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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녀냐 추녀냐 - 문화 마찰의 최전선인 통역 현장 이야기 ㅣ 지식여행자 3
요네하라 마리 지음, 김윤수 옮김 / 마음산책 / 2008년 1월
평점 :
품절

러시아어 동시통역사이자 작가로 알려진 요네하라 마리, 그녀에게 '작가'라는 직함을 가져다 준 첫 책이 <미녀냐 추녀냐>이다. 통역이라는 싸움터에서 치열하게 싸우고 있는 통역사가 쓴 책이라 평소 언어와 문화에 관심이 높았던 사람이라면 읽어보라고 내밀고 싶은 책이다.
<미녀냐 추녀냐>는 '통역'이란 어떤 것인지에 대한 설명을 비롯해 통역 현장에서 벌어진 웃지 못할 이야기들, 통역에 관한 방법론까지 그녀만의 유머가 버물어져 어느 순간 미소가 그려지는 그런 책이다. 마리는 스승의 입을 빌어 통역사란 '2명의 주인을 받들어야 하는 하인'이라 말하면서도 말하는 이가 말하고자 하는 이야기의 중심을 끄집어내 듣는 이가 이해할 수 있도록 말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2명의 주인을 받드는 하인이지만, 이 하인이 없다면 2명의 주인은 결코 한 마디도 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른다. 두 사람 사이를 이어줄 수 있는 힘을 가진 통역사는 고용된 입장에서도 자신만의 기준과 중심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는 소리다.
결국 통역이라는 건 강대국이 약소국에 자신의 언어를 강요할 때, 약소국이 자신의 언어를 소중하게 여기지 않을 때는 결코 성립할 수 없는 일이다. 강대국이 강요한 언어에 약소국의 언어가 흡수해 버리면 세상에 '통역사'라는 직업 자체가 성립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리는 '모국어는 공기와 같은 존재'라고 말한다. 공기처럼 평소에 고마움을 느끼지 못하지만, 막상 사라지게 된다면 그 무엇보다 불편함을 느끼는 그런 존재 말이다. 영어로 연설하고 싶은 총리대신에게 (자신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기회를 얻는 것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언어에는 민족성과 문화가 스며들어 있기에 각각의 국민이 평등하게 자신의 모국어로 자유롭게 발언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이 중요하다(281p)고 말한다. 이는 영어 몰입 교육이네 조기 교육이네 하면서 영어에만 열을 올리는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외국어를 잘하고 싶다면 먼저 모국어를 잘 알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다분히 일상생활에서 쓰고 읽는 정도의 모국어가 아니라 주어는 무엇인지 술어는 무엇인지 모국어도 외국어처럼 객관화해 외국어처럼 바라보며 공부를 하란 것이다. 이런 과정은 모국어의 소중함을 느끼는 동시에 실력 향상에도 도움이 되고 결국 외국어를 잘하는 길이라고 말한다.
<미녀냐 추녀냐>는 '부정한 미녀냐 정숙한 추녀냐'라는 원제를 줄인 제목이다. 여기에 나오는 부정, 미녀, 정숙, 추녀는 통역사들이 자주 쓰는 인용문에 나오는 단어다. 원문에 충실하면서도 문장이 아름답다면 '정숙한 미녀'가 될 수 있지만 이처럼 한 언어를 다른 언어로 완벽하게 옮기는 건 통역에 있어 이상향에 가깝다. 대부분의 통역사는 '정숙한 추녀'나 '부정한 미녀'에 도달하려고 노력하고 '부정한 추녀' 되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 단순히 외국인과 말을 하기 위해 배우는 외국어라면 학원에 열심히 다니는 것으로 가능할 지 모른다. 하지만 통역은 화자의 언어를 청자의 언어로 바꾸는 일이다. 모든 언어에 대응하는 단어가 존재한다면 다행이지만 이런 일은 그렇게 자주 일어나지 않는다고 한다. 언어는 한 나라의 이야기가 들어 있는 서사이자 민족의 개성을 드러내는 존재이다. 단순히 말을 하는 수단이 아니라 그 나라를 이해하는 도구로서 언어를 대한다면 모국어를 대하는 자세 뿐 아니라 외국어를 배우는 마음가짐도 달라질 것이라 생각한다.
다른 문화가 첨예하게 대립하는 전쟁의 선봉에 있었던 마리의 언어와 문화 이야기, 하늘에서 내려다보며 마리가 이럴 지도 모른다. "이봐, 이제서야 내 첫 책을 본거야." 라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