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극에서 대한민국까지 - 코로나19로 남극해 고립된 알바트로스 호 탈출기
김태훈 지음 / 푸른향기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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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여행기를 왜 읽을까?

가본 곳은 '나도 여기 가 봤거든. 맞아, 그랬었지' 맞장구를 치면서 추억을 되살리기도 하고, 안 가본 곳은 언젠가는 반드시 가 보리라 전의를 불태우면서 호기심으로 대리만족을 얻는다. 중독성이 강한 게 여행인지라 안 가본 곳은 말할 것도 없고 가본 곳도 세월이 흐른 뒤 또 가고 싶은 게 여행족의 마음이다. 가고 또 가고!

제아무리 여행의 고수라 하더라도 남극까지 가본 사람은 많지 않다. '5대양 6대주'라지만 남극은 선뜻 접근하기가 쉽지 않은 지역이고, 약간은 여행이 아닌 탐사 내지 탐험의 분위기를 풍긴다.

 

<남극에서 대한민국까지>를 쓴 김태훈의 이력이 책에 자세히 나와 있지는 않다. 그는 한국을 떠나 동남아시아로 추측되는 지역에서 생활한 지 10년이 흘렀고, 마지막 정착지는 싱가포르이었으며 40이 되자 더 늦기 전에 평소 꿈꿔왔던 세계 일주를 부인과 감행한다. 8개월간 남미 여행을 거쳐 늘 호기심과 관심이 충만했던 남극 크루즈에 도전하기 위해, 우리에겐 아웃도어 브랜드명으로 잘 알려진 파타고니아 지역의 가장 남쪽 지구 최남단 도시 우수아이아에 도착한다.

지구 최남단의 도시, 아르헨티나의 우수아이아. 'Fin del Mundo(세상의 끝)'

남극 크루즈를 타는 건 기정사실이지만 어떤 경로를 택하느냐에 따라 경비는 큰 차이가 난다. 저자는 평소 가고 싶었던 남극반도와 주변 섬인 사우스조지아 섬과 포클랜드 섬까지 일주하며, 유람선에서 눈으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직접 랜딩을 해서 야생동물을 직접 관찰하는 체험형 관광을 선택한다. 이 코스가 제일 비싼 코스지만, 크루즈가 출발하는 도시에서 출발 직전에 나오는 'Last Minute Ticket(땡처리 티켓)'을 운 좋게 구해 버킷 리스트를 완성한다.

Dream come true!

저자는 아직까지 사람의 손길이 많이 닿지 않은 지구 최대의 사막 남극에서 대자연의 신비를 만끽하며, 펭귄으로 대표되는 야생동물들과 평생 지워지지 않을 체험을 한다. 크루즈에서의 생활도 만족스러워 배에서 남극 바다에 몸을 던지는 폴라플런지(Polar Plunge)도 도전하고, 선상에서 주최된 사진 콘테스트 '풍경' 부문에서 1위를 수상하는 기쁨도 누린다. 애당초 이번 크루즈에 탑승한 많은 관광객들은 위대한 탐험가 섀클턴의 경로를 밟아보는 것에 큰 의의를 두었기에 섀클턴에 관한 이야기와 포클랜드를 두고 벌어진 영국과 아르헨티나의 전쟁, 축구의 신 마라도나의 월드컵 후일담까지 책을 읽어가는 또 다른 흥미거리였다. 책장을 넘길 때마다 거의 매 페이지 등장하는 내셔널 지오그래픽에서 만남직한 크고 작은 사진까지 충분한 만족감을 주는 여행기다.

 "사람을 찾습니다.

위험한 여정. 쥐꼬리 같은 월급.
살을 에는 추위에, 몇 개월간 어둠 속에서 지속되는 위험에 견뎌야 함.
생사 귀환 보장 못함. 그러나 성공할 경우 명예와 영광이 있음.
- 빌링턴가 4번지, 어니스트 섀클턴", P 101

 

 

아문센의 남극점 도달 2년 후, 섀클턴이 남극 탐험에 동참할 인원을 구하기 위해 신문사에 낸 구인 광고다. 이 말도 안 되는 광고는 사람들의 마음을 흔들었고, 무려 5천 명의 지원자 중 27명이 합격해서 '섀클턴 탐험대'가 되었다. 이 광고를 현대에 낸다면 어떤 결과가 나올까 궁금해진다.

사람들은 흔히 어느 분야든 1위는 기억하지만 2위는 기억하지 않는다. 2위는커녕 실패자는 거론할 가치조차 없다고들 생각한다. 하지만 남극 탐험에 2번이나 성공하지 못한 섀클턴의 '위대한 실패'의 여정은 많은 이들의 마음속에 영감을 불러일으켰다. 이 놀라운 실패담을 <남극에서 대한민국까지>로 처음 접했는데 이 책이 내게 준 또 다른 선물이다.

 

"남극에서 대한민국까지"

처음 책 제목을 보고 다소 의아했다. 이게 무슨 의미일까? 가기 힘든 오지 남극을 제목에 넣은 세계 일주인가. 어디서 출발하든 어디를 거치든 한국으로 돌아오는 건 당연한 일일 텐데 왜 굳이 '대한민국까지'라는 표현을 넣었을까? 왜 이런 제목을 넣었는가는 책의 후반부에 밝혀진다.

꿈같은 남극 크루즈가 끝나갈 무렵, 저자는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을 듣는다. 세상과 단절된 지구의 끝에서 다양한 종류의 펭귄들과 씨름하는 사이, 코로나는 팬데믹이 되어 전 세계를 강타하고 있었고, 급기야 저자가 탑승한 알바트로스 호는 계획된 입항이 거듭 거절당한다. 아르헨티나에서도, 우루과이에서도.

'코로나 초기 유람선에서 감염이 생겨 피해자가 생기고, 어디서도 받아주질 않아 입항에 어려움을 겪어 크루즈에 고립되어 있다' 이런 뉴스를 접하곤 했는데, 바로 그 상황이 김태훈 부부에게 벌어진 거다. 크루즈에서 내릴 유일한 방안은 귀국 항공편이 확인이 되는 것뿐. 이마저도 해외 항공편의 연계가 확실해야만 가능한 시나리오인데, 평소라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을 항공 사정이지만 코로나 비상시국 하에서는 있던 항공편도 대부분 취소되는 한시 앞을 예측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게다가 저자는 지구의 끝에서 몇 번의 환승을 거쳐 한국으로 향해야 한다. 예매를 했다가 운항이 취소되고... 취소된 티켓값은 현금으로 돌려받는 게 아니라 항공사 포인트로 받아야 하는 불이익을 감수하면서도 계속 티켓팅을 시도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배에서 마냥 머무를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우여곡절 끝에 몬테비데오(우루과이)-상파울루(브라질)-마드리드(스페인)-런던(영국)-인천(한국) 환승 노선 예매에 성공한다. 브라질도 입국 금지가 예고되어 무조건 이 날짜에는 떠나야 하는, 크루즈에서 내리던 날. 어이없는 우루과이 출입국관리소 직원의 실수로 마지막 기회는 날아간다. 결국 저자 부부는 자국민의 안전을 위해 전세기를 띄우기로 한 호주 국민 외에 마지막까지 크루즈에 남은 외국인이 되었다.

남미 영사관 직원들이 자기 역할을 충실히 해서 정말 다행이다.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감사하고 자부심이 생긴다.

그래도 국적기라고 대한항공이 힘써줘서 역시 다행이다.

저자 부부를 위해 밤낮으로 서포트한 한국의 지인들 덕분에 결국 이들은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싣는다. 책의 전반부가 남극의 찬탄에 바쳐졌다면, 후반부는 오도 가도 못하고 꼼짝없이 크루즈에 갇힌 18일간의 선상 고립생활이 그려진다.

저자의 사연은 '영화보다 더 영화 같다'라는 상투적인 표현을 빌릴 수밖에 없을 거 같다. 현실은 여전히 영화보다 더한 일들이 많다. 가슴 졸이며 저자의 노심초사와 함께 한 후반부 18일, 웬만한 스릴러보다 더한 긴장감으로 페이지 넘기는 속도가 빨라진다. 마지막 귀환길에 나도 모르게 '만세'를 불렀고, 감동으로 눈가가 촉촉해졌다.

"남극에서 대한민국까지" 맞네!

수많은 여행기를 읽었지만 <남극에서 대한민국까지>는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거 같다. 우선 남극이란 미지의 세계를 대리 체험하게 해준 드문 여행기이기도 하고, 불운하게도 코로나와 맞닥뜨린 선상 크루즈의 경험 역시 특별함으로 가득하다.

남극이 천국이었다면, 선상에 고립된 크루즈 생활은 생지옥이었다. 천당에서 지옥을 오간 이 특별한 여행기가 비단 여행을 사랑하는 독자 외에도 많은 독자들을 만나기를 희망한다. 초강력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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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가 급등 사유 없음 - 세력의 주가급등 패턴을 찾는 공시 매뉴얼
장지웅 지음 / (주)이상미디랩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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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주식 시장에 상장이 된 종목은 불특정 다수에게 피해를 줄 수 있기에 '공시'라는 제도를 운용한다.

"이렇게 상장기업에는 주주를 비롯해 많은 이해관계자가 있기 때문에, 중요한 경영 관련 의사결정의 내용을 외부에 공개해야 합니다. 이것을 기업공시(公示)라고 합니다. 매 분기 그리고 연간 단위로 회사의 사업 내용과 결산재무제표를 담은 보고서는 물론이고, 대주주나 주요 주주의 지분 변동, 합병이나 분할, 주식이나 채권 발행을 통한 자금 조달(증자나 차입), 주식 소각(감자), 다른 회사 인수, 주요 사업의 매각, 다른 회사와의 주요 거래계약 같은 것을 공시해야 합니다. 이런 공시는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시스템인 '다트(DART : http://dart.fss.or.kr/)'에서 검색할 수 있습니다." - 중앙SUNDAY, 2021년 1월 30일 「쌍용양회 우선주 이상 급등, 작전세력 헛정보에 '쪽박'」, 김수헌

M&A 전문가로 기업 인수합병 전 과정을 총괄한 풍부한 경험을 지닌 장지웅이 쓴 <주가급등 사유 없음>은 이러한 전자공시를 통해 주가 변동의 개연성을 찾고 투자자 스스로 향후 흐름에 대한 면밀한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돕고자 하는 취지가 책의 목적이다.

결론은 공시에 암호처럼 표시된 '숨은 그림 찾기'가 가능하다면 눈 뜨고 코 베어 가는 주식 시장에서 세력의 작전에 휘말리지 않을 가능성이 다소나마 높아질 수 있다는 기대를 가져봄직하다.


여기서 저자가 논하는 대상은 정상적인 과정을 밟아 성장하는 양질의 기업이 아니다. 소위 말하는 '작전' 세력이 개입되어 단기간에 주가 부양을 해서 치고 빠지는 선수들의 세계다. 남들이 모르는 호재가 나에게만 전달됐다고, 뜬소문에 혹해서 배팅하다가는 세력의 로드맵대로 움직이는 총알받이가 되기 십상이다.

세력은 양질의 성장, 기업보국 이런 형이상학에는 관심이 없다. 오로지 목표한 대로 주가를 띄우고 한 탕하고 빠지는 게 목적이다. 여기에 개미 투자자가 곡 소리가 나든, 기업 관계자가 피눈물을 흘리든 누군가의 피해는 관심 밖이다.


"결과적으로 시장에서 다수의 행복은 중요하지 않다.

오히려 위기 속에서 구조조정의 명분은 극대화되고,

시장의 거대 주체가 만든 방향성에 부합한

기업과 개인 일부가 살아남는다." - P 328


자본주의의 최첨단에 서 있는 작전 세력은 혼자서는 모든 일을 하기 어려워 팀으로 움직이고 결과를 만들어낸다. 주가 부양을 위해서는 큰 규모의 자금이 필요하기에 대상 기업이 선정되면 최우선으로 전주 혹은 사채업자를 찾아가 사업 설명(!)을 하고 총알을 모은다. 반대로 물주가 전적이 좋은 선수들로 팀을 꾸리기도 한다. 너무 덩치가 큰 기업은 영향을 행사하는 데 제한이 따르므로, 대략 시가총액 2천억 미만 기업에서 대상을 고른다.

세력들은 사전 작업을 위해 최소 6개월에서 1년 정도의 계획을 세워 입장하고, 결과 또한 일정 시간이 반드시 필요하기에 그 기간 동안 투여된 자금에 대한 이자 지급은 물론, 과정별로 수수료와 인건비, 언론 홍보비, 필요시 펄(상장기업을 인수합병하여 우회상장을 시도하는 비상장기업)로 붙일 비상장사 인수 비용 등 각종 비용이 기하급수적으로 들어간다. 이러한 항목을 고려하면 주가가 두 배 이상으로 뛰어야 손익분기점에 이르고, 세 배 이상은 돼야 모든 비용을 공제하고 수익이 남는 구조가 된다. 이런 계산법에 따르면 작전의 목표주가는 작업 초기 단계 주가의 3배 가격대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자본시장의 속성상 여러 변수가 생길 수 있어 성공 확률은 15% 정도라고 한다. 한참 작업 중에 코로나 변수를 만난다면? 관리종목에서도 남는 장사를 하고, 불성실공시는 물론 상장폐지마저도 전혀 두려워하지 않고, 금감원 앞에서도 당당하고, 검찰 조사는 물론 최악의 경우 학교(교도소)까지 갈 상황까지 피하기 힘든 게 그들 작전 세력이다.

앞서 말한 전주나 사채업자도 뭔가 범죄와 연관된 음습한 분위기를 고려하면 안 된다. 이미 제도권 안으로 불법을 피하면서 진화했고, 작전의 과정 역시 합법과 불법의 영역이 교묘하게 걸쳐 있어 나중에라도 범법 행위를 따지기가 쉽지 않다. 경제사범이 그래서 잡기도 힘들고, 잡아도 중징계가 어렵다.

"정상적이고 우량한 회사는 전환사채 CB, 신주인수권부사채 BW, 교환사채 EB와 같은 메자닌 채권을 통한 자금조달이나 주식분할, 병합 등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반면 세력이 개입되는 종목은 자금조달이나 최대주주변경과 같은 이벤트를 위해 메자닌 채권 발행 계획이 단계별로 정교하게 짜여있다." - P 24


투자자 입장에서 유일한 무기는 바로 '공시 바로보기'인 셈이고, 이 책의 부제는 '세력의 주가 급등 패턴을 찾는 공시 매뉴얼'이다. 다행히 한국은 공시 제도가 발전되어 있어서 워런 버핏은 "세계 어느 나라도 기업에 대한 정보를 한국처럼 인터넷으로 바로 확인할 수는 없다."라고 말한 바 있다.

"어떤 방향으로 전개될지 예측 가능한 메시지는 공시에서 먼저 확인해야 한다. 세력 입장에서 차트란 자신들이 의도한 대로 주가가 움직인 발자국에 가깝다." - P 29

저자는 다양한 현장 경험을 지녔다. 주총에서 조폭이 휘두른 둔기에 맞아 갈비뼈가 부러진 적도 있지만, 현실에선 종종 있는 일이라고...

저자가 독자에게 전달하려는 모든 노하우는 주로 본문 DART 3편 '주가가 움직이기 전 공시에 나타나는 신호'에 실렸다. 내용이 내용인지라 주식 중수 이상 고수가 읽는다면 얻는 것이 많을 책이다. 주식투자에 관한 무수히 많은 책이 있지만 공시 이면에 숨겨진 의미를 밝혀 내는 이 책의 존재가치는 독보적이다. 다만 선수들이 움직이는 '게임의 법칙'이 그다지 허술하게 공시에 '나 여기 있어!'하고 떠먹여 줄 리가 만무하고, 설사 있다 하더라도 그 의미를 저자처럼 파악하기란 매우 요원한 일일 것이란 느낌적 느낌은 들지만, 기업에 대한 정보를 다 안다는 자만이나 호재에 대한 지나친 과신은 지옥으로 가는 지름길이란 진리는 느껴진다. 모르면 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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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우지 않아도 삶에 스며드는 축복
정애리 지음 / 놀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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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보지만 TV는 잘 안 보는 관계로 정애리라는 배우를 화면으로 본 적은 거의 없다. 그저 오랜 기간 활동한 연기자라는 정도만 알뿐인데, 이 책을 읽고 보니 그는 선한 영향력이 대단한 사람이다.

<채우지 않아도 삶에 스며드는 축복>은 '시인의 마음'을 가진 연기자 정애리가 쓴 에세이다.

에세이지만 문장이 길진 않아, 시와 산문의 중간 형태의 글들이 대부분인 아포리즘 수필이다. 여기에 본인이 직접 찍었다는 사진과 알려진 시 10편이 곁들여져 마음을 따뜻하게 데운다.

연기 생활 40년 이상이라는 그의 눈에는 세상에 하찮은 게 없고, 현재 누리는 모든 게 감사하다. 그의 시선에는 개망초, 담쟁이, 가시나무, 전봇대 등 모든 존재에는 의미가 있다. 특별히 자랑할 것 없는 보통 사람들의 일상 속에 행복이 있으며, 거기에서 소중함과 감사함을 찾아야 한다는 내용이 본문 내용을 채운다.

이 책은 전작 <축복>에 이어 7년 만에 나온 에세이인데, 역시 제목에 "축복"이라는 단어가 포함되어 있다. 그만큼 저자는 인생을 축복이라 여기며 산다.

저자의 가치관은 제목 "채우지 않아도 삶에 스며드는 축복"에 거의 드러난다. 뭔가를 채우려고만 드는 현대인에게 배우 정애리는 그러지 않아도 충분하다고, 이만큼 해낸 것도 대단한 것이라고, 우리네 평범한 인생은 그 자체가 축복이라고 조용히 설파하며 위로의 손길을 건넨다.

 

"아니 어쩌면 죽어라 했는데도 잘 안 되는 경우가 더 많지요.

지금 서 있는 자리도 최선이 아닌

차선의 자리가 이어진 것일 때도 있습니다.

운전을 하다 보면 내비게이션이 가르쳐준 길을

지나칠 때가 있습니다.

그럼 또 다른 길을 통해 목적지에 다다르지요.

조금 돌아가도 괜찮습니다.

조금 늦어도 괜찮습니다.

우린 결국 도착하니까요.

당신은 살아 있습니다.

그거면 된 거지요.

우린 또 길을 걸어가면 되니까요."

- P 72~73

 

돌아가신 부모님에게는 임종을 지키지 못한 딸이자, 딸 지현이의 엄마이고, 잘 알려진 연기자이고, 얼마 전까지 EBS FM 「정애리의 시 콘서트」를 3년간 진행했었고, 드라마가 인연이 되어 취미로 금속공예를 하고, 틈틈이 본인 이름으로 된 책도 낸다. 그 바쁜 와중에 정애리 인생에서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은 봉사다.

매년 여름 월드비전과 아프리카 오지를 다닌 지 17년, 한국생명의 전화 홍보대사로는 20년, 연탄이 필요한 계층에 연탄을 배달하는 연탄은행... 그저 타의 모범이 되기 위한 훈장 같은 봉사가 아니라, 오랜 활동 기간이 보여주듯 봉사는 그녀 삶의 일부분이다. '바쁘다, 여력이 안 된다, 나중에~' 이런 핑계를 입에 달고 사는 사람들에게 정애리는 행동으로서 동참을 촉구한다. 아주 작은 것이라도 자신이 할 수 있는 만큼만이라도 일단 시작하자!

 "세상에 새로운 것은 없습니다.

있을 수 없는 일도 없더군요.

지금 겪어내는 내가

처음 당하는 것뿐이죠."

- 지혜를 더하는 길, P 129

 

에세이다 보니 자신에 대한 솔직한 이야기도 나오는데, 돌아가신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과 2016년 난소암으로 투병한 경험이 담담히 기술된다. 큰 병을 앓고 나면 '세상을 보는 시야가 달라진다'고들 하는데, 난소암 이전과 이후는 분명히 또 내면의 변화가 있었으리라.

'내려놓음, 비움, 나눔과 봉사' 이런 키워드에 공감하는 독자라면 이 책을 읽는 동안 저자와 주파수가 잘 맞는 행복한 힐링의 시간을 보장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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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의 비움 공부 - 비움을 알아간다는 것
조희 지음 / 리텍콘텐츠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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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은 알지만 아무도 안 읽는 책이 고전이라고 한다.

장자 역시 본인 이름으로 된 책이 있지만, 정작 그 책을 읽은 사람은 많지 않다. 대부분 학창 시절 노장사상을 배울 때 노자, 장자에 대한 언급 정도로 넘어갔고, 이후 그 유명한 호접몽(胡蝶夢) 고사 정도 떠올리겠다.

인문학자 조희가 쓴 <장자의 비움 공부>는 장자의 철학에 심취한 저자가 현대인이 쉽게 장자의 세계에 입문할 수 있도록 그 핵심 사상을 전달하는 책이다.

책 제목에도 나오지만, 장자의 핵심 철학은 '비움'이다. 그래서 책의 부제 역시 '비움을 알아간다는 것'이다.

욕망의 사다리에서 위로만 위로만 올라가려는 현대인에게 장자의 이러한 내려놓음 철학은 자칫 한가한 유유자적 음풍농월 세계관으로 비칠지도 모르겠다. 저자 조희에 따르면 장자의 사상은 그리 간단하지 않고, 오히려 깊이에 있어서는 '공자왈 맹자왈'보다 한 수 위라고 평가한다.

"저자는 공자의 논어를 보면서 그것을 실천하려면 정말 힘들겠다고 생각했는데, 장자의 사상이 공자의 것보다 훨씬 더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다. 장자의 도는 공자의 사상을 보완하고, 모든 것을 초월해야 하는 큰 도를 주장하기 때문에 더 실천하기 어렵다고 느껴졌다." - P 95

"공자의 말보다도 더 실천하기 어려운 것이 바로 장자의 사상이다." - P 154

무위자연을 최고의 선으로 두고, 자연스러움을 강조하는 장자 철학의 원문을 100개의 단락으로 정리하고, 개별 문장에 대한 주석을 현대적으로 저자가 해설해 주는 구성이다.

있는 것을 그대로 두는 장자 철학의 핵심을 가슴 깊이 이해한다면, 책에서 반복되는 내용들이 어느 정도 눈이 아닌 마음에 와닿는다. 자연친화적이고, 억지로 뭔가를 이루려 하지 않고, 큰 욕심을 부리며 아웅다웅하지 않고 물 흘러가는듯한 인생관!

인생을 고(苦)로 파악하고, 공(空)의 가치를 강조한 불교 철학과도 장자는 닮은 데가 많다.

 

"즉, 진정 도를 깨닫는 사람은

삶을 기뻐하거나 죽음을 싫어하지 않으며,

작은 것을 탓하거나 성공을 과시하지도 않고,

억지로 일을 꾸미지도 않는다." - P 254

 

<장자>를 읽어보진 않았지만, <장자의 비움 공부>에서는 공자와 그 제자에 대한 이야기가 빈번하게 나온다. 자연스레 공자와 장자의 세계관을 비교하게 되는데, 입신양명에 큰 비중을 두었던 공자에 비해 장자의 품은 넓어 포용력이 있다. 이를 저자는 '배움을 강조하는 공자가 당신을 압박한다면, 비움을 중시하는 장자는 당신에게 휴식을 줄 것이다.'라고 정곡을 찌른다. 역사적으로 우리나라에 큰 영향을 끼친 공자와 상대적으로 저평가된 장자를 비교해 보는 재미가 <장자의 비움 공부>를 읽는 또 하나의 재미다.

 

지나친 경쟁과 남과의 비교는 사람을 피곤하게 만들고, 만족이란 단어를 뇌세포에서 지운다. 한 걸음 더 천천히 간다 해도 그리 늦는 것은 아니라고, 인생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라고, 미니멀한 심플 라이프를 추구하고자 하는 현대인이라면 장자와의 궁합은 좋다. 우리는 누구나 미생이지만, 각자의 쓰임새가 있다.

코로나 역시 성장 일변도의 자본주의가 맞이한 반대 급부 아니겠는가! 시대적으로 장자가 부활할 여건은 조성되었다. 뭔가를 무조건 더하고자만 하는 삶에서 비움의 가치는 소중하고, 장자의 내려놓음 철학은 시대의 해독제로 기능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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킨 (리커버 에디션) 옥타비아 버틀러 리커버 컬렉션
옥타비아 버틀러 지음, 이수현 옮김 / 비채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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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킨>(리커버 에디션)을 접하기 전 약간 부담스러웠던 게 사실이다. 그다지 친하지 않은 SF인데다가, 그 분야에서는 '그랜드 데임 Grand Dame'으로 추앙받는 옥타비아 버틀러의 무게, 무엇보다 처음 읽은 그의 <와일드 시드>를 힘겹게 페이지를 넘긴 기억이 뇌리에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킨>은 이 모든 걱정이 기우였음을 깨닫게 한다.


「작가로 현대를 살아가는 다나는 인텔리 흑인 여성이다. 그녀의 남자 친구는 백인 케빈이고 역시 작가다.

원인 모를 특이한 현상으로 다나는 100여 년 전 노예 시대 뉴욕의 아래쪽에 위치한 메릴랜드 주로 시간 이동하는데, 거기서 오래전 조상 루퍼스를 만난다. 루퍼스는 백인 농장주의 아들인데 그가 위기에 빠지면 다나가 소환되고, 다나가 죽을 위험에 처하면 현대로 복귀하는 과정을 반복하면서 다나는 애증의 대상인 루퍼스의 평생을 목격한다. 다나가 목격하고 체험하는 건 그때 그 시절 흑인 노예들의 처참한 삶이다.」



"흑인 여자를 강간한다고 부끄러울 것은 없어도,

흑인 여자를 사랑한다면 부끄러울 수 있는 시대였다." - P 236


미국 남부에서 흑인 노예는 주인 맘대로 처분할 수 있는 재산이었다. 인권은 배부른 소리요 사치다.

도망치다가 잡히면 귀가 잘리고, 특별한 이유 없이 '교화' 차원에서 등 가죽이 벗겨지도록 채찍질을 당하고, 어젯밤까지는 성적 노예로 봉사하다 다음 날이면 노예 상인에게 팔리고, 엄마의 피울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녀들은 팔려서 이산가족이 되고, 결국 흑인 부부는 자녀라는 판매가 가능한 생산물을 낳고(다다익선이다) 계속 주인을 위해 봉사하도록 딴 맘먹지않게하는 안정화 장치일 뿐이다. 간략히 정리하자면 '건방진 검둥이보다 더 나쁜 건 없는' 시절이다. <킨>은 인류의 아픈 기억을 들추어낸다.

현대 사회에서 안정적인 삶을 영위하던 다나가 어느 날 갑자기 야만의 시대로 내던져지면서 선명한 대비를 통해 충격은 배가된다. 애당초 과거 시점에서 주인공 1인칭 화법으로 이야기를 이끌어 나가는 방식보다 훨씬 충격적이고 현대 독자에게 전달되는 아픔은 몇 배는 고통스럽다. 맨 처음 다나가 채찍질을 당하는 순간, 마치 내 등 가죽이 벗겨지는 듯한 통증이 전달된다. 다나의 선조인 루퍼스는 불쑥 나타난 특이한 존재 다나에 대해서 호의적이고 다른 농장주에 비해서 덜 악랄한 사람일 수는 있으나, 그 역시 도긴개긴이다. 다나는 외모를 닮은 앨리스를 보고 본능적으로 유전자를 느끼고, 루퍼스는 다른 육체지만 다나와 앨리스를 거의 동일한 인물처럼 느낀다. 다나의 선조가 백인 루퍼스와 흑인 앨리스라는 점이 특이하긴 하지만, 이들의 관계는 '사랑이 꽃 피는 나무'가 아니었다는 점과 앨리스의 비참한 최후를 통해 비극성은 고조된다.

타임슬립은 SF에서는 흔한 장치지만 이토록 효과적인 방식은 인상 깊다. <킨>을 읽고 직접적으로 선조들의 고된 삶을 느끼고 피눈물을 흘릴 현대의 흑인 독자뿐 아니라, 일반 독자들에게도 주인공 다나와 함께 하는 추체험은 그 후로도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독서 체험이다. 기대 이상으로 페이지는 잘 넘어가고, 흥미로운 스토리텔링이지만 옥타비아 버틀러의 <킨>은 당신 영혼에 문신을 새길 강렬한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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