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정 밖의 이름들 - 법 테두리 바깥의 정의를 찾아서
서혜진 지음 / 흐름출판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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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브스토리는 감동적이라서 재미있다. SF 소설은 놀라워서 재미있다. 미스터리는 무서워서 재미있다. 그리고 이 책, <법정 밖의 이름들>은 필요해서 재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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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를 보지 않는 탓에 저자에 대한 정보가 별로 없었다. 하지만 책날개에 나와 있는 그녀의 행보만으로도 물개 박수를 치고 싶어졌다. 이화여자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대학원에서 법학 석사 학위를 받은 서혜진 변호사는 동대학원에서 법학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그야말로 '변호사 어벤저스'다.

이후 로펌에서 변호사 생활을 시작했는데 경력이 쌓일수록, 만나는 사람들이 늘어날수록 법률 조력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 범죄 피해자에게 마음이 향했다. 책을 다 읽고 난 뒤 어쩌면 그런 것이야말로 '운명'인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반드시 그녀여야만 하는, 오직 그녀일수밖에 없는, 거스를 수 없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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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가 가진 가장 좋은 옷과 액세서리를 하고, 누구보다 멋진 모습과 확신에 찬 태도로 이들 옆에 서 있어야 한다. 회색빛의 변호사가 아닌 생동감 넘치는 변호사로 말이다. 삶이 한순간(어쩌면 점차적으로) 잿빛이 된 사람들에게 내가 해줄 수 있는 일은, 그들이 잃어버린 색을 되찾아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법정 밖의 이름들, 3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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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나라를 떠들썩하게 했던 이름들이 있다. 고은, 이윤택, 안희정 등. 그들은 자신의 권력을 이용해 성범죄를 저질렀다. 숨어 지내던 피해자들에게 손을 내밀고, 그들이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도와주고, 가해자들이 처벌을 받을 때까지 피해자들의 곁에는 서혜진 그녀가 함께였다. 그 때문인지 언제부터인가 언론 및 방송에서 그녀에게 '사회적 메시지를 가진 변호사'라는 의미로 '인권 변호사'라는 그럴 듯한 프레임을 씌워 주었다. 하지만 그녀는 실제 존재하지도 않고, 출처도 불분명한 그 거추장스러운 감투를 거부한다. 왜냐하면 그들이 말하는 '인권 변호사'라 함은 돈을 받지 않고 사람들 도와주는, 행색도 화려함과는 거리가 먼, 수수하도 못해 허름할 수도 있는, 마더 테레사 같은 인격과 배려심으로 충만한, 돈과 물질에 아무런 욕망도 미련도 없는 석가모니 같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런 변호사가 어딘가 존재할 수도 있지만 그녀는 당당하게 말한다.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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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겉모습을 챙기려 노력하는 이유는 외관에 집착해서가 아니고 돋보이고 싶어서는 더더욱 아니다. 피해자인 의뢰인들이 번듯한 자신을 보고 자신의 곁에 그래도 괜찮은 사람이 있다고 안심했으면 하는 바람이 있기 때문이다. 이토록 든든한 내 편이 있다면 더 이상 숨어지내지 않고 세상을 향해 발차기해볼 만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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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가 아니라는 감각. 이 감각이야말로 가장 근본적인 회복의 조건이다. 나는 피해자들을 도우면서 그들과 나 사이에 '같은 감정'이 무수히 흐르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상실감, 분노, 무력감, 희망과 절망 사이를 오가는 감정들. 이 모든 감정은 말해져야 하고, 인정받아야 하고, 지지 받아야 한다.

법정 밖의 이름들, 23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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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의 영향인지 변호사라고 하면 산처럼 쌓인 서류 더미 가운데 앉아 골머리를 앓고 있는 모습이 떠오른다. 하지만 실상 변호사의 가장 큰 일과는 사람을 만나는 일이다. 인기 변호사가 된 저자는 의뢰인 뿐 아니라 강연을 하면서도 많은 사람들을 만난다. 특히 상담사, 활동가, 경찰, 공공기관의 고충처리 담당자, 피해자 지원 단체 실무자들 등 피해자들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을 만날 때면 빠트리지 않는 말이 있다.

"스스로 다 태워버릴 이유는 없어요. 절대 스스로를 소진하지 마세요. 여러분이 불에 타 없어져 버린다면, 피해자를 돕는 이 모든 과정도, 결과도, 결국 아무 의미가 없어집니다."

강연장에서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의 심정은 어땠을까. 그동안 자신들이 만나왔던 피해자들의 얼굴이 스쳐지나갔을 것 같다. 아파하고 괴로워하다 끝내 생을 놓아버리려 했던 이들 곁에서 아무 도움이 되지 못하는 것 같아 무력감에 시달렸던 날들도.

저자 역시 매일 피해자들의 고통을 마주하다 보니 지칠 수밖에 없었다. 다하여 없어질 것 같은 상태는 감정의 고갈로 이어져 공감과 돌봄이 의무가 돼 버렸다. 피해자들을 지원하려다 스스로를 돌볼 여유가 없었다. 위험 신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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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랍게도 위기 상황에서 박차고 나올 수 있었던 것은 다름 아닌 '발화'였다. 저자에게 언어는 사건 해결과 세상 살이를 위한 중요한 단서다. 현상과 감정을 설명하고, 누군가를 설득해 공감을 이끌어 내는 과정에는 언어의 역할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어린 아이가 성폭행을 당했을 때, 아이는 그 상황을 표현할 만한 언어를 가지고 있지 않다. 자신이 당한 일이 무슨 일인지도 모르고, 어떤 감정을 느껴야 하는지조차 막막하다. 단순히 어휘력이 떨어진다거나 말재주의 문제가 아니다. 인간의 사고 범위는 우리가 가진 언어의 한계를 넘어서기 어렵기 때문이다. 성범죄처럼 피해자가 피해 사실을 증명해야 하는 상황에서 이는 굉장히 불리한 조건으로 작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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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 각지에서 피해를 들여다보고 지원하는 사람들을 한 자리에 모인 자리에서 저자는 피로, 두려움, 책임감을 동력으로 강연을 진행했다. 법률과 형사 절차에 관한 내용이었는데 며칠 밤낮을 고민하며 자료를 만들고, 연습했던 대로 강의가 진행될수록 언어로 구조화된 어떤 감정이 다시 그녀의 몸에 흐르기 시작했다. 저자의 말을 듣고 감정이 정리됐다거나 우리 일을 제대로 이해해줘서 고맙다는 말이 그녀의 빈 곳을 채웠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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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변호사로서 강연장에서 전문 지식을 전달하지만 감정의 언어를 교환한다고 믿는다. 참석자들과 이야기를 주고 받으며 과거를 정리하다 보면 혼자서는 알 수 없었던 의미를 얻기도 한다. 그녀와 만났던 사람들, 그들의 목소리와 눈빛이 문장으로 다시 그녀에게 돌아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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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초록 검색창에 사람 이름을 쳐 보았다. 서혜진. 나보다 한 살 언니다. 시대적으로 비슷한 일을 겪고 보고 들으며 자랐을 그녀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힘들고 귀찮고 무서울 때도 많았을 텐데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을 '총대 메고' 해 주어서. 당분간 어디서 책 얘기를 할 기회가 생기면 <법정 밖의 이름들>에 대한 대대적인 홍보를 할 것 같다. 마치 잘 아는 언니가 쓴 책인 것처럼. 다음 인용구를 외워서 그 언니가 이런 말도 했다며 들려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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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꽃은 재가 되고 나서도 다음 불씨를 일으키는 힘이 된다.

누군가를 돕는 일이 나를 태우는 불이 아니라 다시 일어서는 힘이 되기를 바란다.

나 혼자만의 불이 아니라 우리가 함게 이어붙이는 불꽃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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