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같은 아이도 공부할 수 있을까요?
김주현 지음, 최미란 그림 / 만만한책방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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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다 보면 하던 일을 멈추게 하는 질문을 만나게 된다.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 같은. 섣불리 대답하지 못하는 이유는 할 말이 너무 많거나 할 말이 하나도 없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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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평생 만날 수 없었을 지도 모르는 두 사람이 있다. 강진으로 유배를 온 조선의 실학자 다산 정약용과 그 곳에서 나고 자란 소년 산석이다. 이들은 알 수 없는 이끌림에 서로를 지켜보며 기다린다. 그동안 정약용은 주막의 주모가 세월과 함께 스스로 깨친 공부를 통해 질문의 참의미를 깨닫게 된다. 질문이란 내가 알고 익숙하게 지내 온 세상에 틈을 내는 것이다. 다산은 '이상한 세상'을 살면서 억울하지 않았고, 불편하지도 배고프지도 않았다. 때문에 그 '이상함'을 궁금해하지도, 답답해하거나 분노하지도 않았다. 이제 제대로 된 질문을 할 때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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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힌 것을 뚫는 자세는, 별 수 없이 계속해 보는 것뿐입니다. 별 수 없이 그렇게 한결같음으로 한 걸음씩 걸어 보는 일이기에 오히려 둔하고 느린 석이 같은 아이가 마침내 해낼 수 있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저 같은 아이도 공부할 수 있을까요?, 4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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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렵게 마주한 선생님 앞에서 석이는 어찌할 바를 모른다. 하지만 다시는 없을지도 모를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는 않다.

"저 같은 아이도 공부할 수 있을까요?"

산석은 자신이 둔하고 앞뒤가 꼭 막혀 융통성이 없으며 고지식하다고 이실직고했다. 스스로 발견한 모습인지, 주변에서 툭툭 던진 말을 오래 들어 그런가보다 하는 건지 모르겠다. 하지만 석이는 자신에 대해 모르는 게 있었다. 단정한 용모에 마음도 깨끗하고 글씨도 제법 반듯해서 글 쓰기에 좋은 자질을 가졌다는 것을. 조심스레 배우고 싶은 마음을 내보이는 모습에 꿀이라도 발라놓은 듯 반짝이는 여린 이파리를 볼 때처럼 마음을 찡하게 만든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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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의 시작은 햇볕이 잘 드는 책상에 앉는 것이었다. 정약용이 모셨던 임금 정조도 강조하던 것이었다.

"무릇 사람은 책을 읽고 공부를 하지 않더라도 때때로 책상을 문지르기만 해도 좋다고 했다. 내가 평일에는 책 읽기를 즐기지만, 혹 업무가 많아서 책 읽을 여유가 없을 때에는 일찍이 그 말을 떠올려 책상에 마음을 노닐고 눈을 머물게 하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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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부터 정약용이 내어준 책상은 산석의 세계가 되었다. 책상 앞에 앉아 문장을 따라 쓰고, 책을 읽었으며 책상 곳곳을 가만히 문질러 보았다.

석이보다 뒤늦게 공부를 시작한 아이들이 책을 휙휙 읽어가며 빠르게 문장을 익혔다. 다들 일찍이 공부를 끝내고 공차기를 하거나 멱을 감으로 개울로 달려갈 때도 석이는 자신만의 느림과 둔함으로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하던 공부를 마치고는 했다. 석이의 공부는 '더 많이, 더 빨리'와는 거리가 멀었다. 다산은 그런 석이가 뿌리를 깊게 내리고 천천히 오래오래 자랄 재목이라 생각한다. 꾸준함 역시 재능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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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우리는 과거도 좋지만, 부끄러움을 아는 공부를 하려는 것이다. 부끄러움을 모르면 제아무리 아는 게 많아도, 사람이 사람으로 살아가는 데 전혀 도움이 안 되는 법이니까."

저 같은 아이도 공부할 수 있을까요?, 1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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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석에게도 슬럼프가 찾아왔다. 논일 밭일하느라 피곤한 몸을 곧추세우고 앉아 책을 읽고 글을 쓰면 뭐 하나. 한양까지 올라가고 내려올 시간과 노잣돈도 없고, 과거 시험을 볼 수 있는 기회조차 없는데. 공부만 할 수 있어도 좋겠다던 마음은 어디 갔는지, 잔뜩 심통이 난 석에게 다산은 공부의 목적과 의미에 대해 이야기했다. 과거 시험을 위한 공부가 아닌 평생 스스로 깨우쳐 자신을 지키고 자라게 하는 진짜 공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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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

저 같은 아이도 공부할 수 있다 해 주셔서요.

저처럼 둔하고 미련한 아이도 공부할 수 있다 해 주셔서요.

이렇게 머리카락이 하얗게 되어서도 공부하는 즐거움으로 살 수 있게 해 주셔서요. 공부가 이렇게 제 안에 아름다운 것들을 기르는 일이라는 걸 알게 해 주셔서요.

저 같은 아이도 공부할 수 있을까요?, 13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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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이 흐르고 흘러 다산은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하지만 스스로에 대한 믿음이 부족했던 소년 석이의 물음에 대한 그의 대답이 가진 힘은 놀라웠다. 산석이 일흔이 넘도록 책상에 앉아 즐겁게 공부할 수 있게 해 주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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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오랜 시간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마음만은 누구보다 가까웠던 두 사람. 자신만의 속도와 방향으로 평생 배움을 놓지 않았던 스승과 제자의 모습을 통해 나를 돌아본다. 해야 할 일도, 하고 싶은 일도 많지만 시간이 없다는 핑계로 발만 동동 구르는 어리석은 자여. 시작하자. 매일매일의 꾸준함이 시시하게 보여도, 세상의 모든 것들은 꾸준함으로 싹틔우고, 꽃 피우고, 열매를 맺는다. 그러니 그저 부지런히 하면 된다. 부지런히 하면 된다. 부지런히 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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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든 무엇이든 나도, 너도, 우리 모두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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