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1336
우지혜 지음 / 신영미디어 / 2017년 3월
평점 :
품절

키워드 : 현대물, 연하남, 연상녀, 상처녀, 이혼녀, 순정남, 공사장 인부, 이름부터 멍뭉남, 현실인 듯 현실 아님
나는 그 앞에 서서 가만히 여자를 훑어보았다. 마스크와 멍 때문에 도무지 얼굴을 그려 낼 수 없는 여자. 이런 후미진 동네의 후미진 집에 밤처럼 소리 소문 없이 스며든 여자. 의료 도구를 가지고 있고, 상처를 꿰맬 줄 아는 여자. 그리고.
아마도 남편의 폭행에서 도망쳐 온 여자. - 52p.
백구는 순수했다. 입이 거칠고 눈빛이 험상궂긴 했지만 갑자기 들이닥친 나를 순순히 받아주고, 걱정해 주고, 화를 내 줄 정도로 순수했다. - 146p.
후미진 동네의 후미진 집에 홀로 사는 조백구. 가슴에 있는 반점 때문에 '백구'라는 이름이 붙은 24세, 중졸 학력의 공사장 인부다. 비 오는 날, 머리를 풀어헤친 그녀와 마주치고 기절한다. 얼굴을 숨기길래 범죄자인가 했는데, 맞은 흔적을 보고 폭행에서 도망친 여자임을 깨닫는다.
허물어져 가는 빈 집에 스며든 그녀가 신경 쓰이는 백구. 비록 가방끈이 짧고 몸쓰는 일을 할지언정 타인을 대하는 데 있어 순수하고 진심을 다하는 남자다. 자신을 때리던 아버지가 죽고 7년을 홀로 살며 그저 현재에 충실한 삶을 살았다. 옆집 여자 백사에게 다른 감정이 생기면서 자신의 미래를 그려본다. 그리고 언젠가 그녀가 떠나고 남겨질 자신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히는 듯하다. 아무리 남의 것이라 해도, 없었던 때가 생각나지 않을 정도로 좋은 그녀를 포기할 수 없을 것 같다.
사실은 예전 옆집 누나인 백사(백사희). 자신을 때리는 어머니, 가난한 동네에서 벗어나기 위해 공부만을 팠고 옆을 돌아볼 시간조차 없었다. 너무 힘들어 딱 한 번 요령을 피워 남자의 손을 잡았는데, 그게 자신을 억누르는 폭력의 구렁텅이가 될 줄 몰랐다. 폭력의 공포에 지지 않으려, 이러다가 진짜 맞아죽을 것 같아 도망쳐 나온 백사. 그녀가 돌아간 곳은 후미진 동네, 백구의 옆집이었다.
'109'와 '104'로 시점을 분리하고, '109×104'에서는 모든 감정을 드러낸다. 이런 다양한 시점 변화가 이야기의 흥미를 끌어올렸다. 백구 시점에서는 그녀가 누구인지 너무 궁금했다. 하나씩 단서만 주어질 뿐 속시원히 자신의 얘기를 하지 않는 그녀를 보며 '정체를 밝혀라' 소리가 절로 나왔다. 백사 시점에서 그녀가 겪었던 일이 밝혀진다. 도망쳐 나올 수밖에 없었던 사정, 도망치기보다 정면으로 맞설 결심을 하게 된 변화 과정을 보여준다.
세상과 홀로 맞서야 했던 두 사람. 자신의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하고 싶었고, 공감 받고 싶었으며, 위로받고 싶었다. 세상에서 누군가 한 사람이라도 자신을 돌아봐주고, 돌아갈 곳이 생긴다면, 그것만으로도 서로의 전부가 되어줄 수 있는 백구와 백사다. 그래서 서로를 곱한 수 '11336'이 되었다.
주인공들의 사정이 지지리 궁상처럼 보이는 면이 있지만, 실제 내용은 어둡지 않다. 백구의 친구인 석철과의 욕으로 점철된 대화라던가, 자기 위로(?) 중인 백구를 불쑥 찾아온 백사 등 재밌는 장면이 곳곳에 등장한다. 백구를 돌봐주는 빨간 입술의 미자 아줌마는 씬 스틸러에 준하는 존재감을 과시한다. 둘을 이어준 것도 따지고 보면 미자 아줌마의 공이 크다.
우지혜 작가 글은 가독성이 좋은 편이다. 인물의 성격을 그려낼 수 있을 만큼 특징을 살린 대사를 쓰는 작가다.(개인적으로 좋아하는 글을 쓰는 작가라 사심을 듬뿍 넣었다) 로맨스 소설에서 보기 드문 '몸쓰는 일'을 하는 남주가 등장한다. 여주가 겪는 어려움도 남주의 돈이나 능력으로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여주 스스로 해결한다. 신선한 설정이면서도 전형적인 로맨스 소설 구도를 따라가는 글이다. 현실에 있을 것 같지만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백구가 궁금하다면 추천! 평소에는 순수한 백구지만 개새끼(욕 아닙니다)로 변하면 어찌 되는지 궁금하다면 두 번 추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