는다. 독자들이 궁금해할 만한 범죄 일반적 문제에 대해서도 챕터를 구성하여 다룬다. 예를 들면 통상 범죄에 대한 처벌체계를 생각할 때 늘 궁금하면서도 논란이 되곤하는 '판사의 형량은 왜 낮은가'의 문제이다. 작가는 단지 법리적 해석과 판결 시스템을 설명하는 데 그치지 않고 양형의 문제에서 피해자의 입장이 충분히 고려되지 않는 것 이면에 있는 문제점을 제기하면서 단지 설명에 그치지 않고 자신의 입장과 주장을 통해 시스템의 변화를 꾀하기 위한 단초를 제시하고 있다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책 속에는 우리나라와 해외에서 일어난 여러 범죄 사례를 생생하게 소개하면서 해당 범죄의 이면을 비추어 준다는 점에서 범죄에 대한 우리의 상식 수준의 이해를 발전시키는 데 매우 유익하다. 언론을 통해 범죄 사실을 접하게 될 때 우리는 단순히 피해, 가해 사실만을 확인하며 범죄자에 대한 막연한 적대감을 품는 데 그치곤 한다. 이 책에서는 각 범죄에 대해 범죄자에게 있었던 다양한 심리적, 사회적 문제들, 범죄 발생 이후의 대응 방식과 체계의 치밀함과 소홀함을 고르게 다루어 내며 해당 범죄에 대해 독자가 매우 입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다.
책의 곳곳에는 범죄 영화를 자주 소개하고 해당 영화에서 제기하고 있는 문제를 각 장의 주제들과 잘 버무려 내고 있어 읽는 재미를 쏠쏠히 느낄 수 있었다. 자칫 딱딱하고 거리감 있게 느낄 수 있는 법학 소재를 독자 친화적으로 변모시켜내는 기술은 저자가 지닌 풍부한 지적 문화적 내공 덕분이리라 생각한다.
개인적으로 매우 인상 깊은 대목은 3장 '교소도는 감옥이 아니다'였다. 교도소의 '교육'적 측면을 부각하여 수용자를 바라보는 '교육형주의'를 극단적으로 실현한 노르웨이의 할렌 교도소 이야기는 신선함을 넘어 충격으로 다가왔다. 4성급 호텔 수준의 교도소에서 수감자들은 자유롭게 산책도 하고 다양한 문화적 경험들도 쌓아가면서 북유럽의 자연을 만끽할 수 있다는 것. 양형 수준이 매우 낮은 노르웨이가 수감자를 곧 사회로 돌아올 인격으로 바라보는 시선을 견지하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한국에서 수감자의 처우를 이런 방식으로 개선했을 때 예상되는 '국민 정서'로 감히 상상할 수 없는 비현실적인 교도 시스템이었다. 범죄자를 바라보는 시선의 근본적 차이에서 비롯되는 이러한 극단적인 다름은 아직 우리 사회가 선진적 의식을 갖추기 위해 나아가야 할 걸음이 많다는 뜻일까?
범죄는 내가, 우리 가족이 겪을 수 있는 일이기에 우리 사회의 일원으로서 해결 방법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필요하다는 저자의 생각에 전적으로 공감한다. 범죄는 우리 사회가 겪고 있는 공동의 통증을 유발해야 할 병증이고, 그 아픔은 공동체 구성원이 스스로 깊이 자각하고 그 원인과 해법에 대해 진단하고 돌아보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정재민의 <범죄사회>는 이러한 막연한 고민이 시작되고, 구체화되게 하는 촉매제가 될 수 있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