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eBook] 낙원의 오후
조강은 지음 / 카멜 / 2015년 6월
평점 :
키워드 : 사내연애, 다정녀, 상처남, 트라우마
도대체가 속을 알 수 없는 기태신 상무. 3년 7개월이 넘게 그의 비서로 일하고 있는 이하나는 상무의 변덕스러운 감정 변화에 보조를 맞추는 게 어렵기만 하다. 깊은 눈동자에 감정이라고는 찾아낼 수 없는 태신 앞에서 하나는 우울한 회색빛 벽에 군데군데 녹물이 흘러내린 자국이 있는 벽을 바라보는 느낌이다. 보장받은 미래, 큰 키와 잘난 외모, 사회적 신분까지 무엇 하나 모자랄 것이 없는 그인데, 그에게 느껴지는 쓸쓸한 기운은 어디에서 시작된 것일까.
그리고 그가 집 앞으로 찾아왔다. 나를 좋아해서 눈앞에서 치워버리고 짐짝처럼 취급했던 그가 "넌 나의 첫 번째가 될 수 없어. 그래도 나와 함께할 수 있겠어"라며 건조한 목소리로 연애를 제안했다. 그래, 어디가 끝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은 앞으로 나아가기로 했다. 풀숲을 걷다가 가시에 찔리고, 때로는 길을 잃어 헤맬지라도, 그 끝에 절벽이 기다리고 있더라도 이왕이면 좋은 기억으로 남을 연애를 할 것이다. 새벽 3시, 연애를 시작하기로 한 시간. 봄의 어딘가에서 태신과 하나가 연인이 되었다.
로맨스 소설에 자주 등장하는 돈 많은 남자와 평범한 여자가 연애하는 설정이다. 그룹 후계자로 낙점되어 매일 일에 치여사는 기태신. 그의 비서로 일하다가 경영지원팀으로 인사이동을 하게 된 이하나가 연애하는 이야기. 사장과 비서가 연애하는 설정에 남주인 태신의 트라우마까지 매우 뻔한 클리셰가 가득하다. 그런데 같은 소재라 해도 어떻게 양념을 하고 버무리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수많은 사람에게 호평을 받아서 궁금했다. 대체 어떤 양념을 했기에 이렇게 많은 사람이 좋아하는 걸까 하고 말이다.
흔히 생각하는 전형적인 로맨스 소설의 전개 과정인데, 그 전개를 이루는 문체가 아름답다. 적절한 은유와 풍경에 대한 묘사, 사람을 바라보는 따듯한 시선이 담긴 글이다. 중간에 미술품에 대한 이야기가 잠깐 나오는데, 어떤 그림인지 궁금해서 찾아보게 할 정도였다. 또한 공간에 대한 묘사가 포근하다. 서울에서 마당 있는 집에 사는 가족의 풍경이 이처럼 다정할 줄 몰랐다. 아파트나 오피스텔이 아닌 흙이 있는 집에 사는 하나는 그래서 시종일관 다정하고 따듯하게 태신을 감싸 안아준다. 자신의 잘못을 잊지 않으려 부암동에 집을 짓고 사는 태신 또한 한편으로는 온기를 그리워했던 것이다. 한없이 자신을 품어줄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 흙에 뿌리를 내리고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도심 속 빌딩에 포위된 궁에 갈 때면 "백 년 전 이곳에는 어떤 사람이 살았을까. 그들에게는 어떤 이야기가 있을까"하는 궁금증이 생긴다. 그곳에 살았던 그 사람들은 없지만, 그들을 묵묵히 바라봤을 누각, 담, 나무는 알고 있을 테니. 이처럼 특정 공간과 건물이 전해주는 에너지는 상상력을 증폭시킨다. 아무래도 조선의 500년 수도였던 서울의 사대문 안은 그런 이야기를 가득 담은 공간이 아닐까 싶다. 그래서 하나가 사는 효자동과 태신이 사는 부암동, 그들이 지나쳤던 광화문, 삼청각 등의 공간이 주는 따듯함이 좋았다.
다만 태신이 말하는 화법은 어렵게 다가왔다. 직설적으로 말하는 하나와 달리 태신은 온갖 비유와 은유를 잔뜩 끌어오다 보니 이 사람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고민하게 만든다. 태신의 아버지의 표현을 빌리자면 '뫼비우스의 띠처럼' 끝나지 않을 빙빙 돌리기 화법이다. 가끔 솔직하지만 자신의 존재를 부정하며 '기태신이지만 기태신이 아닌 삶'을 살아서인지 단숨에 파악하기 어려운 인물이다.
책장을 쉽게 넘기지 못하는 로맨스 소설을 읽었다. 명확하게 보이는 감정 표현, 쉬운 사건 전개와 해결이 미덕인 로맨스 소설에서 주인공의 감정을 비유로 읽어내고 그들의 끝이 보이는 연애에 눈물이 흘렀다. 잔잔한 마음에 던져진 돌이 일으키는 은은한 파동을 느끼고 싶다면 읽어볼 만한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