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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5시 동유럽의 골목을 걷다 - 한 소심한 수다쟁이의 동유럽 꼼꼼 유랑기
이정흠 지음 / 즐거운상상 / 2008년 6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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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카페에 가입하면서 알게 된 장르가 '여행에세이'다. 게으르고 귀찮은 걸 정말 싫어하는지라 소위 말하는 여행에 대한 '로망'내지는 '동경'이 내게는 없다. 여행에세이를 보더라도 '와, 좋구나' 정도의 감상이 고작이다. 그래서 그림같은 사진이 나열되고 개인 감상만 늘어놓은 여행에세이는 솔직히 불편하다. 그림같은 사진을 찍기 위해 삼각대를 들고 다녀야 하고, 뷰 포인트를 찾아다니는 그 모든 과정과 지극히 개인적인 감상을 들어주기엔 내 인내심은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진보다는 글이 많은 여행에세이를 주로 택한다. 글이 많다보니 그 안에는 작가 개인의 감상 외에도 이전에는 알지 못했던 정보가 있다.
'한 소심한 수다쟁이의 동유럽 꼼꼼 유랑기'라는 수식어에 걸맞게 글이 빽빽하게 들어서 있다. 멋진 동유럽 골목 사진을 기대했다면, 지금 당장 책을 내려놓는 것이 좋다. 그동안 신문이나 사진을 통해서만 볼 수 있었던 동유럽의 다른 모습을 글로 보여주는 책이기 때문이다. 드라마를 좋아해 드라마로 논문을 썼다는 저자는 군대를 마친 후, 한 권의 책이 남긴 감상을 잊지 못해 동유럽 유랑길에 나선다. 그를 동유럽으로 이끈 책은 요네하라 마리의 <프라하의 소녀시대>다. 로버트 카플란의 <지중해 오디세이>에도 이와 유사한 구절이 나온다. 사람을 길로 나서게 하는 건 '한 권의 책'이라는 진리라도 있는 것인지 궁금하기까지 하다.
체코 프라하를 시작으로 폴란드, 슬로바키아, 헝가리,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몬테네그로,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세르비아, 코소보, 루마니아, 불가리아의 여러 도시가 저자가 다닌 곳이다. 그 중에는 익숙한 도시와 국가가 있고, 전혀 들어본 적도 없는 도시와 국가도 있다. 누구나 아는 프라하, 바르샤바보다 인상 깊었던 곳은 오랜 내전으로 신음하는 이전 유고슬라비아 연방 지역이다. 발칸반도는 지리적 특성과 지형의 영향으로 다양한 민족이 섞여있고, 종교 또한 다양하다. 이는 오랜 전쟁과 내전을 통해 나타난다. <지중해 오디세이>에서도 발칸반도의 서글픈 악순환을 말하며, 서방세계의 어설픈 개입에 일침을 가했었다.
아직도 남아있는 내전의 상처에 이 책의 저자인 이정흠 또한 서글픔을 느낀다. 그리고 우리의 현실을 떠올린다. 사실 동유럽 여행기이지만 그 안에 녹아있는 감성은 우리의 현실을 자각하게 만들었다. 사상과 체제에 의해 분단을 겪고 있는 한반도는 아직도 '전쟁 일시 중단'상태이지 않은가? 민족이라는 이름으로 인종청소와 내전이 일어났고, 결국 피해자와 가해자가 같은 상황인 것은 사상이 다르다는 이유로 서로에게 총부리를 겨누고 있고 여전히 서로를 미워하고 있는 우리 자신을 떠올리게 했다. 발칸을 '세계의 화약고'라 부르지만, 한반도 역시 화약고이다.
여행은 '낭만'과 동의어로 인식하는 경우가 많다. 여행은 낭만이기 보다는 '자기 자신을 찾아가는 과정'이 아닐까? 자신보다 큰 캐리어 가방을 끌며 여행지마다 화보촬영을 한 듯한 여행에세이에는 관심없다. 꾀죄죄한 여행자에게 행운을 빌어주는 현지인을 그린 사람냄새 나는 여행에세이가 좋다. 배낭 메고 어디든 떠나고 싶다면, 그 곳이 동유럽이여도 괜찮을 듯 싶다.
'아!'라는 소리가 절로 나오는 반인륜적 범죄들을 연달아 보니 점점 머리가 이상해지는 것 같았다. 인간은 이토록 허약한 존재인데, 당시 나치는 그 끝없는 잔인함을 대체 어디에서 끌어낸 걸까. 이성과 감정을 마비시키는 약이라도 있었던 걸까. 이유 없는 증오, 집단의식은 언제라도 이성과 감정을 마비시킨다. 아우슈비츠의 참상 이후 60년도 더 지났지만, 아직도 세계 곳곳에서 그런 '마비'의 모습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심지어 아우슈비츠의 가장 큰 피해자인 유대인들조차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지독하게 괴롭히고 있으니까. -121p
정서를 공유할 수 없는 모국인보다는 서로의 생각과 정서를 공유할 자세를 가진 타국인이 훨씬 낫다. 민족 따위, 이해와 공감의 정서 앞에서 힘이 없다. 티토의 묘지에서 이런 상황을 맞닥뜨린 건 참 거짓말 같은 우연이었지만. - 365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