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권, 두 권, 책의 마지막 장을 덮을 때마다 그 책을 시작할 때와 달라진 나를 만나게 된다. 내가 잘 아는 이야기는 잘 알아서 좋고, 내가 하나도 모르는 이야기는 또 하나도 몰라서 좋다. 그런 면에서 '시'는 내게 드디어 알 것 같기도 하고, 영영 모를 것 같은 이야기다.
혹자는 말한다. 요즘 같은 시대에 '시'가 웬말이냐고. 하지만 나민애 쪽 사람들은 말한다. 요즘 같은 시대일수록 시를 읽어야 한다고. 컵의 반쯤 차 있는 물을 보고, "반이나 남았네." 와 "반 밖에 없잖아."라는 다른 반응을 이끌어내는 건 당시 그 사람의 심경이다. 목이 말라 한 컵 가득한 물이 필요한 사람과 목이 마르지 않아 남아 있는 물을 양보할 수 있는 사람. 이 순간을 발견하는 것이 시인이다. 물 한 모금이 절실했던 사람이 남아 있는 물이 쏟아져도 개의치 않게 되는 시간의 흐름을 따라가는 것도 시인이다.
괜찮아 - 한강
태어나 두 달이 되었을 때
아이는 저녁마다 울었다
배고파서도 아니고
어디가 아파서도 아니고
아무 이유도 없이
해질녘부터 밤까지 꼬박 세 시간
거품 같은 아이가 꺼져버릴까 봐
나는 두 팔로 껴안고
집 안을 수없이 돌며 물었다
왜 그래,
왜 그래,
왜 그래,
내 눈물이 떨어져
아이의 눈물에 섞이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말해봤다
누가 가르쳐준 것도 아닌데
괜찮아.
괜찮아.
이제 괜찮아.
거짓말처럼
아이의 울음이 그치진 않았지만
누그러진 건 오히려
내 울음이었지만,
다만, 우연의 일치였겠지만
며칠 뒤부터 아이는 저녁 울음을 멈췄다
서른 넘어서야 그렇게 알았다
내 안의 당신이 흐느낄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울부짖는 아이의 얼굴을 들여다보듯
짜디짠 거품 같은 눈물을 향해
괜찮아
왜 그래,가 아니라
괜찮아
이제 괜찮아.
어느새 12살, 10살이 된 나의 아이들도 참 많이 울었었다. 겨우 겨우 잠이 든 것 같아 눕히려하면 등이 바닥에 닿자마자 눈을 번쩍 뜨고 울었다. 그런 아이를 안았다가 업었다가하며 가느다란 가로등 불빛이 새어 들어오는 집 안을 서성이며 보내던 그 수많은 밤들. 제대로 자지도 먹지도 못해 으스러져버릴 것 같았던 시간이었다. 그때 이 시를 만났더라면 어땠을까. "왜 그래, 도대체 나한테 어쩌라는 거야!"가 아닌 "괜찮아, 괜찮아. 우리 모두 괜찮아."였다면 어땠을까.
저자는 말한다. 선비에게 문방사우가 있다면 시인에게는 무용한 아름다움이 있다고. 이백은 달을 노래했고, 윤동주 시인은 <별 헤는 밤>을, 김춘수 시인은 <꽃>을, 마종기 시인은 <바람의 말>을 썼다. 죽도 밥도 되지 않는 순간적으로 왔다가 금방 사라지는 무용한 것들. 하지만 결국 우리는 알게 된다. 찰나의 머무름이라서, 돌아갈 수 없는 시간이라 더욱 아름답다는 것을.
10살 때 만났던 나의 첫 번째 국어 교과서에는 '첫사랑'이라는 제목이 어울린다. 함께할 수만 있다면 내가 가진 것이 무엇인지, 얼만큼인지도 모르면서 몽땅 다 내어줄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마흔 살이 넘어서 만나게 된 나의 두 번째 국어 교과서는, 글쎄 어떤 제목이 좋을까. 좀 더 많이 살아봐야 알 것 같다. 시험과 숙제에서 해방된 흥미진진한 두 번째 국어 수업이 기대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