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 깨어라 - 헤르만 헤세 청춘소설 3부작, 『수레바퀴 아래서』 『데미안』 『싯다르타』
헤르만 헤세 지음, 송동윤 옮김 / 스타북스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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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만 헤세의 청춘 소설 3부작이라니. <수레바퀴 아래서>, <데미안>, <싯다트라> 세 편을 한 권에 묶어 놓았다니. 솔직히 <싯다트라>는 아직 읽지 못했고, 앞 선 두 편은 읽었지만 아직 내 것이 되지 못했다. 이 기회에 다시는 돌아가지 못할 내 청춘을 돌아보며 후회와 그리움으로 몸부림쳐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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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는 이야기를 낳는다. 내가 쓰는 이야기는 결국 내가 읽은 이야기에 내가 만들어가고 있는 이야기를 더한 것이다.

지난 달 여기저기서 추천을 받아왔던 '까칠한 재석이' 첫 편을 읽었다. 거기서 뜻밖에 <데미안>을 만나 반가웠다.

1급 장애를 갖고 태어난 덕분에 의사의 꿈을 포기해야 했던 작가 고정욱의 <까칠한 재석이가 사라졌다>와 시대적으로도 개인적으로도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은 모자 관계라 할 수 있다. 물론 <데미안>에게도, 그 위로 올라갈수록 모체가 될만한 이야기가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세대와 세대를 건너며 제 나름의 변신을 하는 이야기들은 하나의 물음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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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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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데미안>에는 싱클레어가 있었다. 2012년 <까칠한 재석이가 사라졌다>에는 재석이가 있었다. 싱클레어에게는 프란츠 크로머와 에바 부인이, 재석에게는 병규와 보담이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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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에서 불미스러운 일을 일으킨 재석이는 사회 봉사 명령을 받는다. 이를 위해 찾은 복지관에서 오른쪽 팔을 잃고 왼팔로 서예를 가르치는 노인과 그의 손녀 보담이를 만나게 된다. 보담이는 누가 봐도 재석과 다른 부류였다. 그녀는 <데미안>에 나오는 질서와 평화가 있어 밝은 제 1의 세계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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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보다 주먹 쓰는 게 쉬웠던 재석은 되는 대로 살다 보니 폭력 서클의 일원이 돼 있었다. 한 때의 객기를 후회하며 암흑의 세계에서 빠져 나오려 하지만 비열한 족쇄를 풀어내기가 쉽지 않았다. 싱클레어 역시 마찬가지다. 어느 날 시간은 많고 할 일 없는 싱클레어 무리는 폐품더미에서 쓸 만한 것을 찾고 있었다. 그러던 중 누가 더 나쁜 짓을 했는지 우쭐거리며 무용담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집으로 돌아가면 제 1세계의 일원이 되곤 하는 싱클레어는 자신이 만들어낼 수 있는 한 가장 그럴 싸한 거짓말을 시작한다. 도둑질이었다. 물레방아 근처 과수원에서 가장 맛있는 레네테와 골든 파르메네종만 골라 훔쳤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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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를 끝냈을 때 나는 박수라도 나올 줄 알았다. 거짓말을 하다 보니 나중엔 열이 올라, 그 도둑질 이야기에 나 자신이 취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박수는 나오지 않았다.

스스로 깨어라, 23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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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츠 크로머는 재차 사실 여부를 확인했다. 정말이야? 틀림없이 네가 그 사과를 훔쳤어? 하느님과 영원한 행복을 걸고 맹세할 수 있어? 크로머가 만족한 듯 웃을 때까지만 해도 싱클레어는 자신의 연기력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것이 스스로를 옳아맬 족쇄가 되리라는 것을 전혀 알지 못한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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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로머는 사과를 훔친 범인, 즉 싱클레어를 신고하고 포상금 2마르크를 받을 계획이었다. 싱클레어의 치밀한 거짓말이 자백이 된 셈이었다. 거짓말쟁이와 범죄자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는 싱클레어는 엄마의 방에 몰래 들어가 저금통을 훔친다. 하지만 고작 65페니히뿐이었다. 크로머는 마치 빚쟁이라도 되듯 나머지 1마르크 35페니히를 받아내기 위해 싱클레어 주위를 맴돌며 목을 조여온다. 싱클레어는 그 순간 깨달았다. 악마가 내 손을 붙잡았다고. 어쩌면 평생 나를 괴롭힐 원수가 내 뒤를 바짝 쫓기 시작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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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새가 알에서 나오기 위해 싸우고 있는 것이다. 그 알은 세계였다. 세계는 산산이 부서져야만 했다.

스스로 깨어라, 44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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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석은 이름처럼 예쁜 보담이와 제 1 세계에서 어울릴 꿈에 부푼다. 하지만 "너는 책 많이 읽니?"라는 그녀의 물음 앞에 백지가 되고 만다. 그날 집으로 돌아오는 길 재석은 서점에 들렀다. 여러 종류의 데미안들 중에서 가장 싸고 얇은 것을 골라 샀다.

담배를 끊고 <데미안>을 읽은 재석은 폭력 서클의 짱인 병규에게 탈퇴를 선언한다. 결자해지라 했다. 재석이가 스스로 알을 깨고 나가기 위해 선택한 탈퇴 조건은 엉덩이 삼백 대 맞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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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클레어의 알 깨기를 도운 것은 전학생 데미안이었다. 숨길 수 없는 성숙함의 지닌 그는 작문 시간에 들은 카인과 아벨 이야기를 제 나름대로 해석해 싱클레어를 뒤흔든다. 그러더니 전 세계로 번질 대전쟁에 참전하면서 싱클레어에게 당부한다.

"잘 들어, 싱클레어. 난 곧 여길 떠나야 할 것 같아. 너는 언젠가 다시 나를 찾게 될 거야. 하지만 그때는 네가 부르다고 예전처럼 말이나 기차를 타고 너에게 갈 수 없어. 그때는 네 자신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봐. 네 마음속에 내가 있다는 걸 알게 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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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싱클레어는 열쇠를 찾아 마음의 문을 열고 자신 안으로 들어가 고통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터득했다. 내부 세계 깊숙한 곳의 마음의 거울에는 운명의 모습이 비치고, 그 어두운 거울 위로 허리를 굽히기만 하면 자신의 모습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깨닫는다. 거울 속 그 모습은, 친구이자 인도자였던 데미안을 닮았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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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미안>을 읽고 나면 싱클레어의 홀로서기도 궁금하지만 데미안의 훗날은 어땠을지 생각해 보게 된다. 그 아쉬움을 '까칠한 재석이' 시리즈로 달래봐야겠다. 그나저나 "사람이 무슨 알에서 깨어 나냐? 사람은 포유류인데."라고 했던 재석이 친구 민성이는 어떻게 지내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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