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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네필 다이어리 - 철학자와 영화의 만남 ㅣ 시네필 다이어리 1
정여울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0년 1월
평점 :
절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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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영화도 미디어일 뿐이다. 영화는 두 시간 만에 끝나버린다. 그런데 영화의 러닝타임은 두 시간 안팎이지만, 영화가 전하는 메시지는 영화가 끝나고 나서야 비로소 상영되기 시작된다. 오랫동안 우리의 기억 속에 남아 끊임없이 새로운 물음표를 던지는 영화들. 그런 의미에서 영화는 평생 '1인분의 삶'밖에 살 수 없는 인간이 '타인의 삶' 속으로 스며들어 가는, 아주 제한적이지만 여전히 소중한 메시지의 통로가 아닐까. - 111p.
나는 책을 읽고 난 여운을 이 공간에 소소히 남기고 있다. 나보다 뒤에 책을 읽을 이를 위해 남기기 보다는 내가 기억하기 위해 기록하는 게 일차적인 목적이다. 가끔 이 책을 읽었을 때는 이렇게 느꼈고, 저 책은 저렇게 생각했구나 하면서 다시보기를 종종 하기 때문이다. 문자로 된 책은 저자 덕에 머리 속에서 정리하기가 쉽다. 그리고 기억나지 않으면 꺼내 들춰보면 그만이다. 내가 글쓰기 어렵다고 느끼는 분야는 영화나 드라마 같은 영상 매체다. '캡쳐'라는 방법이 있지만 화면 하나하나를 그림으로 저장하며 기록한다는 건 책을 읽는 것보다 수 십 배의 시간과 정성이 들어가는 일이다. 또 영상은 문자보다 간접적이다. 따라서 그 안에 녹아있는 의미를 찾는 게 어렵기만 하다.
'철학자와 영화의 만남'이라는 부제의 <시네필 다이어리>라는 책을 만났다. 철학이라는 모두가 어려워하고 재미없어하는 학문을 영화와 접목시켰다. 사실 철학과 영화를 접목시켰다기보다 저자가 철학자의 글을 인용해 영화와 철학을 이야기하는 책이라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이다. 거창한 철학자나 개념이 종종 등장하지만, 독자에게 거창하게 설명하려고 하진 않는다. '나는 이렇게 멋있고 대단하고 거창한 철학적인 개념을 설명할테니 당신은 두 귀를 쫑긋 세우고 잘 들어주기 바랍니다'가 아닌 '이 영화의 이 장면은 제 생각에 OOO의 이런 개념과 비슷해보입니다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라고 말하는 책이다. '나는 철학적 개념을 미주알고주알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영화라는 프리즘을 통해 우리의 삶과 철학이 아슬아슬하게 입 맞추는 순간을 포착하고 싶었다'(9p) 라는 저자의 말이 책 곳곳에 스며있다.
총 8편의 영화와 철학자가 만났다. 영화는 한 번이라도 들어봤지만, 철학자는 꿈에서도 들어본 적 없는 이름이다. 그런데 이런 철학자의 이름과 그들이 주장했던 이론과 개념을 읽으면서도 거부감이 없었다. 영화를 보면서 한 번은 느꼈음직한 감성을 굳이 글로 표현하자면 이 철학자의 이런 개념일 수도 있다는 친절한 글 덕분이다. 이렇게 영화를 분석하고 철학자가 쓴 책을 읽으려면 얼마나의 시간이 필요한걸까? 3일 동안 책을 읽고 2시간 가량을 들여 리뷰를 쓰고 있지만, 저자가 글을 쓰기 위해 소요한 시간에 비하자니 지나가던 번데기가 웃을 지 모를 일이다.
인상적인 부분은 내가 좋아하는 영화인 <쇼생크 탈출>과 니체를 이어 쓴 대목이었다. 철학의 가차없음과 인정사정없음을 잘 보여주는 니체와 수십 년을 감옥에서 보내야 했던 한 인간의 감옥 탈출기는 절묘하게 어우러진다. 벽을 증오하다가 벽에 길들여지는 인간의 나약함과 자신 안의 자유와 희망을 결코 놓치 않고 벽에 길들여지지 않았던 앤디 듀프레인. 극한까지 몰렸지만 자기 안의 자유를 잃지 않았던 앤디는 추락하지 않고 지상에서 영원으로, 자신이 그렸던 그 곳으로 갈 수 있었다.
8편의 영화 중 3편이 일본 애니메이션이다. 그 중 2편은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이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은 너무나 괜찮지만, 국내 영화가 한 편도 없다는 사실이 씁쓸한 대목이다. 책을 다 읽고 서점에 가니 <시네필 다이어리 2>가 매대에 놓여있었다. 목차를 보니 (여전히) 8편의 영화 중 하나가 한국 영화였다. 지갑이 열리는 순간이다.
영화가 이토록 긴 생명력으로 사랑받는 이유는 모두가 자신만의 '영화같은 삶'을 살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정말 저런 상황에 처하지 싶지 않아' 싶다가도 '내게도 저런 순간이 있었지' 하면서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것도 영화가 가진 매력이다. 이토록 영화같은 삶을 사는 우리에게 머리를 쥐어 뜯으며 고민하는 순간이 있으며, 물 한 모금 넘기지 못할 정도로 힘든 기억이 있다. 그럴 때 철학자가 말을 건다. 비록 가차없고 인정사정없다는 그들이지만 내 말을 들어주고 내 안의 눈으로 내가 아닌 다른 이의 눈으로 나를 돌아보도록 도와준다. '누구에게나 철학이 필요한 순간이 있다'고 말하는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