펄럭이는 세계사 - 인간이 깃발 아래 모이는 이유
드미트로 두빌레트 지음, 한지원 옮김 / 윌북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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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립고도 그리운 초등학교 운동회 날. 하늘을 가득 채운 만국기를 올려다보던 작은 나를 떠올려본다. '비슷한 국기가 많네.' 하면서. 나라마다 국기가 다르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각 국기마다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알지 못했던 내게 그것들은 그저 다른 모양과 다른 색깔의 향연이었다. 하지만 줄무늬와 십자가, 그리고 별이 많다는 것쯤은 금방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 후 30여년이 지난 지금, 왠지 바람에 나부낄 것만 같은 표지의 이 책 <펄럭이는 세계사>를 만나 많은 미스테리가 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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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두 종류의 국기가 있다. 태극기보다 그리기 쉬운 국기, 태극기보다 그리기 어려운 국기. 직사각형을 삼등분한 뒤 왼쪽부터 파랑, 하양, 빨강으로 칠하면 되는 프랑스의 국기는 전자에 속한다. 프랑스 뿐 아니라 가로나 세로로 삼등분한 국기를 두세 가지의 색으로 채운 국기가 꽤 많다. 가깝게는 이탈리아와 헝가리, 루마니아 등 유럽 일대의 나라들을 꼽을 수 있다. 멀게는 중앙아프리카 공화국, 차드, 말리 같은 아프리카 대륙의 나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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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프랑스 삼색기의 전신이 된 것은 파리의 시기였다. 직사각형을 이등분해서 왼쪽부터 파랑, 빨강으로 채운 파리 시기는 이후 아이티 공화국, 리히텐슈타인 등이 국기에도 영향을 미쳤다.

파리의 상징색인 파랑과 인민을 상징하는 빨강 사이에 부르봉 왕가를 상징하는 흰색이 자리하게 된 것은 1789년에 일어난 바스티유 감옥 습격 사건과 깊은 관련이 있다. 프랑스 혁명의 시발점이 된 이 사건 이후 프랑스의 국기는 여러 변화를 거치게 된다. 한 때 삼색기의 줄무늬 순서가 왼쪽부터 빨강, 하양, 파랑이었던 적도 있고, 줄무늬 폭의 비율이 지금처럼 삼등분이 아닌 파랑, 하양, 빨강 각각 30, 33, 37로 조금씩 달랐던 때도 있었다.

또 프랑스 곳곳에서는 색조가 다른 두 종류의 삼색기를 만날 수 있다. 1976년 원래 것보다 밝은 색조가 사용된 삼색기가 도입되었는데, 텔레비전 화면발을 좀 더 잘 받기 위해서였다. 대통령이 대국민 연설을 할 때 세 가지 색 모두 잘 보이게 하기 위해서 줄무늬 폭을 조정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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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살피나 공화국은 1802년 국명을 이탈리아 공화국으로 국명이 바꾸었다. 이 신생국가의 국기는 빨간색, 흰색, 초록색의 정사각형이 서로 겹쳐진 매우 특이한 형태였다. 그로부터 2년 후 나폴레옹이 스스로를 황제로 선포하며 이탈리아 공화국 국기 한 가운데에 자신을 상징하는 독수리를 추가하면서 정사각형 모양은 폐기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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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국기의 세 가지 색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서는 공식적인 해석이 존재하지 않지만, 한 가지 설은 믿음, 소망, 사랑을 뜻한다는 것이다. 그보다 더 보편적인 설에 따르면 초록은 지중해의 초목을, 하양은 눈 덮인 알프스를, 빨강은 이탈리아 통일 투쟁을 상징하기도 한다.

펄럭이는 세계사, 2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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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 사람들은 직사각형을 삼등분해 왼쪽부터 초록, 하양, 빨강으로 채운 이탈리아 국기를 보며 입맛을 다시기도 한다. 바질과 모차렐라 치즈, 그리고 토마토 소스만으로 만든 마르게리타 피자 덕분이다.

이 단순함은 헝가리 국기의 탄생 과정에서도 엿볼 수 있다. 1848년 유럽 전역을 휩쓴 혁명의 물결은 '국민국가들의 봄'이라 흔히 알려져 있다. 이탈리아처럼 헝가리도 프랑스 혁명에 영감을 받고 오스트리아 제국에 맞서 궐기했다. 그리하여 초록, 하양, 빨강이 세로 줄무늬를 이룬 삼색기를 국기로 채택해 투쟁하려 했으나 이탈리아가 이미 수십 년 전에 선수를 쳤다는 것 뒤늦게 알아차리고 대신 같은 색 배열의 가로 줄무늬를 선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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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프랑스 국기는 전 세계의 수십 개 국가에서 그 흔적을 어렴풋하게 엿볼 수 있지만, 프랑스 삼색기가 온전하게 들어가 있는 다른 국기는 없다. 한 나라의 국기가 완전한 형태로 다른 국기에 등장하는 일로는 프랑스가 영국을 부러워하며 한 발 물러설 수밖에 없으리라. 자, 다음 정차할 곳이 바로 영국이다.

펄럭이는 세계사, 3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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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정차역을 쭉 따라가다 보면 유니언잭을 거쳐 태극기와 일장기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국기의 역사와 의미에 대해 흥미로운 이야기가 가득하다. 이 책의 저자인 드미트로 두빌레트는 젤렌스키 정부의 내각 장관을 지내기도 한 인재이다. 어릴 때부터 국기에 대해 지대한 관심이 있었던 그는 코로나 19 봉쇄가 닥친 2020년에 작심하고 이 책을 써내려갔다. 삶이 레몬을 주거든 그것으로 레모네이드를 만들라고 하던데 이쯤되면 그가 슬기로운 격리생활을 했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겠다. 덕분에 이제 만국기를 보며 역사와 사람, 그리고 이야기를 떠올릴 수 있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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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충일이다. 태극기와 함께했던 많은 분들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보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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