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마음은 무엇인가를 주고 나면 자연스럽게 보상을 기대하게 된다. 문제는 그 기대가 쌓이고 충족되지 못하면 '섭섭함'으로 바뀐다는 사실이다.
아이들이 어릴 때는 그저 잠만 잘 자도, 밥만 잘 먹어도, 그저 한 번 웃어만 줘도 고맙고 행복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가 않다. 내가 노력하고 희생하는 만큼 아이들도 무엇인가 눈에 보이는 결과를 내놓았으면 하고 바란다. 물론 잘 알고 있다. 아직 초등학생인 아이들에게는 그저 학교에 오가는 일만으로도 대단한 일이라는 것을. 오랜 시간을 제 자리에 앉아 재미도 흥미도 없는 수업을 듣고, 친구들과 사이좋게 지내려 애쓰는 일도 꽤나 피곤하다는 것을.
돌이켜 보면 어떠한 목적을 가지고 아이를 낳지 않았다. 지금도 그렇고 나중에도 아이들에게 바라는 것도 없다. 그런데 가끔 못난 생각이 든다. 나는 잠도 못 자고 밥도 잘 못 먹고 아이들을 위해 종종대는데 녀석들이 내 노고를 너무 몰라줄 때, 나의 희생을 너무 당연하게 받아들일 때, 약속을 지키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을 때 보람이 없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나 혼자만 발버둥치면 무슨 소용인가 싶어 기운이 빠지기도 한다.
그럴 때 나를 제자리로 돌려 세우는 것은 '부모님의 은혜'다. 아무 목표도 없이 하루하루 의미 없는 시간을 보내던 나에게 따뜻한 밥을 주고, 안전한 공간을 제공해 주셨던. 아무 대가를 바라지 않고 나의 방황을 지켜봐 주고 기다려 주셨던.
이제 내 차례다. 오늘도 세 시간 째 땀을 뻘뻘 흘리며 뛰어노는 아이들에게 더위를 식힐 음료를 제공하고, 소진된 에너지를 채울 음식을 만들고, 꿀잠을 잘 수 있도록 쾌적한 환경을 만드는 것. 그것이 나의 일이다.
<명심보감>을 접할 때마다 이 좋은 글을 조금 더 일찍 알았더라면 하는 아쉬운 마음이 든다. 그래서 아이들이 어릴 때부터 사자소학과 함께 명심보감을 자주 읽어주곤 했다. 읽을 때마다 새롭고 감동적이다. 아이들이 크고 부터는 필사도 함께 하고 있는데 괴발개발인 글씨를 보면 뾰족해지려는 마음을 다스리기 쉽지 않다. 하지만 저자의 말처럼 완성도가 아닌 문장을 대하는 태도에 중점을 두고 느릿느릿 이어가보려 한다. 반복적인 느림의 순간들이 자연스럽게 깊은 읽기인 정독으로 굳어지길 바라면서.
<명심보감>의 명심은 마음을 환하게 밝힌다는 뜻이며, '보감'은 보배로운 거울을 의미한다. 저자는 아이들이 <명심보감> 읽기와 따라 쓰기를 통해 삶의 갈림길마다 조용히 길을 비추는 작은 등불이 되기를 바랐다. 때로는 문장에 위로받고, 때로는 날카로운 질문 앞에 멈춰 서서 스스로 답을 찾아가는 그 모든 시간이, 결국 여러분을 더 단단하고 깊은 사람으로 성장시켜줄 테니 말이다. 비록 끝까지 '명신보감'이라 쓰는 아이가 있더라도, 한자를 몰라 그림 그리듯 따라 쓰더라도. 그 모든 서툰 과정은 틀림이 아니라 배움의 일부라는 것도 잊지 말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