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은 의심을 멈추는 순간 시작된다 ㅣ 서양철학전집 하이엔드 고전 3
잔다르크 지음 / 클래시카 / 2026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백년 전쟁 말기 프랑스 동레미의 농민 가정에서 태어난 잔 다르크. 고작 열아홉의 나이에 화형을 당한 소녀. 이 책을 통해 그녀가 글을 읽지 못했다는 것을 알게 됐다. 마음이 아렸다.

​

잔 다르크는 기회를 기다리는 사람이 아니었다. 누군가의 허락을 기다리거나 스스로 자격을 갖출 때까지 기다리지도 않았다. 누군가는 무모하다 하겠지만 그녀는 스스로를 믿었다. 그 확신은 단 한 번도 흔들리지 않는 신념이 아니라 흔들린 후에도 다시 제 자리로 돌아오는 능력에 가까웠다.

​

​

​

​

누군가에게 나를 설명하느라 삼십 분을 쓰고 상대가 고개를 끄덕였는데도 이상하게 내가 더 작아져서 돌아오는 저녁이 있다. 말이 길어질수록 가난해지는 대화를 당신도 알 것이다.

운명은 의심을 멈추는 순간 시작된다, 29쪽

그 비참하고 서러운 귀가길을 어찌 잊겠는가. 상대는 이미 문을 단단히 걸어닫았는데 나는 '혹시' 하며 좁디좁은 틈이라도 찾아보려 납작 엎드렸던 순간들.

흔히 여전사로 일컬어지는 잔 다르크는 설득의 말이 아니라 검증의 행동을 보여줬다. 그녀는 상대에게 당장 판단할 것이 아니라 관찰해줄 것을 요구했다. 저를 한 번만 믿어주십시오, 정말 열심히 하겠습니다, 이번에는 진짜 잘할 자신이 있습니다와 같은 문장들은 판단을 구걸하는 말이다. 그 판단은 언제나 상대의 몫인데, 우리는 그것을 달라고 조르느라 시간을 낭비한다.

그렇다면 이런 문장은 어떤가. 이 방식대로 하면 다음 주 수치는 이렇게 움직일 겁니다. 이 고객은 이번 제안에 이런 이유로 거절할 겁니다. 지금 이 일정은 열흘 뒤에 이 지점에서 틀어질 겁니다. 이런 말들은 상대에게 지금 당장 판단해서 결정하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그저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채점된다. 그리고 그 채점의 주체는 상대가 아닌 나 자신이다.

때문에 아무도 나를 믿어주지 않는다며 세상을 원망하기보다 우리가 속한 곳에서 벌어질 일 하나를 골라 증명해 보자. 그 일이 어떻게 될 것 같은지, 어떻게 되기를 바라는지 날짜와 함께 적어 보자. 굳이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지 않아도 괜찮다. 그리고 그 날짜에 확인하면 된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

누군가를 믿을 이유는 애원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확인 가능한 무언가로만 만들어진다.

​

​

​

​

​

무너진 마음을 일으키는 것은 대개 설명이 아니라 사람이다. 나는 이 사실을 좀 서글프게 여기면서도 인정한다. 아무리 정확한 분석도 지친 사람을 일으키지는 못한다. 반면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 사람 하나가 옆에 서 있으면, 이상하게도 다시 해볼 마음이 생긴다.

운명은 의심을 멈추는 순간 시작된다, 122쪽

잔 다르크를 떠올릴 때면 유관순이 겹쳐진다. 그 어린 소녀들을 앞에 나서게 한 이유는 뭔가 잘못됐다는 느낌이었다. 이대로는 안 된다는 느낌, 여기 멈춰있지 말고 저기로 가야 한다는 느낌이었다.

잔 다르크는 자신의 운명을 의심하지 않았다. 성공할 거라는 확신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무엇이 되었든 내 인생을 위한 결정의 주체는 나 자신이어야 한다는 감각 때문이었다.

​

지금 돌이켜 보면 잔 다르크는 하나의 이정표였다. 지도를 가지고 있지도 않았고, 그 길을 걸어본 경험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병법을 배운 적도 없었고, 전장을 겪은 적도 없는 시골 소녀였다. 그녀로 대변되는 이정표는 길을 아는 사람이 아니라 방향을 정한 사람이다. 그리고 그 방향은 어떤 정보에서 기인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결정이었다.

​

얼마 전 아이들과 서대문 형무소에 다녀왔다. 독립 운동에 대해 접할 때마다 '과연 나였으면' 이라는 무거운 질문을 던지게 된다. 그때마다 나는 고개를 떨구곤 하는데, 이 책을 읽고 나니 생각이 조금 달려졌다. 모두가 입을 닫고 고개를 돌릴 때 잔 다르크나 유관순처럼 이정표 같은 사람이 옆에 있다면 조금 용기가 날 것 같다.

​

갱년기가 시작된 것 같다. 하루하루 더욱 즐겁게, 자신있게 살아야겠다. 내일을 의심하기보다 오늘의 광기를 믿어 보겠다.

​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