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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편력기 - 유쾌한 지식여행자의 세계문화기행 ㅣ 지식여행자 8
요네하라 마리 지음, 조영렬 옮김, 이현우 감수 / 마음산책 / 2009년 12월
평점 :
품절
일본에서 태어나 체코 프라하에서 소녀시대를 보내고 일본에서 청소년기를 지낸 뒤 러시아 동시통역사이자 작가로 이름을 알린 요네하라 마리. 2006년 난소암으로 세상을 떠난 그녀의 남겨진 글을 모아 <문화 편력기>가 나왔다. 한 곳에서 나고 자란 텃새가 아닌 세계를 무대로 종횡무진 뛰어다닌 '세계인' 마리의 갇혀있지 않은 시선과 유머를 음미할 수 있는 마지막 책이다.(라고 쓰고 그런 줄 알았는데, 그녀의 책이 계속 나오고 있습니다)
요네하라 마리의 다른 저서인 <프라하의 소녀시대>를 읽을 때, 한국에서는 (특히 남한에서는) 상상도 못할 소녀시대를 겪은 그녀가 신기하다는 생각을 했다. 일본에 공산당이 있다는 것도 놀랍고 그런 아버지를 따라 사회주의 국가인 체코에서 소련이 운영하는 학교를 다녔다는 대목에선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세상에는 사회주의를 채택한 나라가 있긴 하다. 하지만 내가 받은 교육은 '그런 곳은 사람이 행복하지 않은 곳'이자 '사람이 살 만한 곳이 아닌 곳'이란 걸 강조한다. 그렇지만 마리는 동양인으로 유럽에서 인종차별을 받을 지 언정 사람이 살 만한 곳이 아닌 데서 불행한 소녀시대를 보낸 건 아니었다. 공산당은 늑대가 아니었고 '사회주의 국가도 사람사는 곳이구나'하는 인식이 일종의 문화충격처럼 다가왔다. <프라하의 소녀시대>에서 사회주의 국가가 붕괴되는 과정에서 함께 소녀시대를 보낸 친구를 찾아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던 마리는 <문화편력기>에서 세계를 종횡무진 달리는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인문학 에세이인 <마녀의 한다스>와 음식 이야기가 가득한 <미식견문록>의 분위기가 묘하게 어우러지고 부모 이야기까지 곁들여져 표지의 여성처럼 침대에 누워 편하게 즐길 수 있는 그런 책이다.
속담이야기를 할 때도 재미있는 각 나라 속담을 인용해 이야기를 확장한다. '제비 한 마리가 여름을 가져오는 것은 아니다'라는 영어 속담으로 시작한 이야기는 러시아와 프랑스 속담을 거쳐 이솝우화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결국에는 러시아작가의 인용문까지 가져오며 다양한 시선을 제시한다. 이런 글을 읽고 있자니 '꽃피는 봄이 오면 내 곁으로 온다고 말했지. 노래하는 제비처럼' 이라는 노래가사가 떠오르는 난 영락없는 한국인이다.
이런 이야기는 읽을 때마다 재미있고 신선하다. 책에서 배웠던 '어떤 기후대이고 강우량이 얼마이다' 라는 단편 지식보다는 '추운 나라에서는 수영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야 하기에 부자들이 수영을 하지만 따뜻한 나라에서는 언제나 수영을 할 수 있기에 오히려 부자인 사람은 물에 들어가질 않는다'라는 이야기가 훨씬 재미있다. 이런 이야기가 가득한 책은 그동안 단편 지식을 뽐내던 나를 돌아보게 한다. 세상은 넓고 다양한 데 한꺼풀만 벗기면 사라지는 지식보다는 몸으로 직접 겪고 느낀 체험이 얼마나 소중한 지를 새삼 깨닫게 한다.
요네하라 마리는 세상에 없지만 그녀가 남긴 책들은 여전히 이념과 국경을 뛰어넘어 세상 여러 곳의 다양한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뚱뚱하고 공산당인 아버지가 자랑스러웠고, 아이를 안아주는 데 인색했던 어머니가 치매에 걸린 이후 누구보다 다정한 어머니가 되었다는 이야기에 부모에 대한 깊은 정도 느낄 수 있었다. 마리의 유쾌한 유머와 정곡을 찌르는 한 마디가 그립다면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다만, 18세기 프랑스 철학자이자 교육학자인 루소는 반어법을 써서 이것을 훨씬 인상적으로 표현했다.
"아이를 망치는 법은 간단하다. 아이가 갖고 싶어 하는 장난감을 몽땅 사주면 된다."
어쩐지 물건이 차고 넘치는 21세기를 사는 우리 이야기인 것 같아서 씁쓸하기는 하지만. - 175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