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eBook] 이게 다 야구 때문이다 - 어느 젊은 시인의 야구 관람기
서효인 지음 / 다산책방 / 2011년 12월
평점 :
초등학교가 국민학교이던 시절, 토요일에도 4교시까지 수업이 있었다. 4교시를 마치고 집에 돌아와 점심을 먹으며 자연스럽게 텔레비전을 켜면 야구 중계방송이 나왔다. 점심상을 치우고 텔레비전 앞에 앉은 나는 야구 중계방송을 자장가 삼아 스르르 잠이 들곤 했다. 가끔 함께 중계방송을 보던 아버지는 야구장에 데려가겠다고 몇 번이나 약속을 했지만, 내가 야구장에서 야구 경기를 직접 본 건 2000년이 넘어서였다.
국민학생 이후로 단절되었던 야구에 대한 기억이 스멀스멀 올라올 무렵, 내가 응원하는 야구팀은 이빨 빠진 호랑이처럼 예전의 명성은 어디론가 사라진 뒤였다. 매년 내려갈 순위조차 없는 붙박이 하위권에 맴돌고 있었다. 왜 그런 팀을 응원하느냐고 우승하는 팀을 응원하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은 야구를 모르는 사람이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가 응원하는 야구팀이 생기는 일종의 모태신앙과 같은 질긴 인연이 야구라는 사실을 그들은 모른다. 그게 마음대로 되면 매번 하위권이라 놀림당하면서도, 연패를 이어가는 꼬락서니를 보면서도 야구팀을 바꿀 수 없는, 그게 야구다. 그러니까 이게 다 야구 때문이다.
'비밀독서단'을 통해 알게 된 책을 구입하게 된 계기는 모바일 네이버에서 본 쉼 페이지 덕분이다. 주말에 올라오는 쉼 페이지는 책 속 한 문장과 그림이 어우러진 페이지로 매주 어떤 책이 올라올까를 기다린다. 언젠가의 주말에 올라온 한 문장은 "당신도 나도 아직 죽지 않았어. 그러니까 힘내." 이런 말을 줄여서 '파울'이라고 부르기로 한다.였다. '힘이 나는 문장이네'라고 생각하고 책 제목을 보니 <이게 다 야구 때문이다>란다. 방송에서 보고 기억하고 있던 책을 다시 만나는 순간이다.
야구를 몰라도 볼 수 있는 야구 에세이다. 스포츠를 인생에 빗대는 경우가 많은데, 그중에서도 유독 야구는 인생에 자주 비유되곤 한다. 야구는 비어 있는 시간이 게임을 지배하는 경기다. 공이 날아다니는 시간은 엄청 짧은데 반해 준비해야 하는 시간은 긴 운동이다. 준비를 얼마나 잘하는지 티가 나지 않지만, 준비하지 않으면 망하는 경기가 야구다. 인생 또한 그렇지 아니한가.
서효인 시인의 어린 시절부터 시인이 되어 사회인 야구를 하는 모습까지. 야구의 다양한 모습을 투과해 보여주는 인생 에세이다. 사회에 나가기 전부터 '좌절할 준비를 하고 있는 청춘들'에게 보내는 다정한 이야기다. 야구를 사랑하는 같은 세대에게 건네는 위로다. 그러니까 이게 다 야구 때문이다.
-------------------------------
안녕! 잘 가라, 악마 같은 오늘의 야구야. 당분간 우리 만나지 말자. 만나도 알은척하지 말자.
그러나 오늘 저녁에 나는 또 야구를 보겠지. 야구라는 게 그런 거 아닌가. 사람 애간장을 녹이는 주제에, 날마다 쉬지도 않고 해대는 잔인한 게임이다.
대부분의 번트는 희생을 전제로 행해진다. 번트는 고귀하다. 자신을 완벽하게 죽여야만 살려야 할 주자를 완벽하게 살릴 수 있다. 어설프게 자신도 살려고 하면 실패하기 십상이다. 번트를 성공한 선수에게 더그아웃의 선수들은 하이파이브를 청한다.
이기기도, 지기도 하는 야구다.
좋기도 밉기도 하는 게 당신과 그녀다.
그리고 항상 지는 게 당신이다.
어쩐지 야구가 그렇게 좋더라니. 아니다. 당신과 나는 항상 야구에게 져왔다. 만날 화내고 안달복달하며 결국 다시 찾아오는 건 당신과 나였지, 야구는 아니었으니.
'야구 몰라요'였던 그녀가 야구팬이 되었다. 당신이 응원하는 팀의 저지를 입고 야구 모자를 쓴 그녀는 얼마나 아름다운가! 오늘도 내일도 그 다음 날도 당신은 그녀에게 지겠지만, 멀리 보면 팬은 항상 이겼다. 떠나지 않고 그 자리에 있을 때, 야구와 그녀는 결국엔 웃는 얼굴을 보여주니까.
완전 망하거나, 덜 망하거나, 그것이 2000년대 잉여인간들의 삶이죠. 꼭 버려지는 야구공 같지 않나요? 이왕이면 홈런 볼이 되고 싶지만, 되도록 마지막 삼진을 잡아내는 위닝 샷이 되고 싶지만, 쉽지 않아요. 홈런이나 삼진이 아닌, 그 중간에 놓인 야구공의 실밥들을 보려고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