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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을 속삭여줄게 - 언젠가 떠날 너에게
정혜윤 지음 / 푸른숲 / 2009년 9월
평점 :
절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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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먼 옛날 페르시아의 셰에라자드는 밤마다 왕에게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매일 새로 결혼하고 싶어하는 왕의 손에 다른 여자들이 죽지 않기를 바라며 또한 자신도 죽지 않기를 바라며 한 이야기는 <천일야화>가 되었다. <천일야화>의 셰에라자드가 되고 싶었다는 정혜윤PD는 '지독한(지독한 지는 실제 보지 않아 모르지만) 독서광'이라는 명성에 걸맞게 책과 도시 사이에서 수많은 이야기를 끄집어냈다. 친절하게도 그녀는 '언젠가 떠날 당신을 위해' 먼 이국의 도시 이야기를 들려준다고 한다. 미리 밝혀두지만 <런던을 속삭여 줄게>는 런던 여행기가 아니라 이야기 책이다. 까마득한 먼 옛날, 몇 살인지도 모르는 지구 아가씨가 품고 있는 수많은 이야기를 '런던'이라는 도시를 빌려 나직한 목소리로 속삭이는 이야기 책이다.
내가 생각하는 런던은 이런 이미지다. 한껏 치장을 한 레이디와 백작은 뚜껑이 없는 마차에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앉아 있다. 이들 주변에는 물 위를 유유히 떠다니는 오리떼가 있고, 오리떼를 신기한 듯 바라보는 아이와 엄마가 있다. 주변에는 차분히 승마를 즐기는 남성과 여유롭게 산책을 하는 여성이 눈에 띈다. 지금 이 곳은 19세기 초 하이드 파크의 어느 가을이다. 이렇듯 무언가 여유롭고 유유자적한 점잖은 얼굴이 내가 형상화한 런던의 이미지다. 이는 전적으로 그동안 읽어댄 책의 영향이다.
<런던을 속삭여 줄게>의 런던은 조금 더 다양한 모습과 이야기를 들려준다. 자연사 박물관에 전시된 공룡 화석은 아직도 수많은 비밀을 품고 있는 지구를 말하고 대영 박물관의 그리스 항아리는 수천년간 돌아가지 못한 고향 이야기를 들려준다. 빅토리아 앤드 앨버트 박물관에서는 '해가 지지 않는 나라'였던 영(국)제국의 영광과 그림자를, 런던탑은 권력을 향한 사람들의 욕망과 그 허무함을 이야기 한다.
'어떤 도시든 그 도시의 풍경은 자신의 시선과 감정 속에 있기 때문'에 <런던을 속삭여 줄게>에는 정혜윤PD만의 런던 풍경이 펼쳐져 있다. 본의 아니게 정혜윤PD의 책을 모두 읽은 독자가 됐다. 특별히 아끼는 마음보다 <침대와 책>이후 그녀만의 독특한 글쓰기가 이번엔 어떤 모습인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지금껏 나온 그녀의 책 중에 이번 책이 가장 친절해보인다. 어쨌든 익숙한 지명과 이름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이야기가 많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래도 여전히 자신의 감성과 책 속 문장이 어지럽게 배치된 글쓰기는 변하지 않았다. 런던에서 했던 수많은 이야기 중 한가지 흠이 있다면 사진이 흑백이라는 사실이다. 독특한 종이 재질과 화려한 글제목에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다. 차라리 사진은 없는 게 나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