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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그림자 1 ㅣ 잊힌 책들의 묘지 4부작
카를로스 루이스 사폰 지음, 정동섭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5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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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직도 아버지가 '잊혀진 책들의 묘지'로 나를 처음 데리고 갔던 그 새벽을 기억한다'로 시작하는 <바람의 그림자>는 화자인 다니엘이 10살이던 1945년 '잊혀진 책들의 묘지'에서 발견한 한 권의 책이 발단이다. 다니엘이 발견한 책은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바람의 그림자>, 자신을 사로잡은 이 책의 비밀과 책의 저자인 훌리안 카락스의 이야기를 뒤쫓는 다니엘의 10년의 여정이 2권의 책에 담겨있다.
책과 저자에 대한 이야기를 거슬러 올라가던 다니엘은 중고 서적상 모임의 리더인 구스타보 바로셀로를 알게 되고 그가 거액에 책을 사겠다는 제안을 거절한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잊혀진 훌리안 카락스의 책과 그를 찾는 탐험을 시작한다. 이를 통해 훌리안 카락스의 다른 책을 알고 있는 바로셀로의 조카이자 첫사랑인 클라라를 만나고, 또 하나의 아버지였던 페르민, 지켜주고자 한 베아트리스와 누리아 몽포르트, 얼굴 없는 사나이 쿠베로 등 다양한 사람을 만난다. 훌리안 카락스의 책을 쫓으면서 젊은 카락스의 사랑과 우정, 배신 등의 이야기를 알아간다.
<바람의 그림자>는 가슴아픈 사랑이야기이면서 '바로셀로나'라는 한 도시의 이야기다. 제2차 세계대전의 전초전이라 할 수 있는 스페인 내전 직후의 스페인의 혼란스러운 상황이 책 속에 고스란히 스며있다. 신분을 여러번 바꾸며 살아가는 페르민과 그를 괴롭히는 경찰 푸메로의 이야기는 전쟁이라는 상처가 바로셀로나를 비껴가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잊혀진 책들의 묘지'나 '바다 안개의 천사', '테네브라리움' 같은 기이하면서도 스산한 장소를 배경으로 '바로셀로나'라는 도시의 이중성을 드러낸다. 급격한 변화가 이뤄지는 가운데에서도 소리없는 망령과 전설이 살아있는 도시로서의 바로셀로나를 말이다. 또한 카락스의 이야기를 쫓는 다니엘이 여러 장소를 다니며 보여주는 바로셀로나는 '가우디'만의 바로셀로나가 아님을 알려준다.
누군가의 '그림자'로 살아갔던 사람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페넬로페를 평생 잊지 못하는 훌리안과 이런 훌리안을 평생 도와줬던 친구 미켈. 전쟁이 일어났던 당시 누군가 집 앞에 죽어있어도 집 밖에 나오지 못하고 숨어서 지켜보아야했던 수많은 눈동자들. 살아남은 사람은 전쟁을 기억하고 추억하고 그리고 살아간다. 무정부주의자와 공산주의자, 파시스트까지 저마다 다른 옷을 입어야만 했던 시대에 보아도 보지 않았고, 들어도 듣지 못했던 수많은 그림자의 이야기다.
강렬한 사랑에 미스테리와 고딕소설에서 보여지는 망령과 전설이 섞인 소설이기에 다니엘을 쫓기만 해도 소설로서의 재미는 충분하다. 여기에 바로셀로나라는 도시의 다른 일면과 스페인이 겪었던 전쟁의 아픔을 책에서 느낄 수 있다. 또한 스페인의 유명한 작가와 작품이 곳곳에 숨어있다. 스페인 문학의 새로운 매력에 빠져보자.
"사람은 착한 원숭이처럼, 사회적인 동물로서 친구나 친척을 싸고돌고 그 밖의 인간들에 대해선 기만과 험담을 하곤 하지. 그게 바로 우리들의 윤리적 행동의 본질적 기준이야." 그가 주장했다. "그건 순수하게 생물학적인 거라구." - 154p, <바람의 그림자> 1권
"아니. 책을 쓰라고. 편지 말구. 나를 위해 소설을 써. 페넬로페를 위해서도." 훌리안은 그때 그 친구를 얼마나 많이 그리워할 것인가를 깨달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네 꿈들을 간직해." 미켈이 말했다. "언제 그것들이 필요할지 모르는 일이니까 말야." - 70p, <바람의 그림자> 2권
전쟁만큼 망각을 길러내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 다니엘. 우리 모두는 입을 다물고 있고, 저들은 우리가 보았던 것, 우리가 했던 것, 우리 자신과 다른 이들에게서 우리가 배웠던 것은 환영이라고, 지나가는 악몽이라고 열심히 우리를 설득하지. 전쟁은 추억이 없어. 그래서 과거의 일을 이야기하는 목소리들이 남아 있지 않을 때까지, 우리가 전쟁을 인정하지 않아. 그것이 다른 얼굴, 다른 이름으로 다시 돌아와 예전에 남겨두었던 것들을 먹어 치울 때가 올 때까지. 아무도 전쟁을 이해하려는 용기를 가지고 있지 않지. - 303~304p, <바람의 그림자> 2권
훌리안의 모든 글 중 언제나 내 마음에 가장 와 닿았던 것이, 사람은 기억되는 동안에는 계속 살아 있는 거라는 말이지. 그를 만나기 전 수년 동안 훌리안에게서 그랬던 것처럼, 내가 너를 알고 또 누군가를 신뢰한다면 그게 너일 거라는 느낌이 드는구나. 나를 기억해줘, 다니엘. 비록 한 귀퉁이에 숨겨서라도. 나를 떠나보내지 말아줘. - 331~332p, <바람의 그림자> 2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